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여라도 오해가 있을까 하여 댓글을 올립니다.
저는 당연히 우리 사랑침례교회의 거의 대부분의 분들이 종교 시스템에서
완전한 자유함을 얻으시고 구원받은 성도님들인 것을 믿습니다.
단지, 부족한 문장을 통해 잠시나마 우리 시대의
가슴 아픈 영적 현실에 대한 묵상을 나누려 한 것임을 헤아려 주십시요.
항상 감사합니다.
2013-12-14 01:40:06 | 김대용
*1편 :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com&write_id=3778
종교생활에 심취해 바른 신앙과 구원의 도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요? 때로 사람은 그야말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쉽게 변하거나 생각이 바뀌지 않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친구 중에 교통사고로 뇌에 위중한 부상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다. 가족과 본인의 노력으로 지금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큰 불편이 없을 정도로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죽기 직전까지 갔던 엄청난 사고와 오랜 회복기간을 거치고도 이 친구의 성격적인 단점은 거의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인정하는 그 독특한 아집과 단점들이 그런 큰 인생의 위기를 겪고도 별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이 얼마나 변하기 힘든 존재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심지어 죽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누가복음 16장의 부자는 정확하게 증명해 줍니다.
이에 그가 이르되, 그러므로 아버지여, 간구하건대 아버지께서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소서. 내게 다섯 형제가 있사오니 그가 그들에게 증언하여 그들 또한 이 고통 받는 장소로 오지 않게 하소서, 하거늘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대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저들의 말을 들을 것이니라, 하매 그가 이르되, 아니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은 자들로부터 그들에게 간다면 그들이 회개하리이다, 하니(눅16:27~30)
본문에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지하세계의 낙원에 있는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 아직 살아있는 있는 자신의 형제들에게 참된 믿음에 대한 진리를 증언함으로써 그들이 회개하여 지옥의 자식 신세를 면하게 해 주기를 간청합니다. 종교 시스템의 노예로 살다가 지옥에 왔으면서도 여전히 종교의 핵심 요소인 눈에 보이는 것,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즐겨 반응하는 것으로 살아있는 형제들의 종교성을 타파시키려는 이 부자의 내면에 증식하는 지독한 종교 바이러스는 지옥의 불꽃으로도 박멸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호흡이 그 육체에 붙어있는 동안 당대 가장 고급스러운 삶의 범주를 누리고 살다가 지옥의 불꽃 속에 절여지는 대반전을 경험하고도 생각의 중심축이 옮겨지지 않은 이 놀라운 현상은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위에 이야기했듯이 지옥의 고통은 인간의 상상력의 범위를 놀랍도록 한참이나 초월하는 영역에 있습니다. 이 부자는 지금 그 초월적 징벌의 세계를 온몸―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이들이 말하는 혼적인 몸(soulish body)―으로 경험하는 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끝내 지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던 그 부패한 사고의 틀을 전혀 벗어버리지 못하는 놀라운 실상을 예수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보이는 것이 있어야 믿을 수 있고 기적적인 일 정도는 일어나야 사람이 변하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대언자들의 선포로는 절대 충분치 않다는 이 전혀 낯설지 않은 하나의 전형적인 신념은 21세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 기원이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종교 시스템은 심지어 이 부자를 거슬러 올라가 가인에게까지 다다릅니다(유11).
또한, 이러한 굳건한 일종의 사고방식 즉, 사람의 눈과 감각기관으로 감지되는 현실 세계의 증거들을 통해서만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강력한 주장은 모든 현세적인 축복을 갈망하는 기복적 태도와 사실상 하나의 덩어리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는 이를 정확하게 증명해주고 있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바로 종교 시스템에 안주하려는 인간의 역사를 타고 흐르는 이 뿌리 깊은 지독한 욕망의 덫이 현실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누렸던 한 사람을 지옥 자식 신세에서 면하지 못하게 붙잡아 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종교에 빠진 이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바른 믿음을 규정하고 정의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 의해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못하였느냐? 참으로 들었은즉, 그것들의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것들의 말들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10:17~18).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것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느니라.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히11:1~3).
이와 함께 지옥의 불꽃이라는 초월적 형벌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부패한 사고체계를 허물지 못했던 부자를 향한 아브라함의 통렬한 선포가 위의 말씀들과 얼마나 정교하게 일맥상통하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그들이 모세와 대언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어떤 사람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날지라도 그들이 설득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눅16:31).
지금 이 순간까지도 천국과 지옥의 방문기를 설파하는 거짓 간증자들을 통해 저리도 명확한 성경 말씀은 여전히 모욕을 당하고 멸시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실존했던 인물인 유대인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종교와 복음의 엄청난 간극에 대해서 명료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더불어 끝까지 고집하며 종교인의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복음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종말이 어떠한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참으로 기묘한 것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명확한 계시의 말씀들이 기록된 성경책을 밤낮없이 들고 다니면서도 종교인으로 살다가 파멸해 간 선배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허다하게 많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거대한 종교 시스템 속에 기생하는 거짓 대언자요, 거짓 선생들입니다.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니라.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변질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변질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마7:15~18).
종교인, 특히 거짓 대언자의 처참한 말로를 보여주는 마태복음 7장 21절~23절의 말씀도 개역 성경의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오히려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거짓 선생들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는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마7:21~23)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마7:23).”라는 말씀은 제아무리 기적적인 은사를 뽐내고 세상도 부러워할 만한 찬란한 성취를 이루었다 해도 예수님께서 결코 안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구원받은 적이 없는 거짓 대언자들은 나쁜 열매를 맺는 변질된 나무요,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까지 가로막는 종교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숙주일 뿐입니다.
이렇듯 파멸의 길로 이끄는 거짓 대언자들에게 사로잡힌 종교인들 중에 상당수는 대단한 지성인이며 매력이 넘치는 인기인이고 권세가이며 모략이 넘치는 전략가들입니다. 그들은 복잡한 수식을 척척 풀어내고 인간들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를 뚫고 들어가 유연한 처세로 세상에 우뚝 서고 화려한 논리가 탑재된 말솜씨로 청중을 장악하며 고매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둔하고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명료한 복음의 정수를 깨닫지 못해 수시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나 정작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딤후3:7).
종교인은 여전히 철학, 선행, 고행, 희생, 헌신, 자선과 심지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도, 헌금, 예배, 침례, 유아 세례, 각종 성사 등의 종교 행위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도달하고 구원의 문을 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바람과 달리 사람의 모든 행위와 의는 누더기와 같다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갔나이다(사64:6).
심지어 서울 중심가에 위치한 모 교단의 어떤 교회는 그 이름이 ‘종교’라고 한다니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묘한 것은 그 교회의 담임 목사가 특별히 지난 WCC 부산총회 준비에 열심을 보였다고 하니 교회의 이름과 무언가 통하는 면이 있기도 합니다.
WCC 부산총회 준비가 한창이던 때 그것을 지지하는 한 교인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왜 WCC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사악한 단체인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물론 그 교인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기 일쑤였습니다. 대화가 진행되며 제 말에 논리적으로 더 내세울 것이 없어지자 이 교인은 비로소 명언(?) 한 마디를 남깁니다. “당신이 뭘 그렇게 잘 알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장담합니까? 그렇게 당당하다면 WCC 총회를 추진하는 목사님들보다 더 유명해지고 권위가 생긴 다음에 와서 말을 하세요.” 이렇듯 종교인들의 기준은 성경이 아니라 세상이 부여한 권위요, 눈에 보이는 것들이며 시대의 대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심연에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만족하게 하려는 비뚤어진 욕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버려진 음식쓰레기로 연명하던 거지였던 나사로가 낙원의 거주자가 된 모습을 지독한 회한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부자처럼 종교인에게도 생전에 가슴 시린 추억이 있고 소박한 즐거움에 미소 짓던 순간이 있습니다. 그들도 뜨거운 피를 가졌고 연인과 함께 절절한 사랑을 나누었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자녀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다시 오지 않는 흘러간 청춘을 추억하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합니다. 그들도 세월 속에서 파편처럼 흩어지는 이런 모든 삶의 조각들의 소중함을 알기에 자기 나름대로 종교 시스템 속에서 영존하는 생명을 얻어 보려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마지막은 명백한 파멸입니다. 종교인이 감당해야 할 미래는 철저하게 닫힌 미래일 뿐이고 원상회복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종교 시스템에 발목이 붙잡혀있는 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제발 자신의 발목에 채워진 거짓 선생의 덫을 벗기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십시오. 타락한 인간의 욕망을 만족하게 하는 그 자리에 안주하면 당신의 그 모든 소중한 삶의 조각들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당신의 두 눈과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참혹함과 분노와 저주와 자포자기일 것입니다.
유대인 부자처럼 교회 안에서 일생을 복음을 모르고 종교생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절망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만드신 사람의 상상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그야말로 완벽한 절망입니다. 부디 제발 종교인이 감당해야 할 완벽한 절망, 그 혹독한 미래에서 속히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살아 있는 자들은 자기가 죽을 것을 알거니와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다시는 보상도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들을 기억하는 일이 잊혔기 때문이로다. 또한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이제 사라졌나니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어떤 일 중에서 그들이 차지할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전 9:5~6)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는 사람마다 불로 절여질 것이요, 희생물마다 소금으로 절여질 것이기 때문이라. (막9:48~49)
2013-12-14 00:04:10 | 김대용
사람은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듯이 끊임없이 미래를 바라보려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흔히 친구들과 만났다가 헤어지거나 전화 통화를 하다가 끊을 때 대부분 “다음에 또 보자.” 혹은 “다음에 연락하자.”라고 말하며 미래를 기약하는 것도 이런 성향이 반영된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라면서 항상 미래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꿈꾸고 그것을 위해 달려가는 것을 삶의 의미로 여깁니다. 장성해서 결혼하면 평안하고 안락한 중년과 노년의 삶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자녀들의 미래가 아름답게 펼쳐질 것을 소망하며 삶을 일구어 나아갑니다.
과연 미래가 열려있지 않다면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자동차가 주유를 가득하고 달려갈 준비를 모두 마쳐도 사방이 가로막힌 공간에 놓여 있다면 조금도 움직일 수 없듯이 사람에게 미래가 열려있지 않고 닫혀 있다면 그는 삶의 추진력을 상실하고 모든 기능들이 일거에 해체될 것입니다.
성경은 미래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어떤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에게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미래는 소망을 담고 앞날에 대한 꿈을 이루어 갈 수 있는 미래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종의 ‘닫힌 미래’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마치 극심한 근심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살아 있음에도 “요즘 난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니야~!”라고 자조 섞인 고백을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부자도 바로 이런 ‘닫힌 미래’를 맞이하며 살게 된 사람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사람이 감당해야 할 닫힌 미래는 더 이상의 변화나 개선이 허용되지 않고 영원히 고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막9:44). 분명히 역사 속에서 실존했던 인물인 이 부자는 당시 인간에게 허락된 최고의 풍요와 환락을 누리며 살았던 특권층이었습니다.
그가 입었던 자주색 옷은 당시로서는 왕이나 최고의 권세를 누리는 귀족들이 즐겨 입었던 옷으로 그의 사회적 위치를 능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삿8:26, 에8:15). 또한,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사치를 즐기고 수돗물을 콸콸 틀어놓듯 돈을 맘 놓고 써도 재산이 줄어들 줄 모르는 엄청난 부자였습니다.(눅16:19) 심지어 그의 집 대문 앞에는 거의 매일 벌이는 파티에서 남겨진 음식쓰레기로 연명하고자 하는 나사로를 비롯한 여러 거지들이 모여 있었을 것으로 짐작건대 실로 대단한 재력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자는 당시에 살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따르는 멋진 삶을 살던 사실상 당대의 스타였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던 부자는 삶을 마감한 후에 영원히 고정되어 변할 수 없는 어떤 독특한 종류의 현실 속에 처하게 됩니다.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가 그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도록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나이다. 하거늘(눅16:23~24)
언젠가 지금 광주·전남 지역에 킹제임스 성경을 알리고 바른 신약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시는 한재석 형제님의 설교 중 들었던 “여러분은 과연 지금 죽는다면 당장 하나님이 계시는 천상에 올라가 그분을 뵈올 텐데 그때의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가 육신을 벗고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뭐라고 하실지 생각하고 사시나요?”―물론 제 기억에서 추출한 것으로 설교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라는 대략의 내용이 생각납니다. 그 설교를 들으며 매우 참신하게 우리가 잊고 있는 부분을 지적해 주셨다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것을 반대로 적용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죽은 후에 눈을 떠 보니 지옥의 불꽃 가운데 놓여 있을 때 그 사람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요? 사실 상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솔직한 답입니다. 천상에 올라가 하나님을 뵈올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지옥 불꽃 속에 절여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의 심정도 감히 인간의 평범한 정서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임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지옥은 제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기에 사람이 지옥이라는 무자비한 진공청소기의 위협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누리다 삶을 마감한 부자가 그야말로 대반전, 엄청난 뒤바뀜, 상상 이상의 엄혹한 현실을 마주할 때 과연 어떠한 심정이었을지는 짐작이 불가능하고 간접체험은 더욱 불가능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매우 심각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지옥은 대문을 활짝 열고 지금도 쉴 사이 없이 구원받지 못한 혼들을 빨아들이고 있는데 살아있는 사람은 정작 이런 심각한 위기를 뼈가 저리게 느낄 수 없으니 정말이지 이보다 더한 인간에게 닥친 시급한 위기와 위협은 없다고 해야겠습니다.
문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받은 구원의 감격만을 기뻐하기에는 주위에 파멸의 길로 행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복음이 널리 퍼져있다고 자부하는 한국 땅에서조차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미처 구원받지 못하고 심장의 박동과 호흡이 멈춰 버리는 비극이 지금 여러분이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단히 특이하고 충격적인 것은 파멸의 대륙으로 건너가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살아생전에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라고 자부했던 종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가 아브라함을 보고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주저함 없이 부르는 것을 볼 때 그는 순수한 혈통의 유대인이었고(24절) 생전에 모세 5경을 읽고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구약 시대의 대언자들의 선포를 직접 들었던 사람일 것입니다(29절).
짐작건대 그는 사회적 지위와 명성에 걸맞게 유대인의 율법과 규례를 배우고 지키며 각종 헌물과 희생물을 부족함 없이 하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그는 누가 보아도 훌륭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지없이 그가 죽은 후 지옥의 불꽃 속에 절규하고 있다고 기록합니다. 16장 23절의 ‘고통 중에’라는 말의 원어는 고문 등의 극단적 자극으로 인해 발생하는 극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는 지금 견딜만한 고통 속에 있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여유를 부릴만한 상황이 절대로 아닙니다. 살아있다면 곧 기절해 버릴 수도 있는 극한의 고통을 쉴 사이 없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이런 지옥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 여의도에 위치한 불신자들도 다 아는 한 대형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던 형제님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형제님의 고백은 전에 그 교회에서 가르쳐 주는 교리와 규범에 빠져 소나무 뿌리를 뽑아낼 기세로 기도에 열중하며 신비한 것을 추구하던 시절에도 무엇인가 은사주의 교회의 모든 모습이 내내 역겹고 불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불편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바른 교회를 찾고 또 찾아 결국 그곳에서 빠져나와 지금의 교회까지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미 그 교회를 세계적인 초대형 교회로 일군 목사 일가의 범죄와 비리는 낱낱이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수십만 명에 달한다는 해당 교회의 교인들은 잠잠하기만 합니다. 매 주일 기독교방송에 방영되는 예배 영상을 보아도 여전히 평안하게 주일예배에 참여하고 문제의 핵심에 위치한 원로 목사가 노구를 이끌고 더듬거리며 하는 그 설교에 아멘을 연발할 뿐입니다. 수십만 명의 교인들 중에 그런 비리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고 폭로 기자회견을 열고 또는 더 이상 참지 못해 교회를 뛰쳐나가는 등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단 1%도 안 되는 듯합니다.
하나님과 본인 자신만 알 수 있는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뉘라서 함부로 재단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런 명명백백한 비리와 타락을 보고도 아무 반응이 없이 평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영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강한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아생전 모범적으로 멋지게 별처럼 살았다고 자부했던 유대인 부자는 실은 마귀의 자녀요 지옥의 자식이었습니다. 사실 그에게도 기회는 있었습니다. 그것도 많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세상 누구보다 구원받기에 가장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인이었고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말씀을 읽을 수 있었고 살아서 활동하던 구약 시대의 대언자들의 선포를 직접 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풍요로운 생활이 그의 영적 지각을 둔감하게 했지만, 그것이 그가 구원받을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언제든 그의 몸에서 호흡이 멈추기 전까지 회개하고 돌이켜 참믿음을 소유한 자가 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너무도 명료하고 단순한 참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채 많은 종교 행위만을 먼지 같은 유산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나 지옥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영적 문제에 있어 가장 심각한 것 중에 하나가 그 옛날 유대인 부자처럼 교회 안에서 기독교인의 이름표를 달고 있으면서도 구원의 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가장 시급하고도 위중한 문제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여기서도 교묘한 기만전술을 펼칩니다. 사람을 타락시키고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으로 이끌어 가려는 마귀의 집요함은 또 다른 이단의 무리를 통해 이 화급한 문제에 물타기를 시도하곤 합니다.
소위 매우 큰 믿음을 소유했다고 자부하는 어떤 목사는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매우 참신한 화두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미 다 알 듯이 이 사람은 지독한 은사주의자요, 신사도주의자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신 속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죄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노력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의를 가져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명백한 행위구원론자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구원받지 못한 종교인들에 대한 중대한 이슈를 이런 황당한 거짓 선생을 통해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 철저하게 매장해 버리려는 사탄의 간악한 술책에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누가복음 16장의 부자도 끝끝내 구원받지 못한 것은 결국 자신의 책임이요, 자신의 선택이었으며 오늘날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종교생활에 빠져 끝내 구원의 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도 결코 사탄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실은 그들은 자신의 욕망, 고집, 불순종,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함, 굳어 버린 양심 등으로 인해 스스로 수렁에서 나오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이 감당해야 할 대가는 실로 엄청나고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2편 계속 :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com&write_id=3779&page=&cate_name=&sfl=&stx=&sst=&sod=&spt=&page=
2013-12-14 00:00:08 | 김대용
간증 듣고 글 읽은 네네 맘이 뭉쿨 했습니다 .
간증과 글 . 감사합니다 *^^*
2013-12-13 13:42:28 | 이후랑
스스로 자기에 대한 매우 솔직한 입장에 설 때 이외로 기쁨과 소망을 만났던 것 같아요.
" 그래요, 전 우리 교회의 그 많은 섬김 안에서 늘 이기적이고 야박하기만 한 채무자였습니다"
그 빚 짐까지 은혜롭다는 것을 일러주신 주님 은혜를 감사할 따름입니다...
2013-12-13 10:05:48 | 최상기
주님 은혜 안에서 형제님이 꿈 꾸시는 그런 귀한 가정을 잘 이루어가시길 원합나다.
속 깊은 글 여러 번 읽고 귀한 마음을 배웠습니다, 자주 이렇게 뵙고 싶습니다....
2013-12-13 09:23:32 | 최상기
매우 진지하게 대안을 요구하셔서 적이 망서렸습니다.
그냥 지나치는 건 도리가 아니라서 궁리도 해 봤지만 그 역시 만만찮았구요,
평이한 구시대를 살아낸 늙은이로선 현 시대상에 더 많은 부담을 갖기 마련이죠.
형제 자매님들의 고견들 감사하면서 추후 본 건은 더 활발한 담론을 가질만한 필요를 느낍니다.
2013-12-13 08:49:27 | 최상기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그분앞에 나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제인가를 생각하게
하는군요 더욱 우리는 겸손히 주님이 기뻐하시는일이 무엇인가 내가 말하고있는 말은 혹시
합당한 말인가 자신을 돌아본다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좋은 글, 아니 말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2-13 06:16:59 | 윤정용
참 좋은글을 써주셨내요. 마지막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더욱 정신을 바짝차려야 될것 같아요
마귀는 더욱 간계를 써서 우리에게 접근해 오니까요.요즈음은 친절을 배풀어도 저 사람이
왜 나에게? 무슨 속샘이 있을거야 하고 의심을 하고 더욱 가까이 하기를 꺼리거든요.
우리 그리스도인들 끼리는 그런거 없이 마음을 주고 받는 대화에서 참 자유를 느끼는것 같아요
특히 우리 사랑교회 형제 자매님들 한태서 많이 느껴요. 혹시 불만 불평이 늘 깔려있고 안좋은
말을 전하는 그래서 이간을 시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사탄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다는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자들하고는 절대 사김을 같지 않아야 물이안듭니다
주유소에서 총무로 일하시는 동생분도 형님의, 그리고 형수님의 인격에 서서히 녹아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믿음의 울타리로 들어오게 된것 같아요 그소리를 듣고 너무 기뻤습니다
2013-12-13 05:58:57 | 윤정용
최상기 형제님을보고 아는것이 참 많으시구나 생각은 했는데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교육과
좋은 환경에서 자라서 그렇구나 간증을 듣고 알았습니다.
생각도 깊게 하시고 교회봉사도 몸을 아끼지않으시고 열정이 넘치시는것 같아요.
몸만좀 더욱 튼튼하게 신경을 쓰셨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많이 잡수시고
운동도 열심히 하세요.부탁을 드려서 죄송해요. 왜야하면 저도 45년 생이거든요.
2013-12-13 05:44:31 | 윤정용
김경민 자매님은 언젠가 목요 자매모임에 내가 못 참여했을때 피어슨 선교사님이 설교한 것을 글로 썼는데
너무 머리에 잘 들어오고 어찌나 물이 흐르듯 잘 썼는지 아니 원고를 받아서 썼는가 어찌 이렇게
내용을 잘 썼을가 물어보았더니 그냥 설교를 듣고 썼다고 했습니다 전에 작가의 꿈을 꾸었다고
해서 역시 그렇구나~!하고 알아보았습니다. 보고 읽고나서 생각을 정리해서 표현하는 일이란
어려운 것인데 정말 잘 쓰는것 같아요.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좋은 작품을 써 보는것이 어떻겠어요?
그리고 김대용 형제님 고마워요 ,늘 홈피를 관리하시느라 수고해 주시는것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형제님인지 한번 보고싶군요. 그리고 좋은 영화가 있으면 소게해서 어쩌다 한번이라도
보고싶은 생각이 드네요,저도 특히 플란다스다의 개가 많이 생각이 나네요.
2013-12-13 05:34:29 | 윤정용
'초원의 집'을 안다고 하면 청년부에서 쫓겨날 것 같아 차마 시인하지 않으려
발버둥을 쳐도 너무도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기억이 나니 가슴이 아픕니다. ㅎ ㅎ
80년대 일요일 오전 등에 방영했던 외화는 휴일이 주는 독특한 정서와 맞물려
어린 마음을 이국적인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 시절 ‘플란다스의 개’라는 일본에서 제작된 만화 시리즈물이 있었는데
제가 어린 시절 보고도 후에 몇 번에 걸쳐 재방영했던 것으로 압니다만
하여튼 제가 어릴 때 보았던 것이 국내에서는 첫 번째 방영이었습니다.
트랄랄라, 트랄랄라~~하는 주제가도 좋았고 네로와 파트라슈의 우정도
어린 사나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개구리 왕눈이의 촉촉한 봄비 같은 피리선율이며
당대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창작동요제 대상곡인 ‘노을’도
깨끗한 동심에 아로새겨진 추억의 노래입니다.
자~인제 그만 절제의 시간을 맞이해야겠네요.
김경민 자매님의 귀한 글과 세대가 다르지만, 공감을 표해주신
이수영 자매님과 다른 지체분들의 공감 댓글 덕분에
추억을 생각하며 더불어 문화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귀한 밤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2-12 22:56:16 | 김대용
'초원의 집' 생각이 납니다.^^
구수한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나네요~~
뭔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좋은 거 같습니다.
미국은 세대차이에 대한 공감도를 높이기 위해서 오래된 만화영화를 수 십년이 가도 계속해서 방영해준다고 하네요~~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 잘 선택해서 관람해야 하는 것도 잊으면 안되겠지요~~^^
2013-12-12 17:15:00 | 김상진
저도 미국드라마 '초원의 집'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해보니 어렸을적 '맥가이버'나 '육백만불의 사나이','에어울푸'등
재미있게 보았던 미국 드라마가 꽤 많았었네요.
주말 밤마다 기대하며 보곤했던 '주말의 명화'도 이젠 추억이 되었네요.
그랬던 시절이 불과 25년도 안지났건만 지금 세상은 그때 그 어린 소녀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변했습니다.
지금처럼 최첨단 시대에 전화는 걸고 받고 문자 시계면 족하다고 2G폰을 고수하고 옛날에 왕도 가마 밖에는 못탔는데 자동차가 굴러 가기만 하면됐지 하고 50만원주고 산 완전 고물차를 6년을 끌다 폐차를 시킨 저같이 시대를 잘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은 그래서 '고리타분하다','고지식하다'는 말을 들을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라디오를 들으며 책을 읽고 사브작 사브작 손편지를 쓰던 스마트폰과 게임 자극적인 영화 드라마 없이도 마음이 풍요롭고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입니다.
요며칠 우리 집안에서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아이들의 스마트폰 개통을 두고 작은 실랑이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기숙사 생활하고 딸은 밤 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할건데 굳이 비싼 요금을 내가며 스마트폰을 개통할 필요가 있느냐는 저와 지금껏 스마트폰 없이 지낸것만으로도 대단한거 아니냐며 스마트폰을 개통해야된다는 아이들, 중립적인 입장에서 저와 아이들 사이를 조율하는 남편까지 며칠간의 토론끝에 결국 제가 물러섰습니다.
저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아이들이 쉽고 당연하게 이 세상것들을 수용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부러 더 뜸을 들였습니다.
조금있다 나가서 두 아이의 스마트폰을 개통해주려고 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우리가 세상을 등지고 살 수는 없겠지요 다만 우리 아이들이 이런 세상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넉넉히 이 세상 악한물결을 이기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기도하는 것이 제가 해야할 일인것 같습니다.
우리 사랑침례교회에 나오는 모든 아이들이 앞으로 이 세상을 잘 헤쳐나가고 믿음또한 굳건하게 설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마음과 지혜를 모으고 정보도 공유하면 좋겠습니다.
옛추억을 생각나게 해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2-12 13:30:31 | 이정희
세대가 다른데도 같은 것을 보고 생각한 공감대가 있네요.
스마트폰의 유용성을 누리고 있지만 폐단도 많이 나타나고 있지요.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아나로그의 따스한 감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갑니다.
이시대에. 우리 교회가 유일하게 거룩을 지켜가는 보루같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기본적인 예의도 도덕심도 공중도덕도 강요로 느끼는 시대라 참 답답합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성도들의 탄식은 더 하지 싶습니다.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에 동화되지 않도록 경성하며 살아야 하니 말이죠.....
2013-12-12 11:33:19 | 이수영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방영되었던 미드(미국 드라마) '초원의 집'을 혹시 기억 하시는 분들 계신가요?
아마도 제가 초등학교 아니면 중학교 시절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에서도 그당시 최장수 드라마였고 우리나라 전원일기 정도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 온 프로여서 인지 한창 감수성이 풍부할 시기에 이 드라마가 미친 영향이 매우 컸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 드라마가 주었던 여운이 꾀 오래 간 것 같습니다. 머리를 양갈래로 딴 주근깨 말괄량이 소녀 주인공 로라는 사실 제 캐릭터 이기도 하답니다. 거기에 나오는 엄마는 어찌나 자상하고 다정다감한지, 아빠는 얼마나 믿음직 스럽고 든든한 가장인지, 그리고 그밖의 인물들은 어찌나 정감어린지...... 사실 배경이 푸른 초원이어서 그렇지 말 그대로 허름한 판자집 이었음에도 얼마나 그런 집에 살기를 꿈꾸어 왔었는지...... 온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손을 모으고 감사기도 드리던 장면도, 마차를 타고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 모습도, 모두 제가 꿈꾸는 이상향 이었답니다. 지금도 다시 구입해서 볼 수만 있다면 온가족이 둘러 앉아 보고 싶네요.
저의 유년시절은 지금처럼 스마트 폰도, 영화관도, 쇼핑센터도 하나 번듯한게 없던 시골에서 자라서 인지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다행히 문화생활을 즐기시는 부모님 덕에 미드를 무척 사랑하며 자랐습니다. 그중 주말의 명화도 단골 사랑방 역할을 했었지요.
그래도 그 시절 참 감사했던 것은 이렇게 온가족이 모여 함께 볼 수 있는 건전한 드라마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요즘 평일이든 주말이든 저녁이나 한 밤에 하는 드라마나 거의 모든 예능 프로그램은 정말이지 아이와 도저히 맘놓고 편하게 같이 볼 수 있는 프로가 없다는 사실은 다들 공감하실 거 같습니다.
제가 요즘 유일하게 즐겨보는 프로가 있다면 아침드라마 TV소설 '은희' 정도입니다. 그나마 건전하고 나름 문학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이니까요. 잠깐 드라마 작가 공부를 했던 적이 있는데 그 때 저를 지도해 주시던 작가 선생님께서 아침드라마와 단편 드라마 단골 작가셨는데, 제가 이런 장르를 좋아한다고 하자 꾀 흥미를 가지시더군요. 요즘은 작가 지망생들이 이런 드라마는 잘 안쓴다네요. 왜냐면 방송국에서 이런 드라마를 제작을 안하기 때문이랍니다.
요즘은 좋은 드라마 한 편을 제작한다는 것이 무언가 사람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준다는 개념보다는, 시청률이 곧 돈이고 결과이므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돈벌이가 되는 작품을 제작하는 게 당연시 되는 풍토이기 때문에 저는 시작도 하기 전에 그 세계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왠지 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어공주마냥 내게 소중한 무언가를, 즉 제 영혼을 팔아야 한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초원의 집'같은 드라마가 다시 부활해 사람들에게 인기몰이를 할 수 있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한류열풍을 만들었던 드라마 '대장금'을 다들 기억 하시겠지요? 이 드라마의 주제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어린 장금이가 수락간에서 상궁에게 하였던 말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 했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 이온데... " 의 대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금이는 수락간에 들어오기 전 자신의 사소한 말 실수로인해 부모님을 다 잃게 된 아픈 경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진실함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모든 세상의 편견과 불의에 맞서 결국 사랑과 성공을 다 거머쥐게 한 원동력이 되었고 이러한 캐릭터의 원동력이 밑바탕이 되어 완성된(물론 배우들의 캐스팅이나 특히 여주인공의 미모도 큰 역할을 한것은 사실 이지만) 드라마 한 편으로 인해 얻어진 부가가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자산을 얻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제 곧 있으면 겨울방학과 설연휴를 겨냥한 다양한 영화들이 극장 상영을 앞두고 초읽기에 들어갈 것입니다.
개봉을 앞둔 영화들은 많은데 과연 그 중에서 나와 내 아이들이 볼만한 훌륭한 작품들은 얼마나 될까요?
어쩌면 이런 현실을 이미 예견하시고 아예 영화관람이나 TV시청을 안하시거나 자녀들에게 금지한 부모님들도 계실테지요. 문득 추억의 영화와 미드가 그리운 겨울입니다. 우리의 영적 성숙 만큼이나 우리의 감성 또한 잘 다스려야 할텐데 세상이 협조를 안하니 그렇다고 무조건 포기만 하지 마시고 한 번 같이 찾아보고 연구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가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 아이들을 무조건 세상으로부터 차단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1인입니다. 물론 제 생각이 다 옳다는 것은 아니니 다른 좋은 대안이 있으시다면 같이 공유하면 좋겠습니다.
2013-12-12 00:53:33 | 김경민
어제 잠깐 읽은 책에서 사람을 늙게 만드는 것은 얼굴의 주름이 아니라 영혼의 주름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형제님의 글을 읽으면 정말 맑은 깊은 영혼을 느낍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렇듯 진솔하고 사려깊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지체들이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러분들의 댓글 또한 포근하고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감사함니다.
2013-12-11 15:20:26 | 오혜미
아멘!
2013-12-11 14:12:46 | 이수영
같은 글을 읽을 때라도 읽는 사람의 마음과 환경이 어떠한지에 따라 받는 느낌은 다르네요.
오늘 다시 본문을 읽으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들이라 생각되네요.
또한 명숙자매님 댓글 보며 눈물이 났습니다.
우리주님으로 인해 변화됨을 고백하시니 저 또한 기쁨이 넘침을 감사드립니다.
2013-12-11 14:09:47 | 윤영원
이정희 자매님의 마음에 흐르는 각별한 감사와 소망!
전 그런 아픔들을 익히 알잖아요.
" 어쩌다 나에게까지 이 큰 구원의 은혜가 미치게 되었을까!
또 바른 말씀을 전하는 올바른 교회를 만나게 되었을까하고 생각하니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요. 우린 같은 함선의 밑바닥에서 발목에 쇠고랑을 찬 채 둥둥 울리는 북소리와 감독자의 명령애 따라 숨차게 노를 저은 영화 "벤허"의 아프고 슬픈 경험을 함께 한 멤버였네요.
우리 혜원이 현종이가 그런 편식문화에서 벗어나 영혼의 자유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그 부모님의 감사하는 삶을 넉넉히 이해하며 공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고귀한 영혼의 자유 산물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라는 과제는 분리한 자의 몫이겠죠.
분별 없는 철새들의 허튼 날개짓이 아닌 자유와 방종을 바르게 분별하는 지혜를 배우고 싶습니다.
우리들의 엑스더스 열정이 식지 않고 꾸준히 연소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샬롬
2013-12-11 11:24:07 | 최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