'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해 졌음에도 풍요를 누리지 못한 가나한 삶'이란 말에 경종을 울리네요^^
이 땅에서의 염려와 복잡한 심정으로 영적인 기쁨을 누리지 못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영과 육으로 풍성해지시는 자매 모임이 되길 소망합니다.
2023-07-10 08:46:54 | 김세라
글만 읽어도 부쩍 성화된 기분이에요. 잘 정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도전,성장이란 단어를 품기 위해 요즘 두 딸과 노력중이라 그런지 성령충만을 위한 기도가 절로 나오네요.. 부어주시는 평강의 힘을 바탕으로 아이들이 세상능력도 키워 예수님을 드러낸다면 더이상 바랄게 없을 것 같아요~^^
-소년들이라도 기진하고 피곤하며 청년들도 완전히 쓰러질 것이나 주를 기다리는 자들은 자기 힘을 회복하리니 그들은 독수리같이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요, 달려가도 피곤하지 아니하고 걸어가도 기진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서 40장 30,31절 말씀입니다.
2023-07-08 12:15:09 | 목영주
빌3:20 우리의 생활 방식은 하늘에 있으며 거기로부터 또한 우리가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생활하는 방식이 예수님으로 인해 바뀌어야
성화를 이루어 갈 수 있어요.
그것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기에 날마다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이고요.
맑은 정신을 가지고 혼란한 이 시기를 바르게 걸어가야지요.
우리 모두 힘을 내자고요.
2023-07-08 11:04:16 | 이수영
2023년 7월 6일 목요자매모임
안녕하세요^^
한 믿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나누는 교제는 주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인 것 같아요^^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우리의 칭의의 유일한 토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떠한 공로나 선함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공로나 선함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고, 보라 새 것이 왔도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가 회심한 그 순간부터,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주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를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마침내 그리스도를 대면 할 때까지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죄 없는 완전함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가 범죄 할 때, 아버지께 우리를 변호해주실
의로우신 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는 비록 형편없는 기도를 드릴지라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고
기도해주시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성령님께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십니다.
아버지, 우리는 날이 갈수록 우리의 죄책을 더 알게 되고
점점 더 우리의 죄를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더욱 더
신실함과 기쁨으로 주를 섬기게 해주십시오.
무엇보다도 우리가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지금은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겸손히 주 앞에 나아갑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신 주님
주께서 우리를 향해 하신 대속 사역은
우리가 우리의 섬김을 통해 주를 높이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섬김을 결코 공로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을 보완하는 것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잘 섬긴다고 할지라도,
그 섬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토록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리스도만을 높입니다.
우리가 신실하고 겸손히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 10장 말씀을 묵상하라.
묵상은 적극적으로 성경을 되새기는 것이다. 시편에서 ‘묵상’대신 쓰인 표현으로는 ‘생각하다’와 ‘깊이 되새기다’를 들 수 있다. 묵상한다는 말은 스스로 진리에 관해 묻는 걸 가리킨다.
“지금 진리의 빛 가운데 살고 있는 걸까? 진리는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거지?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나? 진심으로 믿고 단단히 붙잡으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성경 어느 본문을 묵상한다는 말에는 미리 치열한 연구와 해석을 거쳐 그 뜻을 파악한 상태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무슨 얘긴지도 모르는 말씀을 되새기거나 누릴 수는 없는 법이다. 말씀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그 진리를 삶에 적용하도록 이끌어 간다.
하나님이 본문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고 성경 전체를 볼 때 본문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토대로 두고 성경을 읽지 않으면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거기에 마음이 사로잡힐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렇게 되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스스로의 심정이나 감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묵상은 이성적인 사고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 아니다.
성경적인 묵상은 성경을 깊이 있게 해석하고 공부한 결과를 토대로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대단히 이성적이고 논쟁적이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분석과 성찰을 부추기고 그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에 맞춘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영적으로 성경을 ‘소화’하는 작업이다.
삶에 적용하고, 한 구절 한 구절이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현재 상태와 앞길을 구체적으로 진단하고 어떻게 이끄는지 숙고하게 한다. 성경을 통해 힘을 얻고, 소망을 품게 하며, 스스로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기억하게 한다.
성경의 진리들을 가슴에 단단히 품고 새겨야 한다.
초월 명상의 한 갈래로 요즘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만트라명상’은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라 스스로 신이 되는 경험이기 때문에 이것은 성경적인 묵상이 아니다.
성경의 진리를 추상화하면 안 된다. 삶과 동떨어진 개념으로 여기면 안 된다.
성경 진리의 가르침이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
행동과다와 주의력결핍장애에 빠진 현대사회는 속도가 떨어지는 성찰과 묵상을 실종된 기술쯤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기도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가 되려면 규칙적으로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은 일의 앞뒤를 골똘히 생각하여 깊은 확신에 이르는 성품을 갖는다. 어려운 개념을 쉽고 간단한 말로 설명할 줄 알며, 무슨 일을 하든 이면에는 그 이유가 있다.
만사를 건성으로 살피며,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고르고 선택하며 살뿐 아니라, 왜 그래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분에 따라 행동하다 보니 피상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묵상하는 이들은 압력을 받아 내고 견딜 줄 알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쭉정이처럼 남들이 몰려가는 대로 이리저리 떠돌 뿐이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가식적이고, 공허하며, 진전성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진리를 마음에 새기는데 실패하여 원래 모습과 생활방식을 조금도 바꾸지 못하는 까닭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높고 희귀한 일을 두고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믿음의 진리가 마음과 성품을 사로잡고 또 빚어 갈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유산을 남겼는데 이것저것 떼고 나면 몇 푼 안 될 것 같아 오래도록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기대와 달리 그 액수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기가 막혀 어쩔 줄 모를 게 뻔하다. 실제로는 갑부였는데 쪼들리며 살았다니!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만은 피하라고 당부한다.
어쩌면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나쁜 습관에 시달리고, 걱정, 따분함, 낙담, 분노 등에 휩쓸리기 일쑤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맞서고 처리해야 할 크고 작은 문제와 이슈들이 산더미 같다. 하지만 그 바닥에 깔린 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안에서 부요해졌으면서도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 단 하나뿐이다.
사도바울의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님의 ‘화학처리’, 다시 말해서 ‘영적인 감동’을 확보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머리로 진리에 동의하고 입으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생활방식에는 이렇다 할 실질적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성령님이 마음을 민감하게 하신 상태에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진리의 빛에 노출되면, 정서적인 반응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생활하고 행동하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지게 마련이다. 성령님은 현실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기쁨에 겨워 두려움을 잊고 과감하게 행동하게 하신다. 그러면 인생 전반을 바라보는 시각과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복음 속에서 자신의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영적인 완고함, 죄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실감해야 한다. 얼룩덜룩 오점이 많은 선행 기록부를 가지고 하나님의 눈앞에서 그 허다한 죄와 허물을 다 덮는 게 불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선택은 저마다의 몫이다. 두려움과 야심, 탐욕과 욕정, 중독과 내면의 공허감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알고 배워야 한다.
2023-07-08 10:44:26 | 이은정
'겸손은 기도하게 만드는 요인이자 열매이다.'겸손한 사람이 기도하고자 나아가고 기도함으로써 겸손해 지는 원리를 배웠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2023-07-03 13:21:55 | 김세라
하나님과 독대하는 기도는 꾸밀 수가 없어요.
모든 것 다 아시는 아버지께 다 쏟아놓는데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지 생각해 보게 되네요.
하나님께 영광과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싶은데.
2023-06-30 19:17:32 | 이수영
좋은말 실천하고 싶은 말들이 가득하네요! 하나님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말씀 가까이 하며 주인이신 예수님께 맡기는 하루되게 해 주세요..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2023-06-30 11:50:55 | 목영주
2023년 6월29일 목요자매모임
안녕하세요^^
경건한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깊은 내면의 기쁨과 만족을 누린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연구하고 삶에 적용하여 윤리적이고, 순종하는 삶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풍성한 자원을 이용하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책임이며 그 자원을 이용해야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다.
제 7장 하나님에 대한 행복한 두려움 속에서 기도하라.
기도란 우주를 다스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독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란 무엇인가?
보통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벌을 받을까 걱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로마서 8장 1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관해 무얼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인가?
징벌에 대한 두려움은 자기중심적인 두려움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에게 몰두하는 이들에게 찾아온다.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스럽고 행복한 두려움이 갈수록 깊어지게 마련이다. 하나님 안에서 말로 할 수 없는 사랑과 행복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룩한 임재 가운데 머무는 특권에 가슴이 떨리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갈망이 나날이 짙어진다. 주님 마음을 슬프게 하지 않을까 몹시 걱정스러워한다.
겸손은 기도하게 만드는 요인이자 열매이다.
영적 겸손은 스스로의 허물과 연약함에 무자비하리만치 정직해야 한다. 얼굴에 가면을 뒤집어쓰는 ‘허구’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한다. 가식을 남김없이 털어버리고 허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고백과 회개는 진실한 기도에 꼭 필요한 결정적인 성분이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데려간다. 인간의 결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현장이다.
올바른 기도에는 회개가 따라야 한다.
스스로 저지른 잘못에 책임을 지는 대신 우쭐거리며 자신의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린다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게 아니다.
기도는 자기 합리화나 남 탓, 자기 연민, 영적인 교만 따위를 버리기를 요구하고 또 그럴 힘을 준다. 허구를 벗으면 벗을수록 기도는 그만큼 풍성하고 깊어질 것이다.
도깨비방망이, 요술 램프, 행운을 비는 주문 등의 얘기가 사방에 차고 넘치는 걸 보면, 이미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욕구를 조화롭게 처리하지 못할 뿐 아니라 현명하지도 않아서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다. 주님은 거룩한 뜻에 어긋나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시며, 그 뜻에는 멀리 내다봤을 때 우리에게 가장 선한 것들이 포함된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전등 스위치를 올리면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그렇다면 스위치가 전구에 에너지를 공급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빛은 전기에서 나왔다. 스위치는 에너지 자체가 아니라 전구를 동력원과 연결시켜 주는 장치일 뿐이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켜 준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건 요술 주문 같은 게 아니다. 주술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기도하는 가운데 자기 능력이나 경력에 의존하지 않고 구원을 베푸시고 용납해 주신 그리스도를 의식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말한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배경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놓는 작업이다.
예수님의 이름은 주님의 거룩한 인격과 구원사역을 압축해 놓은 일종의 속기록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선한행실에 기댈 게 아니라 주님의 청구권에 의지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한다고 하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좋은 아버지라면 다 그러하듯, 하나님 아버지 역시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하신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다. 성령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확신과 깨달음을 얻는다. 성경을 읽고 본문이 하나님에 대해 무얼 알려 주는지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위대함에 눈을 뜨면 자신의 죄스러움을 새로이 실감하게 되는 법이다. 죄를 더 깊이 인식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고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솟는다. “ 더 많이 용서받은 이가 더 많이 사랑하게 되어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 한다” 고 표현한다. 기본적으로 포도나무에 접붙인 가지와 같다는 뜻이다. 줄기를 이루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갈수록 분명하게 드러나길 기대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 말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땅에서의 삶은 유혹의 싸움이 일상적으로 지속되고 있으므로 승리를 위해 주님의 능력, 성령님의 권능, 성경적 진리가 필요하다고 당부한다. 추상적인 지침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영적인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갑으로 가슴을 가리며, 복음에서 비롯된 평안으로 신발을 신고,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로 공격을 막아 내야 한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기도하며, 늘 기도하라고 바울은 부탁한다.
기도는 정직한 자기 인식이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숨기지 말아야 한다. 올바르게 기도하면 영적인 시야가 투명해진다. 바리새인 같은 위선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기도에는 인간들 사이에선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투명한 정직성이 포함된다.
가면은 벗겨지고 ‘척’도 통하지 않는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영원토록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 이다.
2023-06-30 07:23:22 | 이은정
좋은글 감사해요^^'기도는 교리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도록 해준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가짐과 행동, 성품이 변화 된다.'성화되는 과정중에서 필요한 부분이 기도라는 것을 깨닫게 되네요.
매번 어떤 분들이 이런 풍성한 음식을 준비해 주시는지 궁금하네요^^
더욱 풍성한 교제가 되시길 멀리서 응원합니다!!
2023-06-26 12:02:25 | 김세라
하나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기도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함께 나눈 것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자들에게 능력을 넣어주신 하나님께서 적재적소에
사용하시지요.
2023-06-26 08:49:02 | 이수영
글을 잘 써주셔서 내용이 머리속에 잘 정리 되었어요. 고맙습니다 자매님~~ 고난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지켜주심에 평강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자녀임을 증명하는게 아닐까 싶어요..지나고 나서야 선하게 이끌어 주셨다는 경험은 땡깡을 졸업하고 가만히 견디는 수준까지는 이르게 되었네요~^^ 요즘 세태에서는 세상따라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씀! 말씀밖에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고요..
2023-06-25 08:29:15 | 목영주
2023년 6월22일 목요자매모임
안녕하세요^^
성경의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여성들을 높이 평가한다는 점입니다. 사회와 가정 안에서 여성이 맡은 역할을 고귀하게 여기고 그들의 영향력을 중시하며, 특별히 경건한 여성들이 믿음 안에서 순종하는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아내가 집안의 가구나 노예 같은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남편이 소중히 여겨야 할 조력자이자 존중해야 할 동반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탁월함은 언제나 사회적 지위나 부, 외모가 아니라 도덕적, 영적 성품에서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인위적으로 치장하는 외모가 아니라 경건함과 선한 행위가 여성이 지니는 아름다움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말했습니다.
딤전 2장9절
또한 이런 식으로 여자들도 단정한 옷으로 자기를 꾸미되 얌전하게 맑은 정신으로 하고 장식한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 하지 말며
10절
오히려 (하나님을 따른다고 고백하는 여자들에게 합당한) 선한 행위로 하기를 원하노라.
성경에는 진리를 입증하는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여성들의 충실한 삶이야말로 그들이 남긴 참되고 영원한 유산입니다.
그들의 삶과 충실한 성품을 배우면서 도전과 격려를 느끼게 됩니다.
자매모임을 통해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삶에 적용 할 수 있게 우리를 성장시켜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제5장 기도는 결코 주문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다. 하지만 대화는 인격적인 만남이나 관계로 이어지지 못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데 그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알기를 원한다. 곧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주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례가 드문드문 나타날 뿐이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주님의 삼위일체적인 특징이 여실히 드러날 때마다 그분의 아버지로서의 성품도 뚜렷하고 도드라지게 보여 준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 죄에서 인류를 구하게 하셨으며 그 덕에 하나님의 아들딸로 입양될 길이 열렸다.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이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고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성령님은 구원 받은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거룩한 본성을 심으셔서 가족 유사성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란 말에 담긴 풍성한 의미는 은혜와 믿음으로 입양되어 하나님의 새 식구가 된 이들에게만 적용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법적으로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하나님으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공급받는 관계에 들어간다.
기도는 이처럼 친밀한 관계와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껏 느끼고 누리는 방법인 동시에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확신을 토대로 평안하고 기운찬 삶을 살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고대국가와 문화는 백이면 백 사원을 갖추고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신성한 존재 사이에 크게 벌어진 틈, 또는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위대한 반면, 사람은 한없이 왜소하다. 하나님은 완전하지만 우리는 흠투성이다. 사원은 벌어진 틈을 잇기 위해 몸부림치는 공간이다. 까마득하게 멀리 있는 신을 가까이 끌어들일 줄 아는 전문적인 ‘중재자’(제사장)들이 거기서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리며 의식을 집전한다.
하지만 너나없이 그런 몸짓들이 죄다 불완전하고 단편적임을 안다. 어느 종교도 그 틈이 메워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수많은 종교는 신을 숭배하거나 달래는 건 가능할지 모르지만 가까이 지내며 관계를 쌓는 건 불가능하다.
세상의 철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이 되셨다. 우리와 똑같이 유한한 존재가 되셔서 고난과 죽음을 겪으셨다. 어떤 행위를 하고 어떤 공로를 세웠느냐와 상관없이 죄를 용서받고 의로워질 수 있는 길을 여시려고 스스로 인간이 되셨다. 우리가 감히 주님 곁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다. 거대한 틈 건너편에 계실뿐만 아니라 그 간격을 잇는 다리가 되셨다.
이렇게 하나님과 맺은 관계는 깨지거나 고장 나지 않는다. 인간의 성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결코 주문이 아니다.
성경의 기도는 값없이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아버지의 한결같은 사랑을 근거로 드리는 간구다.
기도는 교리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도록 해준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가짐과 행동, 성품이 변화 된다.
여덟 살짜리 사내아이가 장난감 트럭을 가지고 놀다가 망가뜨렸다고 생각해 보자. 몹시 낙담한 아이는 아빠 엄마에게 달려가 고쳐 달라고 떼를 쓸 것이다. 하지만 울고불고하는 아이에게 아빠가 “얘야, 먼 친척 어르신이 돌아가시면서 네게 1.000억이라는 큰돈을 남겨 주셨어” 하면 아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은가? 십중팔구 더 크게 울면서 트럭을 고쳐 내라고 아우성 칠게 뻔하다. 아직 어려서 그런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 역시 영적 용량이 부족해서 예수님 안에서 스스로 어떤 신분인지 실감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베푸신 구원의 높이와 깊이와 너비와 길이를 파악할 영적 능력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길 바울이 간구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경건한 지식과 통찰력이 필요하다.
에베소서 1장 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절
너희의 지각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19절
또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에 따라,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그분의 권능의 지극히 크심이 무엇인지 너희가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23-06-24 16:57:15 | 이은정
기록 감사합니다^^
많은 지체들 더해져서 더욱 풍성한 교제가 되길 소망합니다.
2023-06-20 08:18:50 | 김세라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 반응한다는 말이 저절로 끄덕여 져요.
기도는 누구나 다 하죠.
기도의 대상이 중요하고 그 대상이 알아주는 것은 우리만의 특권입니다.
2023-06-16 15:25:04 | 이수영
요약을 잘해주셔서 저절로 반성되어지네요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도 중요하지만 나약함고백하며 내어맡기는 일상으로 하나님하고의 관계를 더 중시하지 못한 점을 발견했네요..) 부모님의 깊은뜻을 자식이 알면알수록 안심편안하고 더 힘나게 살아지는 것처럼 우리가 말씀으로 하나님알아가기! 기본이며 귀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2023-06-16 07:27:40 | 목영주
2023년 6월 16일 목요자매모임
안녕하세요^^
경건한 독서는 성경을 대체하거나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하며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영적으로 성장시켜 줍니다.
에베소서 5장 15절
그런즉 너희는 주의하여 조심스럽게 걷되 어리석은 자들처럼 하지 말고 지혜로운 자들처럼 하며
16절
시간을 되찾으라, 날들이 악하니라.
17절
그러므로 너희는 지혜가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오히려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제 3장 기도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세상에 존재하는 오만 가지 기도가 본질적으로는 다를 게 없이 다 똑같은가? 그게 아니라면 참다운 기도란 무엇이고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 절대자를 향한 인간의 본능, 기도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등 모든 종교들은 어김없이 기도를 신앙의 핵심으로 꼽는다. 유대교인들은 하루에 세 차례 기도하지만 무슬림들은 매일 다섯 차례씩 기도하는 계율에 따른다. 기독교는 교단마다 공동기도와 개인기도, 목회기도를 비롯해 다양한 전통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불교도들은 마니차(원통형의 회전 예배기)를 돌린다. 힌두교도들은 수많은 신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골라 도움을 청하거나 세계의 평화를 구할 것이다. 종교라면 코웃음부터 치는 이들도 기도를 드린다. 이처럼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 사이의 소통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어떤 형태로든 상존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유념할 게 있다. 기도는 보편적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기도가 똑같은 건 아니다.
-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반응이다.
성경의 시각으로 보면 기도가 범우주적인 현상인 것은 조금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말은 주님과 관계를 맺으며 그분을 반영 하도록 설계되었다는 뜻이다.
로마서 1장19절~20절은 인간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며 위대한 전능자가 있어 만물을 짓고 돌아가게 한다는 결론에 이를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 얼마나 연약하고 위태로운 존재인지 실감케 하는 사건은 이 원초적인 인식을 흔들어 깨워 기도하며 간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와 문화를 좇는 이들도 열심히 기도하며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을 부끄럽게 할 만큼 지극정성인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된 성경과 그 중심 메시지인 복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공급받는다.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인 성경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로 반응 할 수 있다. 성경 말씀과 성령님 덕에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답변이 될 수 있다. 온전한 대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 기도는 하나님과 쌍방향 소통 활동
욥은 그의 이름을 달고 구약성경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책에서 시종일관 하나님께 부르짖듯 고뇌에 찬 기도를 드린다. 쉴 새 없이 불평을 쏟아 내면서도 욥은 절대로 주님께 등을 돌리거나 그분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기도하면서 고난과 고통을 겪어 갈 따름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은 조목조목 생생하게 설명하셨다. 하나님이 제시한 심오한 환상 앞에 욥은 탄식하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마침내 욥은 회개와 찬양이 어우러진 장대한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또렷이 알아 갈수록, 불평과 하소연뿐이던 욥의 기도는 차츰 고백과 간구, 찬양으로 발전해 갔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실해질수록 기도는 더 풍성해지고 변화의 폭이 인생 전반으로 널리 확산된다.
기도의 능력은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 또는 기교가 아니라 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달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욥에게는 하나님이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내게도 그렇게 해 주시면 좋겠다”고 대꾸하고픈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이들에게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성품을 훨씬 명쾌하게 드러내는 패를 쥐었으니 그런 소리 마시라”고 얘기하고 싶다.
히브리서 1장1절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해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2절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그 아들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셨으며 그분께서 또한 그 아들로 말미암아 세상들을 만드셨느니라.
3절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 자체의 정확한 형상이시며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떠받치시는 이 아들께서는 친히 우리 죄들을 정결하게 하신 뒤에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그보다 더 알아듣기 쉽고, 인격적이며, 근사하게 소통하는 통로는 없다. 성경에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직시할 수 있다.
제 4장 소견대로 하는 기도는 비극이다.
말씀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 기도의 출발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주님을 섬기는지 신경 쓸 필요 없이 그저 기도만 하면 된다는 식의 권유는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기도 원리가 될 수 없다. 상대의 실체와 됨됨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관계가 발전하길 기대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원하는 감정과 경험을 토대로 어떻게 기도할지 결정해선 안 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선명하게 알수록 기도는 더 정확하게 틀이 잡히고 다듬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기도는 제한적이고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 뿐만 아니라 본질에서 벗어나 엉뚱하게 흘러갈 수도 있다.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스스로 그려 낸 하나님이나 제 눈에 근사해 보이는 삶에 반응하게 될 개연성이 높다. 마음 내키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을 지어내는 지경에 이르기 십상이다.
서구 문화 속에서 자란 이들은 사랑이 넘치고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좋아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은 반기지 않는다. 그래서 회개라든지 죄를 용서받은 기쁨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기도라 할지라도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면 결국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즉흥적으로 떠오른 자신의 생각이나 충동, 느낌을 하나님이 마음에 들려주시는 음성으로 착각하는, 자기 소견대로 드리는 기도는 비극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 하시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 반응한다.
하나님을 계속해서 알아가지 못하면 성화의 삶을 살아 갈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연구를 등한시하는 것은 눈가리개를 하고서 아무런 방향 감각 없이 그리고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
2023-06-15 21:59:28 | 이은정
좋은 글 고맙습니다. 반찬들을 마구마구 집어먹고 싶네요~^^ 삶에서 큰고난은 물론 작은고난도 파워의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심을 믿고 견딜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삶으로 그분에 대해 잘아는것! 그래서 저절로 맡겨지는 것! 거기에 있지않나 싶어요..오늘도 교회섬김으로 동분서주한 교회형제자매님들께 죄송하고 고마운마음이었습니다~~
2023-06-11 16:22:01 | 목영주
기도의 힘은 특별합니다.
위급한 순간에 합심하여 하는 기도의 위력은 엄청납니다.
그러나 기도는 특별하고 거창하게 격식을 갖추어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제 경우는 일상속에서 주님과 대화하듯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계시니까요.
간절히하는 기도는 일상적인 기도와는 다르더군요.
기도라는 말은 한 단어지만 때마다 다르게 되는 것은 저만 그런지~
2023-06-09 16:29:10 | 이수영
새로운 주제로 자매모임을 하였네요^^
기도에 대해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2023-06-09 15:53:49 | 김세라
2023년 6월 8일 목요자매모임
안녕하세요 ^^
오늘은 “ 팀 켈러의 기도 ” 책을 가지고 교제를 나누는 첫 시간이었습니다.
책을 중심으로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또한 삶에 적용하는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15절
그러므로 어찌해야 하겠느냐? 내가 영과 함께 기도하고 또한 이해하면서 기도하며
내가 영과 함께 노래하고 또한 이해하면서 노래하리라.
제 1장 바른 기도를 꿈꾸다.
- 명상센터를 찾아 헤매는 현대인들
한 세대 전에 일어난 영성과 명상, 관상 등에 대한 관심이 아직까지도 서구 사회 전반에 걸쳐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비틀즈가 동양의 명상에 눈길을 주면서 순식간에 대중화의 물꼬가 트인 뒤로 제도 종교의 쇠락과 맞물려 꾸준히 확장세를 이어 가고 있다. 정기적인 예배의 통상적인 절차를 아는 이들은 갈수록 줄어들지만 영적인 갈망은 어떤 형태로든 여전히 존재한다.
교회 역시 기도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커져 왔으며, 묵상이니 관상이니 하는 옛 전례로 돌아가고자 하는 강력한 움직임이 일었다. 온갖 ‘영성 훈련’을 인도하고 지도하는 기관과 조직, 네트워크, 전문가들이 곳곳에 차고 넘친다.
- 기도는 세상을 거스른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7-18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받은 영적인 복을 이해하고 경건한 지식과 통찰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바울이 쓴 글을 다 살펴봐도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환경과 처지를 바꿔 달라고 호소하는 대목이 들어 있지 않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수많은 고초를 겪으며 살고 있었다.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바울의 기도들에서는 좀 괜찮은 황제를 만나게 해 달라거나 눈에 불을 켜고 찾으러 다니는 병사들에게서 지켜 달라는 건 물론이고 다음 끼니를 책임져 달라는 간구조차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은 요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기도 제목 리스트에 올려놓고 요청했음직한 온갖 유익한 조건들을 구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얻어야 할 결정적인 응답은 환경의 변화보다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지식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실재를 강렬하게 감지하지 못한다면 좋은 환경은 지나친 자신감과 영적인 무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내심 ‘요긴한 게 다 수중에 있는데 굳이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반면에 ’밝아진 마음‘이 없으면 좌절과 낙담에 빠질 수도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땅히 그래야 하듯 한없는 위안을 주는 게 아니라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삶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더 잘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외면생활에 우선순위를 두면 내면생활은 어둡고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혼자라는 생각에 무얼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자기 검열을 거듭할수록 심기가 불편해지고 급기야는 시야가 극도로 좁아져서 반성이니 성찰이니 하는 게 도무지 불가능한 형국에 이를 것이다. 거기서 상태가 더 심각해지면 진실성이 삶에서 완전히 실종될 수도 있다. 속에는 자기 회의와 걱정, 자기 연민, 해묵은 원한 등이 그득해도 겉으로는 자신감을 내비치며 영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건강하고 온전한 듯 행세한다. 하지만 어떻게 마음속의 여러 방들에 들어가 무엇이 들어찼는지 확인하고 처리할 방도를 가늠하지 못한다. 간단히 말해서, 내면생활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 한, 백이면 백 위선에 빠지고 만다.
참다운 자신을 찾으려면 지켜보는 눈길이 전혀 없을 때, 이러저러한 상념에 잠기도록 몰아가는 압박 요인이 전혀 없는 순간에 무얼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살피라. 생각이 하나님을 향해 흘러가는가? 잘난 체하지 않는 겸손한 인간으로 보이고 싶은가? 솔선해서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라.
내면생활에 우선순위를 둔다는 말이 개인주의적이거나 이기주의적인 생활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을 더 잘 알아 가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과업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에 속해야 하고 개인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공동 예배에도 참석해야 하고, 고요히 묵상하는 동시에 성경을 공부하기도 해야 한다.
- 기도를 알려거든 성경을 펼쳐라.
성경은 시종일관 하나님을 말한다. 기도와 관련한 이야기가 갈피갈피 골고루 스며들어 있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기도가 위대한 것은 곧 인간의 삶 가운데 미치는 하나님의 손길과 영광이 크고 넓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성경은 일관되게 이 진리를 증언하는 길고 긴 간증이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 바치며 장대한 기도를 드렸다. 기도가 그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일임을 다시 한 번 보게 되는 대목이다. 구약성경 욥기는 주로 욥이라는 인물이 엄청난 고통 속에서 기도로 나가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기도로 백성들을 고쳤으며,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변질되고 타락했음을 통렬히 비판했다.
기도는 너무 엄청난 것이어서 성경 어디를 펴든 금방 찾아볼 수 있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계신 자리마다 어김없이 기도가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어디나 계시고 한없이 크신 분이므로 기도 역시 삶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 수밖에 없다.
- 기도라는 위대한 길에 들어서 보라
기도는 ‘인간을 처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숨결’이다. 기도는 인간이 가진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기도는 인간이 갈구하는 영혼의 깊은 안식이다. 기도는 힘과 생명력의 유일한 근원인 ‘영혼의 피’다. 예수님의 이름에 기대어 기도하고 그분이 베푸시는 구원을 믿고 기도하면, 영적으로 임금님 앞에 서기에 합당한 예복을 ‘잘 차려입은 인물이 된다’
평생 동안 가야 할 기도의 험한 여정을 막 시작하는 이들은 너나없이 자신이 실체를 가늠하지 못한다. 오로지 기도를 통해서만 저마다의 실상과 마주한다.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는 스스로의 참모습을 알 수 없는 까닭이다. 기도는 주님 앞에 서서 자신의 참다운 됨됨이를 공부하고 그분께 스스로의 진수를 드리는 행위이다. 하나님만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 가는 일이란 얘기다.
성경에는 탄식과 간구, 애원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기도는 세상의 악한 현실을 거스르는 일종의 반역이므로 성경에는 숱한 탄식과 간구, 애원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이들은 헛된 몸짓이 아니다.
오만한 심령은 성을 공략하는 병기로서 기도가 갖는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 예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마음 이야말로 죄를 면할 유일한 피난처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용서와 의로움에 기대지 않는 한,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 그분 앞에 서지 못한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과 연합하게 한다.
기도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요, 친밀감이며, 고단한 씨름이지만 본질에 맞닿는 길이기도 하다. 그만큼 중요하거나, 힘겹거나, 풍요하거나, 삶을 바꿔 놓을 만한 일은 어디에도 없다. 기도만큼 위대한 일은 결단코 없다.
2023-06-09 08:19:14 | 이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