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꼬이고 꼬일때는 정말 온갖 잡다한 악한 말이 입에서 다 쏟아져 나옵니다. 저에게 아마 오늘 하루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참으려해도 도저히 참아 지지가 않아서 온갖 저주스런 말이 나오고 나면 저도 깜짝 놀랍니다.
이 상태까지 가는구나....
이럴때 기도하면 오히려 더 화가 되는 것 같아서 기도도 못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그냥 잠시 마음이 가라앉을뿐 또 다시 그 분한 일이 생각나면 여지없이 원상태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런 상황과 내 자신의 악함이 들어나면 역시 나는 죄덩어리구나, 다른 말로 하면 모순덩어리구나.
겉으로는 사람들이 거룩해보이는 것 같아도, 뭔가 자신에게 핀트가 안맞아 떨어지는 상황이 오면 여지없이 죄된 성품은 그저 고스란히 들어나게 마련인 것 같습니다.
죄는 그 상황과 조건만 충족이 되면 여지 없이 누구에게나 다 정도에 따라 다르게 들어 나게 됩니다. 그것도 심각하게는 아주 극단적으로 말입니다.
믿고 구원받은 사람중 "나는 적어도 살인범보다는 더 의로워" 라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는 사람 있을까요?
그래서 자기 자신의 의를 붙들고 사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자 중에 어리석은 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의로움은 언제든지 죄로인해 무너저 내릴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면전에 섰을때, 자신의 의로움을 내민다? 헉
쓰레기 같은 자신의 의. 이미 버린지 오래야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지요? 자신의 의로움을 단 한순간도 의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침 10시부터 화가 나기 시작해서 저녁 6시 30분까지 화가 잔득나있었고, 폭발하기 직전이였는데,...
아이들하고 과외 수업하다보니, 마음이 다 풀렸습니다.
저는 형편없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분만을 믿고 정말 과분한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지옥의 영원한 형벌은 정말 받아 마땅한 죄인이였는데 주의 대속의 사랑으로 구원해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해주셨으니... 영원히 감사와 찬송을 드려도 부족하겠지요.
다행히 오늘 하루가 가기전 화가 풀려서 다행입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립시다.
다들 굿나잇~
2013-09-24 23:33:21 | 김정호
이수영자매님의 복귀(?)를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정말 반갑습니다.
사연없이 오신분이 거의 없다 보니 모임때 마다 늘 아쉬움이 남습니다.
한분 한분 너무나 소중한 분들이라 묻고 싶고 듣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요.
이번 처럼 무작위로 소그룹이 자주 모이다 보면 서로 더 친숙해 질것같아요.
2013-09-24 20:20:57 | 김혜순
행복은 함께하기에 배가 되지요.
저도 그룹을 좀더 나누어 알찬 교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보았습니다. 짧은 시간에 아쉬움이 남았던것
같습니다. 넉넉한 계절에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에게 함께
하길 기대합니다
2013-09-24 16:55:30 | 문영석
추첨한대로 모이니 여러 연령대가 섞여서 좋았던 것 같아요.
10그룹으로 나뉘다 보니 조금 많은 그룹도 있었고 적은 그룹도 있었지요.
다음에는 5,6명 정도의 소그룹교제가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분도 계셨지요.
교제가 너무 좋아서겠죠?
모이길 기다리며 긴 식탁에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에 모두 12명이라
“우리는 이제 고만 받읍시다^^”
웃으며 원탁 두 개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지요.
사는 지역도 다양하고 오게 된 동기도 다양했지만
바른 말씀을 찾는 심령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지요.
남편의 권유에 따라오길 너무 잘 했다는 자매님들도 계셨고,
처음 그룹모임에 참여한 자매님도 아들 따라 오길 너무 잘했다고 하시고,
은사주의 교회에서 성령?의 불을 받으려고 통성기도하고 시끌벅적할 때
눈을 살짝 뜨고 보니 반대편 위쪽에서 레이저 후레쉬로 한 사람 한사람 가슴에 불빛을 쬐이더라는 얘기에 모두가 빵 터졌습니다.^^ 불빛으로 가슴에 따뜻한 느낌이 느껴지면 두 손 높이 들고 ‘할렐루야’를 외치더라는......
공통적으로는 영혼의 자유를 누리게 되어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간증에 공감하며
오게 된 과정과 현재 마음의 상태를 너무나 기쁜 얼굴과 나긋나긋 표현해 주시는
여러 자매님들 덕분에 기쁨을 함께 누리는 시간이 되었어요.
40대 부터 80대까지 골고루 모였고
믿지 않는 남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음에도 그룹교제에 참여해 주시고,
연세가 있으셔도 끝까지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해요.
2013-09-24 15:40:11 | 이수영
형제님 반갑습니다.
오늘 한 발 내딛었으니 또 한발자욱을 기대해도 되겠지요?
계속해서 한 발자욱 씩 걸어 길을 만드는 용기를 가지시길 원합니다.
진솔한 마음을 보여주셔서 참으로 공감이 됩니다.
형제님 화이팅^^
2013-09-23 17:54:49 | 이수영
형제님의 귀한 글 너무도 잘 읽었습니다.
저는 사랑침례교회 출석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30대 젊은 부부들이 믿음 안에서 활발하게 교제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면
너무 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돌이켜 보면 이분들은 저와 함께 중·고등부와 청년부를 거쳐오며 한국 교회 안에서 동고동락하며
성장했던 연령대의 분들입니다. 확신하건대 지금처럼 서로 간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믿음 안에 끈끈한 우정을 나누는 모습은 분명코
교회 안 구석구석에 생기를 불어넣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나 믿음 안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교제가 움트는 교회에서 홀가분한 몸으로 30대 젊은 부부의 형제님들과도
믿음의 교제를 이어가고 20~30대 청년들과도 교제할 수 있는 엄청난 특권을 저에게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진정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교회의 허리 역할을 담당하는 30~40대 젊은 부부들의 교제와 섬김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사랑침례교회의 보화가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3-09-23 12:54:55 | 김대용
오산에서 오시는 김상진 형제님이 드디어 글을 올리셨네요.
앞으로 자매님, 아이들과 함께 좋은 교제를 나누기 원합니다.
30대의 부부들이 더 많이 활발하게 움직이면 좋겟습니다.
샬롬
패스터
2013-09-23 12:06:42 | 관리자
너무 아름다운 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성도들을 위해 더 많이 써 주세요.
샬롬
패스터
2013-09-23 12:02:10 | 관리자
우리가 늘 보아왔던 모습들을 잔잔한 필체로 아름답게 쓰셧습니다.
자기마음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라 생각듭니다.
오늘 아침 형제님의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으며 나의 삶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2013-09-23 11:16:41 | 문영석
예수님께 내어드리면 드릴수록 생활이 점점 더 open되어짐을 느끼며, 성령님께 맡겨지니 전보다 더 성실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의 두 딸내미~ 예수님과 동행하는- 진실되고 안식된 삶을 어렸을때부터 맛보게 해주신 하나님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013-09-23 09:39:30 | 목영주
이 아침에 자신을 솔직히 내어 놓은 진실한 글을 세상을 한껏 만끽하며 살 수 있는 젊은 형제님으로 부터의 고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교회를 바른 교회로 인도하고 있는 모토라 생각합니다.
소심과 위선...사이에서 고민하고 점검하시며 마침내 글을 올리는 분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어제 설교중에 저는 우리 성도들이 가장 인간적이어야 하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는데
앞으로 이 30대가 바로 그런 분들이 되어 교회를 잘 이어갔음 좋겠습니다.
감사해요.
2013-09-23 08:23:33 | 오혜미
몇 년 전에 고스도치 한 마리를 잠깐 키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린 고슴도치는 귀여웠지만 무척이나 경계심이 많았습니다. 만져보려고 하면 가시를 세우고,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다가오지 못하도록 경계 했습니다. 그러나 몇 날 며칠을 '도치야' 라고 부르며 사료를 주다보니 가시를 세우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 한 달여 정도 지나고 나니 고슴도치는 저의 목소리만 들어도 주인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더 이상 가시를 세우는 일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목소리만 듣고도 자신의 집밖으로 나와 저의 손바닥 위로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고슴도치라는 작은 동물이 주인을 알아보는 것이 저에게는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기뻤습니다. 저는 그런 고슴도치를 보면서 '짜식 이제야 철이 들었네~~' 라며 녀석의 기특함을 칭찬했던 적이 생각이 납니다.
그 고슴도치를 생각하자니, ‘어쩌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이 혹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 말입니다. 돈으로도 명성으로도 아닌. 오직 하나. 그분을 주인으로 섬겨드리고 인정해드리는 것. 그것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아닐까? 라며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어봤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내 신앙생활을 뒤 돌아 보게 되었는데, 참으로 교만한 한 사람[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여느 이교도들처럼 돈으로, 명예로, 봉사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인 가짜 하나님 앞에 기꺼히 노예가 되는 것을 스스로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겨오면서 동시에 타인과 비교해가며 정죄하는 교만한 인간이었습니다. 게다가 남들은 십계명을 중시했지만, 그 사람은 한 가지를 더 보태서 십 일 계명을 만들어 놓고 그 중에서 십 일 계명을 최고의 덕으로 삼고 살아왔음을 하나님 앞에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십 일 계명은 바로 ‘들키지 말아라!’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분을 주인으로 섬겨드리고 인정해 드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우리 인간에게는 구원이 되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자체가 우리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 그런데, 이것마저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다는 것은 정말로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은혜를 묵상하니 하나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았습니다.
“나만 믿어. 그래야 살아. 너희가 살아야 내가 기뻐.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기쁨이고 영광이야. 내가 문을 열어놨잖아<계 3:8>. 그러니까 너희는 들어오기만 하면 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있잖니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 그러면 내가 너와 함께 살꺼야<계 3:20>. 아들아! 우리 영원히 함께 살자..,”
나 같은 것이 뭐라고.., 우리 인간이 뭐라고..,
새삼, 그런 은혜를 이미 누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묵상한 순간 스스로에게 던져진 한 가지 질문으로 부터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과연, 나는 하나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며 철든 자녀의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 물음을 스스로에게 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최근에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 제목과 내용들이었습니다. 그 기도들을 떠올리기 위해서 잠시 눈을 감아봤지만(솔직히 눈을 감기도 전에 답은 떠올랐습니다.), 여전히 내 유익을 위한 기도가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필요할 때만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던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내 주인은 분명 하나님이셨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필요에 의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믿음 좋다는 말도 나름 들었고, 또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자부해왔는데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완전한 착각이었습니다. 그런 내 자신에게 솔직해지니 스스로를 평가하는 네 글자가 떠올랐습니다.
‘바·리·새·인’
그런 저의 모습을 보니 저는 마치 ‘고슴도치형 인간’인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고슴도치보다도 철이 덜든 인간인지도 모릅니다. 평상시에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다가도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나 삶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주인에게 가시를 세우며 따지고 드는 그런 철없는 고슴도치형 인간 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그런 철없는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저에게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롬 8:38-39>. 그 은혜는 십자가 사건 만큼이나 신비 중에 신비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롬 8:27>
그 감사에 내 혼의 주인이 되어주신 주님의 신비 앞에 무릎을 꿇어 엎드리며 마땅히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고개도 쳐들지 못한 채 몇 마디 말씀을 드려봅니다.
(주님. 저는 아둔하여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주인이 되어 내 힘으로 주님께 뭔가를 해드리려고 하고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생각만으로 주님을 섬길 뿐, 몸과 마음은 여전히 과거의 습관을 쫒아 주님께 온전히 드려지지 못하고 있네요. 그러나 주님. 정말로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그래서 저에게는 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안계시면 어찌 할 뻔 했는지 아찔함을 느낍니다. 가끔은 가시로 주님의 마음을 찌르는 못된 짓을 하지만 여전히 참으시고 지켜주시는 주님께 그저 고개를 숙일 뿐 무엇을 해드릴 수도 없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끝 날까지 버리지 않고 함께 해주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힙니다. 드릴 것은 여기 눈물만 있으니 눈물이라도 받아 주실련지요~~)
쑥스러운 묵상이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글을 올렸지만, 소심하여 삭제했다가 다시 올립니다. 이 교회와 여러 지체들 그리고 귀한 목사님을 알게 된 것이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합니다.
샬롬.
2013-09-23 00:55:35 | 김상진
한 편의 멎진 시를 읽었습니다.
꽃 보다 사람이 아름답지 못하는 이유.
크게 공감하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3-09-23 00:54:47 | 김상진
이 글을 읽고 나니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 좋아 했는데 달리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 소개 하신것 처럼 어쩜 글을 이렇게 아름답게 쓰시는지....
형제님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좋습니다.
2013-09-22 21:55:32 | 김혜순
잔잔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또 주마등처럼 과거가 생각나게 합니다.
좋은글 감사하고 저도 늘 배움을 갈망하는 학생처럼 열심히 신앙을 해보렵니다...
감사합니다
2013-09-21 23:49:29 | 문영석
# 나는 꽃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지루하게 길었습니다.
장마가 7월 한 달 동안이나 오락가락 이어지더니 장마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기다리고 있던 무더위가 8월 한 달을 무섭게 달구었습니다.
그러나 계절의 바뀜이야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8월의 달력을 떼어내자 벌써 아침저녁 바람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지난 두 달 동안 비도 왔고 너무 더워서 하지 못했던 운동을 하리라 마음먹고
가벼운 복장으로 동네 뒷산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우리 동네 뒷산 길은 내가 이곳에 살기 시작한 이후 계속 올라 다닌 길입니다.
이제는 낯이 익을 대로 익어서 오름세며 내림세가 한 눈에 환합니다.
길목마다 서 있는 나무들의 크기며, 심지어 풀 한 포기의 모습까지도 눈에 익어
이름이라도 지어 부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지난 두 달 동안 못 보았다고 여간 새롭게 반기는 것 같지 않습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길가의 이름 모를 잡풀들은 또 그것들 나름대로
모두가 반갑다고 손짓하고 어찌 그리 오랫동안 뜸하였느냐며 반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무나 풀들도 모두가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하긴 꽃과 나무와 풀들이 거기서거기지 무슨 특별나게 다를 게 있으랴 만은
자연이 아름답다 함은 꽃과 나무와 풀들과 바위덩이까지 포함해서 이르는 말이기에,
이제 막 긴 여름의 무더위를 견뎌내고 가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산 전체가
한 덩어리의 꽃밭과도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한 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걸으며 뜻밖에 문득 깨닫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니, 오랫동안 한 마디 말로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했던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어떤 의미를
이제야 비로소 한 마디 말로 정리할 수 있게 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는 왜 문학을 좋아하는가?”라는 것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정확하게 이끌어내지 못하였던 것처럼
나는 왜 문학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정확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왜 문학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과는 달리
삶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기에 그 답은 이미 내 속에서 정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문학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내 속에 없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좋아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얄궂게도 내 속에 있는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를
한 마디 말로 속 시원하게 표현해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연인 이었던 아내가 “왜 나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딱히 답할 말을 찾지 못하여 그건~그건~ 하였듯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답을 한마디 말로 정리하여 끄집어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이런저런 단편적인 답들을 끄집어 내 보기는 하였지만 만족한 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가장 만족한 답을 오늘 오랜만에 뒷산에 오르다가
꽃처럼 아름다운 산의 모습을 보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떠오르듯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닌 문학은 나의 희망사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나에게 문학이란 참으로 희망사항이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사랑해온 문학이란, 남의 글을 통해서 읽은 많은 문학작품들과
그리고 마침내 내 손으로 쓴 이런저런 글들의 모든 내용들이
한마디로 나의 희망사항들이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내가 쓴 글들은 모두가 나의 희망사항들일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시겠지만 나는 결코 내가 쓴 글 속에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글 속에 있는 나의 모습은 현실의 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 희망사항 속의 나 일 뿐이었습니다.
현실은 이러한데 그런 현실의 내가 아닌 희망사항속의 저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
나의 모든 글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오, 오, 참으로 그랬었구나!
나의 현실이 이렇다는 것은 무엇이며 글 속에서 바라는 바 희망사항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한 마디로 현실의 나는 결코 꽃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오, 오, 맞았어.
바로 그것이었던 거야!
지금 두어 달 만에 산에 오르며
바라보고 있는 꽃동산 같은 저 자연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나는 결코 저 아름다운 꽃동산처럼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내가 꽃 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구체적인 예로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먹는 모습도 아름답지 못하고 배설하는 모습도 아름답지 못합니다.
나는 성질도 아름답지 못하고 버릇과 습관도 아름답지 못합니다.
나는 생각도 아름답지 못하고 태도도 아름답지 못합니다.
나는 한 번도 만물 앞에서 저 나무들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 본 일도 없습니다.
나는 한시도 내 겉과 속을 가리지 않고는 만물 앞에 나설 수 없을 만큼
추하고 더러운 모습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울 목사님의 말대로 한다면
나는 배설물과 같은 모습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이 같은 사실을 아마 젊은 날부터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노랫말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지어 부른 시였습니다.
즉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문학작품에서나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다 죄 많은 인생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누가 꽃을 가리켜 죄 많은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니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도저히 꽃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노랫말로 희망사항을 노래하고 시를 지어 희망사항을 낭송하는 것이었습니다.
꽃보다 아름답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나도 문학을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해서였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나 자신이 꽃 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
글도 쓰고 다른 사람의 문학작품도 읽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웠다면
온 인류의 죄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어 주셨다는
예수님의 기독교구속의 논리는 성립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데 무엇 때문에 대속의 죽음까지 죽어야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꽃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학도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식 문화의 단어로 말하면 문학은 나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써왔던 이런저런 글들도 모두가 나의 희망사항이었으며 하나님께 올리는
나의 간절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
2013년 9월21일(토)
유 용수
2013-09-21 21:04:04 | 유용수
자매님^^
깊은 뜻을 이렇게 아름다운 글로 전하는 재능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항상 배움에 성실히 임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공감하며 저 부터 노력해야할 부분인것 같아요.
참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3-09-21 16:31:51 | 김상희
어젯밤에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을 들어보았습니다.
참 좋네요.
http://www.youtube.com/watch?v=JWvaZRfaYNQ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2013-09-20 13:48:01 | 관리자
어르신 글을 읽으니, 감동이 되어 눈물이 나옵니다. 요즘에는 여러지체들의 생각과 나눔이 정말로 기다려지고 있습니다. 어르신 글속에서는 믿는자가 그 동안 걸어온 길의 모습이 잘 표현된 것 같습니다.
2013-09-11 22:44:35 | 김정호
형제님, 글을 읽으니, 성령님께서 구령의 교리로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예전에 지하철에서 오산에서 방배역까지 신학교 다니면서 미친듯이 전도를 하고 다녔습니다. 닥치는대로 전도 했습니다. 거의 1년을 그렇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전철안에서 별욕은 다 먹었지요. 그런데 예상했던 것 만큼 많이 먹은 건 아니였어요.
가끔 주위 신학생들보면, 전철안에서 위로해주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것 없어요. 그냥 조용히 지냅니다.
직업이 영어 과외 선생인데,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가끔 수업안하고 전도만 1시간 정도 합니다. 아이들이 동의 하는 아이도 있고, 그냥 흘려보내는 아이도 있고, 약간 비웃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믿겠다는 아이는 없더라고요... 좀 지나봐야 겠어요. 그리고 또 기회가 되면, 계속 전해야겠어요.
구령자가 가져야 할 말씀을 몇몇 적어 볼께요.
(잠 11:30, 킹흠정) 『의로운 자의 열매는 생명나무니 혼들을 얻는 자(winneth souls)는 지혜로우니라.』
(시편 126:5,6, 킹흠정)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귀중한 씨를 가지고 나아가 우는 자는 반드시 기뻐하며 자기의 곡식 단들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성경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 할때 많이 쓰입니다. 그리고 곡식 단들은 구령되어 그리스도께 인도된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다면 한국에 유명한 이순신 장군이 대한민국을 위해 이룬 것보다 훨씬 큰일 한 것이라 생각 됩니다.
오늘도 수고하세요.
2013-09-11 14:12:38 | 김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