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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이트에 사용할 글로 믿음에 대한 글을 초이스 하는 가운데 우리 교회도 생각이 나서 교회이전과 많은 형제, 자매가 늘어난 교회 현실을 직시하며 믿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을 다시 한번 조명해 보고자 글을 올립니다. 이 글은 약 1년 전에 제가 킵바이블에 올린 글입니다. 교회 홈피 칼럼란에 옮기면서 이와 관련된 귀한 자료와 동영상도 한 곳에 모아 보았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꼭 보시고 믿음에 대한 교리와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글자수 제한에 따른 부분에 대한 이해 부탁 드립니다.)           5월 22일 주일 설교 : 믿음에서 믿음까지 (정동수 목사님) http://www.cbck.org/NewSermon/View/1o8     믿음에서 믿음까지 설교에 사용된 성경구절 대조 (흠정역과 개역성경) - 성경구절을 옆에 띄어 놓고 위 동영상을 보시면 더 좋습니다 http://keepbible.com/Study5/View/3Vu?page=2&cate=%EB%B3%B5%EC%9D%8C     어느 싸이트에서 전도사로 작은 교회를 담임하는 분의 글입니다. 또한 이 글에 대한 반론글을 제시한 글입니다       휴거가 자신있다는 분들에게 (부분적 스크랩)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 했기에 나는 구원받았다 또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했으니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답은 옳은 답이 아닙니다. 정답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인정해주셔야 한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주체자가 누구입니까? 우리를 휴거해 가시는 주체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주체자인 예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인정해주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구원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구절을 대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성경구절들과 예수님께서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존재이고 얼마든지 실족하면 생명책에서 우리의 이름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성경구절을 비교해볼까요?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성경구절에 몇 십 배나 많은 성경구절에서 우리는 구원을 마지막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이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전자는 우리의 행위의 노력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고 후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십자가로 십자가로 나아가는 노력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바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 중 사도바울보다 더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현재에 있다고 보십니까? 당대에 누가 있어 사도바울의 믿음을 따라 오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고전 9:27절에 남에게 복음 전파한 후 내가 도리어 버림받을까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애쓰며 살며 힘겹다는 뜻은 육체의 소욕을 죽이는 일이기에 힘들다는 것뿐이라는 것을 왜 모르시는지요. 육체의 소욕을 이겨냈을 때 받게 되는 성령님의 은혜 그 안에서 죄의 권세를 벗어난 참된 자유, 그리고 이어서 찾아오는 영적충만함, 진정한 행복감 그리고 평안함을 느껴보신 적이 당신은 없으십니까?                   구원과 휴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은 개판으로 살면서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정죄하고, 술 먹고, 담배 필 것 다 피고, 포르노 볼 것 다 보고, 지나다니는 여성들 짧은 치마 입고 허연 다리 보이면 안 보는 척 하면서도 볼 것 다 보고 속으로 음탕한 생각들을 남모르게 즐기면서                   구원은 완성이 없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안착하는 날이 우리의 구원의 종료시점입니다.                   휴거는, 구원은 당신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인정하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왜냐면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해주시는 주체인 예수님의 눈높이와 판단이 우리의 휴거를 결정하고...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신다는 것을 진정이 담긴 마음으로 여러 성도님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반론글 - 우리에게 선포된 복음 (성경은 킹제임스흠정역성경 사용)          (요 5:39)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         (딤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성경의 기록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된 책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도록 연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다시태어남                   (요 3: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나이까? 하매 /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1:12~13)         그분을 받아들인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                   *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자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에게서 다시 태어납니다.                   * 예수그리스도의 보혈         (레 17:11)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느니라.                   (히 9:22)         율법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면이 없느니라.                   (히 10:3~4)         그러나 그 희생물들에는 해마다 죄들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함이 불가능하니라.                   * 죄의 사면은 반드시 피 흘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짐승의 피를 통한 대신속죄는 죄들을 제거함이 불가능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히 9:11~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더 완전한 성막을 통해 오셔서 /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느니라.                   (히 9:25~28)         또 그분께서는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들의 피를 가지고 거룩한 곳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신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으시니 / 그랬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창세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라.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느니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                   *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통해서 단 한 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제거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하게 단 한 번의 예수님 자신이 흘려주신 그 피로 죄들을 제거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안 받아 들일지라도 성경은 죄와 상관없이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그 보배로운 피로 죄들을 다 제거해 주셨다는 것과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오심을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두 번째 다시 오실 때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진실하신 하나님이 이루신 그 일들을 믿으며 그 약속들을 지키실 것을 믿습니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없고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으로 100% 믿습니다.                             (요 1:29)         킹제임스 흠정역성경 : 다음 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개역성경 :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KJV : The next day John seeth Jesus coming unto him, and saith, Behold the Lamb of God, which taketh away the sin of the world.                   *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침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실 때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세상 죄를 짊어진,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갈 분으로 ‘지고 가는’ 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허다한 한국교회 목사들이 이 말씀을 잘 못 해석하여 행위 구원을 가르친 다던가 예수님처럼 무언가 우리도 짊어지고 가야한다든가 뭔가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소위 하나님의 일들이라고 하는 것을 성도들의 등짝에 지워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여 삼창 외치고 여러 번 회개기도도 시킵니다. 도리어 죄 짐에 눌려 살고 회개, 회개, 회개 하면서 얽매이게도 가르칩니다.                   한 번 구원받으면 죄 짓고 살아도 된다는 것이냐? 음란하고 타락한 많은 죄 가운데 즐기며 살아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냐? 라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상당합니다. 왜냐하면 요즘 교인이라고 하는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 믿는 사람답지 않은 세상의 정욕과 욕심,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러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눈과 이성으로는 충분히 구원에 대해 갑론을박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자면 내가 믿는 공평한 하나님은 자신을 절제하며 성령의 9가지 열매들을 맺으며 살아가는 믿는자와 믿긴 믿되 세상의 것들도 취하며 믿는자를 같은 상급으로 대우하실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안목으로는 세상에서 보여지는 것들이 크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편에서 우리가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살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상급의 질적 차이는 다를 것이라 믿습니다.(히 11:35절 일부- 다른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으려고 고문을 당하되 구출받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며)                   순례자의 길에서 잠시 누리는 그 어떤 풍요로움보다 더 비교할 수 없는 그런 것을 예비해 두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창조주 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에쿠스를 몰고 다니든지 BMW를 몰고 다니든지 돈의 풍족함을 추구한다 든지 명품을 좋아 하던지 육체의 정욕을 좋아 하든지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며 회계보고 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한 사람이 지옥에 가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며 예수님이 대신속죄의 보배로운 피로 죄들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셨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묻지 않으시고 이 땅에 보내사 이 모든 일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를 물으시고 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들을 따르며 믿음의 열매들을 맺은 것들에 대해서 상급과 보상으로 공평한 판단을 하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선포된 믿음을 통해 죄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되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부르심이 있기 전까지, 살아가는 나 날 동안,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서 죄를 짓지만 방종함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의 자유의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겸손하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 26:28)         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                   * 예수님의 피는 새 상속 언약의 피입니다.                             (골 1:13~14)         그분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능에서 건져 내사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셨으니 /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                   * 예수님의 피를 통해 죄들의 용서를 받았다고 완료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 1:16~20)         이는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왕좌들이나 통치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노라. / 또한 그분께서는 모든 것보다 먼저 계시고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 / 그분께서는 몸 곧 교회의 머리시니라. 그분께서 시작이시요 죽은 자들로부터 처음 난 자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에서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 / [아버지]께서는 그분 안에 모든 충만이 거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해 화평을 이루사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이 즉 내가 말하노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느니라.                   *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려주신 그 피는 우리들뿐만 아니라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 즉 예수님의 창조하신 창조세계 전체가 예수님께 화해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                   (롬 3:23~27)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심을 통해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려 하심이요, / 내가 말하거니와 이때에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사 자신이 의롭게 되며 또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게 만드는 이가 되려 하심이라. / 그런즉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게 만드는 이가 바로 나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어느 누가 이유를 달 수 있겠습니까?                             (롬 5:8~9)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은즉 더욱더 그분을 통해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니                             (벧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너희의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을 것들로 된 것이 아니요, /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요일 1:7)         그러나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교제하고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2012-04-16 15:14:07 | 노영기
어디서 이런 좋은 이야기를 혹시 경험담이세요? 농담입니다 ^^;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하고 완벽해질려고 발버둥치는것도 모잘라 남에게 완벽해지기를 강요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지금도 곳곳에 벌어지고 있지요 무슨일이든지 마음에서 우러나와 자발적으로 사랑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는것이 최고죠 억지로 하는것은 반드시 부작용이 나기 마련입니다. 상대방이 아니면 자신이 꼭 탈이나죠 좋은글 감사합니다. *^^*
2012-04-14 17:43:46 | 송재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준비하고 있는 설교 내용과 공통점이 많이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즉 만일 그녀가 자기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간부라 불릴 터이나 그녀의 남편이 죽으면 그녀가 그 법에서 해방되나니 그러므로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지라도 간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게 되었나니 이것은 너희가 다른 분 곧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분과 결혼하게 하려 함이요, 또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롬7:3-4)
2012-04-14 11:19:37 | 김문수
   권위적인 남편과 살았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신혼의 단 꿈이 채 가시기도 전에 결혼 생활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았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모든 일과와 집안에 발생되는 제반 일들을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은 완벽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자신이 정한 룰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가장 높은 수준의 고상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아내에게 하루 일과표를 세세하게 기록하게 했습니다. 분수에 맞게 검소한 삶을 습관화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시간 순서에 따라 적어야 했고, 결과를 확인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집안에 있는 집기 비품들은 남편이 정한 그 자리 그 위치에 두어야만 했습니다. 공동 생활하는데 있어서 정해진 자리에 두어야 시간 낭비 없이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용 후 그 위치에 놓여 있지 않다면 가차 없이 원인 분석 및 차후 방지대책에 대한 회의(?)를 장시간 진행합니다. 남편은 매우 논리적이었고, 분석적이었으며 분명한 주관을 갖고 일관성 있게 아내에게 줄기차게 요구를 했습니다. 빠른 시간에 자기 방식에 적응해 올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강구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이런 삶이 너무나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도움을 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시간이 흘러가면서 남편의 의중을 알기에 어느 정도 남편의 기준에 맞추어 주기로 하였습니다. 하루 일과표, 주중 계획서, 월간 계획, 자신의 일거 수 일 투족에 대해 남편에게 수시로 보고를 했습니다. 집안의 물건을 사용한 뒤에는 항상 남편이 놓았던 그 위치에 갖다 놓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제 이런 고통에서 해방되는가 하면서 분노를 억누르면서 하루하루 힘든 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아내는 남편이 교통사고를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남편에게서 해방되는 그런 순간입니다. 그래도 함께 한 정은 있어서 약간의 슬픔이 있기는 했으나 자유의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이 여인은 새로운 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남자는 이전 남편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자상했고 부드러웠으며 항상 여자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항상 살펴 주었습니다. 자신에게 헌신적인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난 뒤에도 이 남자는 변함없이 자신을 희생하며 아낌없는 배려와 사랑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너무 행복한 삶이었고, 너무 즐거운 삶이었습니다. 다시는 이 행복한 삶을 빼앗기기 싫었고 영원히 지속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한참동안의 시간이 지나고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서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예전과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의 남편과 살았을 때 그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아 올랐습니다.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의 삶을 새로운 남편에게 알려주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게 대해 꼼꼼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집안 정리정돈도 남편이 쓰기에 적당한 위치에 두고 그 위치에 두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같은 방식의 같은 패턴의 삶을 그대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전에는 억지로 얽매여서 마지못해 했는데 지금은 자원해서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 달랐던 것입니다. 새로운 남편의 생각과 헌신적인 마음을 알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남편에게 했던 것입니다. 같은 일이었지만 그 일은 힘들지 않았고 즐거움과 행복함속에서 겉모양뿐 아니라 정성까지 담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 여인은 정감 있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나는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을까? 혹시 권위적이지 않을까? 자상한 척 하지만 뭔가 지시적이고, 가르치려 하고 내 방식대로 교정하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아내를 위한 헌신적인 마음보다는 대접받고자 하는 마음이 우선하지 않은가? 한번 나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일정 부분 이 여인의 첫 남편과 같은 모습이 있지않나 반성해 봅니다. 나 스스로 나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화하기 편안한 시간을 마련해서 물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가정생활에 대한 글들이 많이 올라오니 이런 저런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주일을 준비하시는 행복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2-04-14 10:39:18 | 조양교
댓글이 넘 늦은감이 있어 포기(?) 했다가 ....ㅋ 와우~ 역시 과학자다우시네요. 저보고 데이타좀 뽑아보라 일이 주어졌다면 끙끙거리며 힘들게 했을텐데 말입니다. 김형제님의 성도칼럼에 대한 남 다른 애착은 곧 사랑교회에 대한 사랑과 비례하는거겠죠?ㅎㅎ 이후에 몇 편의 글을 더 올리셨으므로 '금단증상'에 관한 걱정은 심각하게 생각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하하~ 잘 읽었습니다.
2012-04-12 14:37:36 | 김상희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받으신 고통을 깊이 생각해 봅니다. 아픔은 아파 본 사람만이 안다는 말 100% 공감합니다. 의학 상식과 함께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이건 여담이지만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볼 때가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은 환자가 아픈 증상을 얘기한면 그 아픔에 대해 얼마나 공감할까? 그리고 통증의 예만 봐도 말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여러가지 증상이 있는데 똑같이 아파보지 않고서야 어찌 알 수 있을까? 등등 말예요..ㅎㅎ
2012-04-11 14:20:15 | 김상희
ㅎㅎ 갈매기들의 세계를 전혀 모르니.. 그냥 대장 갈매기 따라 줄을 지어 질서 있게 잘 날아가는구나 했는데.. 갈매기의 장거리 비행을 위한 놀라운 비밀이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좋은 교훈이 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04-11 13:53:56 | 김상희
  현재 미국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를 달리고 있는 영화가 있다. 바로 오랫동안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도 올랐던 수잔 콜린스(Suzanne Collins)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헝거게임(Hunger Game)>이다.   한번 잡으면 손에서 놓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다는 평을 듣는 소설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영화는 소설과는 또 다른 장르이니만치 평가는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아직 소설은 읽지 못하였지만, 적어도 영화만으로 보았을 때는 충분히 매력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야기는 미래의 어느 시점, ‘팬암’이라는 제국이 지배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팬암의 수도인 ‘캐피톨’은 12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진 전체 영토를 지배하며 관할하고 있다. 각 구역의 사람들은 매우 가난하지만, 정부의 체제에 순응하며 별다른 저항을 할 엄두도 못 내며 힘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캐피톨’의 사람들이 누리는 부를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있다면, 그것은 정부가 매년 한 번씩 개최하는 소위 <헝거게임>이라는 목숨을 건 서바이벌 방식의 게임에서 승자가 되는 것이다.   각 구역마다 매년 2명의 10대 남녀를 자원 또는 강제로 선발하여 이렇게 모인 총 24명의 소년 소녀들을 일정한 공간 (산도 있고 강도 있는 매우 넓은 공간 임) 안에 집어넣고, 그 중에 오직 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때까지 생존경쟁 게임을 시킨다. 더군다나 이 경기를 TV로 생중계하는 것을 온 국민이 지켜보면서, ‘캐피톨’의 시민들은 누가 이길지 내기까지 걸면서 열광적으로 즐기는 이 나라 최고의 축제 이벤트가 바로 말 그대로 ‘배고픈 자들의 게임’ 즉, <헝거게임>이다.   여러 구역 중에서도 최고로 가난한 구역인 12구역에서, 어느 날 추첨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헝거게임에 나가야만 하는 동생을 살리기 위하여, 16살 여주인공 ‘캣니스’는 이 경기에 자원하게 된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이제 그녀가 펼치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모험담과 로맨스로 관객 몰입도를 한층 높여 주며, 뒷이야기 들을 끌어간다. 관객의 취향에 따라 영화의 호불호는 갈려지는 것이 상식이겠지만, 영화를 보는 눈이 적어도 아마추어 수준은 조금 벗어났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필자의 눈으로 볼 때도 이 영화.. 꽤 괜챦은 편이다. 나머지 이야기의 결과와 영화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판단은 더 이상 이 자리에서 필자가 논의할 주제는 아니어서 생략하기로 하고, 좀 다른 관점에서 바라 본 영화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하자.   팬암제국은 크게 3개의 작은 세계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는 12구역으로 나눠진 보통 사람들의 세계다. 둘째는 캐피톨로 불리는 소위 엘리트 시민들의 세계.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엘리트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공간인 세 번째 세계, 즉 헝거게임이 있다. 엘리트 시민들은 보통 사람들을 구역 안에 가두고 통제한다. 여기에 순응하고 살아가면 비록 가난하고 질은 떨어지지만 생명은 보장된다. 그래도 혹시 일어날 수 있는 이들의 반란을 제어하기 위해서 엘리트 그룹은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이 가능한 게임의 룰을 제시하며, 보통 사람들을 헝거게임의 틀 속으로 집어넣는다. 여기서 살아남는 자는 보통 사람들에게 하나의 ‘희망’이 되며 반란의 기운은 사그러든다. 왜냐하면 엘리트들이 누구라도 원하면 헝거게임을 통해 정당한 (?) 방법으로 엘리트 사회로 진출하면 된다는 희망을 심어 놨기 때문이다.   비록 영화 속에서 나타난 팬암제국의 모습은 매우 단순화된 구도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 근본 구조가 많이 닮아 있다. 영화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소수의 엘리트 그룹이 있고, 대다수의 많은 보통 사람들이 있다. 엘리트 그룹은 독점하다시피 세상의 부를 거머쥐고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삶의 질고에서 힘들어 하며 꿈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 엘리트 그룹은 여러 가지 룰을 바꿔 가며 헝거게임 같은 구도를 만들어 준다. 가령 여러 가지 정치적 이념으로 판을 짜 주기도 하고, 다양한 철학이론과 이데올로기를 제시하며, 때로는 경제 활동의 방식을 여러 형태로 바꿔주기도 해 가며 그 룰에 따라 게임을 하라고 한다. 이 안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그리하여 엘리트 사회로 진입하기 위하여 문자 그대로 피 흘리는 서바이벌 게임을 뛰며 노력하는 보통 사람들이 있다. 다양한 게임의 룰 속에서 더러는 성공을 거머쥐며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에게 ‘희망’의 얼굴이 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서바이벌 게임이란 것이 본래 그렇듯이 누군가는 반드시 탈락자 혹은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무한경쟁의 치달음 속에서 비록 승자로 살아남을지라도 그 성공에 상응하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함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지금 어떤 게임의 룰을 따라 헝거게임이 진행이 되고 있는가? 성장위주의 자본주의 이념 속에서 적자생존적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유물론적 인본주의 진화론의 룰인가? 아니면 좌파니 우파니 아직도 방향을 못 잡고 한물간 구시대적 이데올로기의 논리에 따라 이합집산을 벌여야 하는 정치 논리의 룰인가? 서바이벌 게임 속을 바삐 뛰어 다니는 동안 우리는 우리 곁에 가까이 있던 누군가가 어느새 한명씩 숨죽어져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끼고는 있는가? 우리는 왜, 그리고 언제부터 이 게임을 하게 되었는지는 과연 제대로 알면서 뛰어 다니고 있기는 하는 것인가?   본래 3부작으로 쓰여진 소설에 맞추되, 영화는 그 표현과 시간적 제약의 한계를 감안하여 총 4부작으로 계획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주인공의 운명과 팬암제국의 결말이 어떻게 펼쳐질지 아직 소설을 읽어 보지 못한 필자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현실 세계의 결말은 어찌될지를 알고 있다. 팬암의 세계에는 없으나, 현실세계에는 존재하는 바로 그 '책'이 한 권 우리 손에 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영화 속에 보면, 헝거게임에 출전하는 소년 소녀들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도록 각자의 오른팔에 칩을 심는 장면이 나온다. 헐리우드 영화가 잘 쓰는 서브리미널(subliminal) 기법이라는 것이 있으니 참고하시길..   **********************************************************************************************************    P.S. 제가 지난 4월 1일 자로 올린 성도컬럼에서 당분간 글을 쉬겠다고 해놓고는 오늘까지 몇 편의 글을 더 올렸습니다. 처음엔 고난주간을 맞아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의미를 되새길 내용의 글을 한편 올려야겠다 생각했다가, 내친 김에 부활주일까지 이어졌고, 급기야는 요즘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와 관련하여 오늘 또 이렇게 한 편의 글을 올리게 되었네요.. 공연히 실없는 사람같이 되버려서 사랑침례교회 성도님들에게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잠시 글을 쉬려고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연구실에 그 동안 밀린 논문들을 정리하여 써내려면 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서 그랬던 것인데, 제가 이렇게 성도컬럼을 쉽게 못 떠나네요..^^;;  아무쪼록 이런 저의 상황을 이해해 주시기 바라고, 당분간 저의 글은 뜸 해지겠지만.. 다른 형제 자매님들께서 꾸준히 좋은 글들을 올려 주시리라 믿고, 또 많은 분들이 댓글로 호응해 주실 줄 믿습니다. 저도 틈틈이 댓글은 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주님 안에서 늘 강건하시길 바라면서 전 이만..  
2012-04-11 01:32:03 | 김정훈
하하~ 재미있는 글이네요.. 다만 신앙인이 쓴글이 아니어서인지, '신앙'과 '진실' 그리고 '사랑'이 우리 삶이라는 음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한 것이 아쉽지만.. 전반적으로 윗트가 살아 있는 재밌는 글입니다.
2012-04-10 13:40:03 | 김정훈
오늘과 내일은 비 소식이 있네요, 봄비가 대지를 촉촉히 적셔주고 나무에 초록물들이 가득 올라왔으면 합니다. 작년에 저희 영업장 화단에 어린 철죽을 100여촉 심어 놓았는데 겨울을 나는 동안 얼어 죽었는지 살아서 잎을 내는 철죽이 몇 그루 되지 않아 속이 몹시 상합니다. 뿌리를 너무 얇게 심어서 그런가, 아님 토질이 좋지 않아서 그런가 별 생각이 다 듭니다. 어쨋든 조금 지나봐서 싹이 영 나오지 않는 것들은 뽑아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화단에 나무조차 생각처럼 쉽지 않네요 신앙과 관련된 내용은 아니지만 지인으로 부터 온 글중에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는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음식은 훌륭한 쉐프가 다양한 레시피를 잘 버무렸을 때 맛있는 음식으로 탄생하듯이 우리도 성경 말씀이라는 레시피가 우리의 삶에 잘 녹아지고 버무려 졌을 때 맛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군요,      먼저 크고 깨끗한 마음이라는 냄비를 준비한 후 냄비를 열정이라는 불에 달군다. 충분히 달구어지면 자신감을 교만이라는 눈금이 안 보일 만큼 붓는다. 자신감이 채워지고 나면 성실함과 노력이라는 양념을 충분히 넣어준다. 우정이라는 양념을 어느 정도 넣어주면 담백한 맛을 낼 수 있으니 잊지말고 넣어 준다.   약간의 특별한 맛을 원할 경우 이성간의 사랑을 넣어주면 좀더 특별해진다. 이 사랑이 너무 뜨거워지면 집착이라는 것이 생기는데 생기지 않도록 불조절을 잘 해야 한다. 만일 생길 경우는 절제라는 국자로 집착을 걷어 내면 된다. 이때 실패하면 실연이라는 맛이 나는데 이 맛은 아주 써서 어쩌면 음식을 망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이 쓴맛을 없애고 싶을 경우 약간의 용서나 너그러움, 그리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여유로움을 넣어주면 어느 정도 없앨 수 있다. 깊은 맛을 원할 경우는 약간의 선행과 관용을 넣어 주면 된다.   가끔 질투, 욕심이라는 것이 생기는데 방치해 두면 음식이 타게 되므로 그때 그때 제거한다. 또 가끔 권태라는 나쁜 향이 생기는데 도전과 의욕이라는 향료를 넣어서 없앤다. 이쯤에 만약 삶이라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 힘들어서 지치게 되어 포기하고 싶어지면 신앙이라는 큰 재료를 넣어주면 새로운 맛과 향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면 기쁨이라는 맛이 더해 가는데 그 맛이 더해져 잘 어우러지면 진정한 자유라는 맛이 생기게 된다. 그 후에 평안과 감사함이라는 행복한 향이 더해짐으로 음식의 완성도도 높아진다. 이 향은 아주 특별한 것이라서 이웃에게 베풀어 주고 싶게 된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요리는 끝난 셈이다.   마지막으로 진실이라는 양념을 넣어 한소끔 끓인 후 간을 본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소스를 충분히 뿌려주면 이 모든 맛이 더욱 잘 어우러져 정말 맛있고 깊은 맛이 나는 '삶'이라는 음식을 맛 볼 수 있다.   - 좋은 글에서 -
2012-04-10 13:15:11 | 조양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