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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정말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성도를 이룬다. 오랜 신앙의 연륜이 깊게 묻어 나오는 분도 계신가 하면, 이제 갓 복음의 꿀맛 - 아니, 매실 맛이던가? - 을 느끼며 하루하루가 새로운 분도 계시다. 전에는 모르던 신앙의 교리의 기준이 분명하게 서 가는 모습에서 성장의 기쁨을 느끼는 분도 있고, 성도들끼리 어울려 같이 땀 흘려 봉사를 하거나, 한 마음으로 기도를 나누면서 주의 백성이 된 기쁨을 즐거워하는 분도 있다.   세상에도 모임은 참으로 많다. 특정한 목적을 같이 이루기 위하여, 혹은 취미를 위하여, 혹은 같은 연고라는 이유로, 아니면 단순 친목을 위하여, 기타 등등.. 이러한 모임들은 그 모임의 성격에 따라 어느 특정 요소들이 잘 이루어지면 성공적인 모임이 된다. 예를 들어 학술 모임은 열띤 지적 활동을 나눔으로, 봉사 모임은 열심히 시간과 자신의 재능을 나누어 줌으로, 그것이 친목 모임이라면 즐거운 놀이를 같이 공유함으로 등등.. 학술 모임에는 놀이가 없어도, 봉사 모임에는 지적 논쟁이 없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다르다. 교회 안에는 예리한 분별력을 요구하는 확신에 찬 말씀 선포와 성도들의 뜨거운 말씀의 상고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그 어느 모임 이상으로 봉사와 구제가 그 안에 넘쳐 나야 하고, 때로는 한데 어울려 신나게 놀기도 해야 하는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 모임’이 요구된다.   이렇게 다양한 요구가 한데 조화를 이루며 잘 이뤄져 갈 수 있기 위해서는, 성도들 간에 서로 돌보아 주며 서로 세워주며 서로 인정해 주며 서로 권면하며, 때로는 서로 지적도 하여 줄 수 있는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봉사하고 구제를 같이 나눌 때에 누가 ‘사랑’을 문제 삼겠으며, 신나게 공을 차며 게임을 하며 혹은 모여 수다를 떨며 친목을 나눌 때에 누가 ‘사랑’에 대하여 불평 하겠는가? 교회 안에서 ‘사랑’이 가장 어려울 때는, 말씀의 해석을 놓고 다른 견해와 다른 주장이 서로 엇갈릴 때일 것이다. ‘종합선물세트 모임’과도 같은 교회 안에서 분명 말씀의 상고와 그에 대한 나눔이 성도들 간에 열심히 오가는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 요소 중의 하나일 터인데, 자칫하면 ‘사랑’을 놓치게 되는 듯한 오해가 따를 일을 누가 쉽게 하겠는가? 더군다나 성도들 간에 성경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각기 다를 경우, 누군가가 성경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드러나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면, 자기의 이해 수준에 맞게 나름 ‘기쁨’으로 성경을 나누던 성도들에게 그것은 자칫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기를 꺾고 마는 일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니 누가 그 일을 선뜻 나서서 하려고 하겠는가?   성도들이 마음속에 이런 두려움을 품고 있다면, 그 교회에서는 결국 성경을 놓고 깊은 묵상과 통찰을 나누는 일이 성도들 간에 매우 위축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국 ‘좋은 말만 귀에 좋은’ 얇은 귀를 가진 성도들만이 넘쳐 날 것이며, 달란트의 차이로 확실히 말씀에 남다른 통찰력과 소명을 받은 성도들이 있다면 그 또한 깨달은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해야 할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그저 성도들이 누리는 깊이 없는 ‘기쁨’의 말씀 나눔을 적당한 거리에서 ‘불편한 미소’를 머금고 바라만 보아야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이것이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인가?   바울은 본래 당대의 세상학문은 물론이요 율법과 신학에도 출중한 자이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오히려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니게 만드는 도구로 쓰임 받을 뿐이었다. 하지만 바울이 다마스쿠스 근방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어떻게 변했는가? 그의 학문은 그를 당대 최고의 성경 주석가로 변모 시켰으며, 그를 소위 ‘바울신학’의 창시자가 되게 하였으며, 그를 이방인의 복음 전도자로 세워 특별히 세상학문에 능통한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능히 변론을 하며 복음의 당위성을 설파할 수 있게 하였다. 무엇이 차이점인가? 바울이 지닌 뛰어난 학문 위에 전에는 없던 ‘생명의 법’이 더하여 졌기 때문이다. 이제야 비로소 그가 지녔던 학문이 빛을 발하며 전에는 ‘죽이던 자’에서 이제는 ‘살리는 자’로 180도 탈바꿈을 하게 된 것이다.   학문 - 혹은 신학 - 이 나쁜 것이 아니다. 지식 자체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누구의 손에 붙들려 어떻게 사용되느냐가 중요하다. 지식과 학문이 제대로 올바르게 ‘생명의 법’을 덧입는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복음의 도구로 사용되어 질 수 있다. 아래 <성도컬럼>에 마침 유준호 형제님이 아주 좋은 한 예를 소개해 주었다. 고향에 돌아간 어느 신학생은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배운 ‘어줍쟎은 신학’을 전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성도들의 사기를 꺾고 은혜가 떠나가게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만일 바울이 그 신학생이었다면 어떤 상황이 연출되었을까 상상해 보자. 그 또한 필경 현란한 신학과 지식을 필요한 만큼은 전했을 것이다. 율법과 은혜의 관계에 대하여 설법을 했을지도 모른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통해 드러나는 그의 구원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전달하려 애썼을지도 모른다. 필경 그 마을의 성도들은 바울이 전하는 새로운 성경 이해의 깊이에 감동을 받았을 것이고, 이제까지 자기들이 은혜 받았다고 여기며 알던 바가 전부가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경륜과 사랑의 깊이에 대한 뜨거운 감격을 얻었을 것이다. 무엇이 차이점인 것일까? 그 신학생에게는 지식만 있었지, ‘생명의 법’이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바울은 그 깊은 지식 위에 더하여 다마스쿠스 근방에서 만난 살아 계신 예수님의 영혼을 향한 뜨거운 심장이 그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소아시아 지방의 교회들을 방문하거나 편지로 문안을 하면서, 그 교회마다 안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하여 때로는 ‘판단’을 때로는 ‘권고’를 때로는 ‘질책’을 전하여 주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거짓된 복음이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할 경우에는 분별력을 세워 주었으며, 다양한 은사들로 혼란을 겪을 때는 우리가 먼저 사모해야 할 우선순위를 정해주기도 하였다. 더러는 의견의 충돌로 바바나와 결별을 하며 길을 가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불리던 베드로를 책망하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어떨 때는 자신의 족보와 학력과 경력을 화려하게 자랑삼아 늘어놓으며 자신의 사도직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바울의 이러한 발언과 태도와 행동은 분명 주변 사람들에게 압박감을 주거나, 논쟁을 불러 일으킬만한 행동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바울의 이러한 모습을 발견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바울을 비난하지 않는다. 아니 비난은커녕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하며 그의 말들로 위로와 감동을 받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즐겨 읽는 바울의 서신은 신약 성경의 약 절반에 해당될 정도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온통 그의 ‘판단’과‘지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럼 바울은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어서 논쟁을 즐기고 다른 성도들의 잘못된 성경 이해를 판단하고 지적하여 바로 잡으려고 들었는가?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들 중에 우두머리라고 표현 할 만큼 (딤전 1:15)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만일 바울이 그저 자신의 겸손함에 집착하여 성도들과의 논쟁을 꺼리고, 각자의 성도들이 그저 자신이 임의로 성경을 해석하여 얻은 작은‘기쁨’의 수준에 만족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손에 신약 성경의 절반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자신 안에서 싸우는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으로 인하여 본인 자신은 괴로워할지라도 (롬 7:21-25), 다른 성도들이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잘못 이해하거나 그 진리에 관한 지식을 남용하는 모습을 참지 못하고 ‘지적’해 내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는 더 이상 같은 종류의 논쟁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 아닌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의‘종합선물세트 모임’과도 같은 교회 안에서 그 어느 모임 못지않게 말씀의 상고와 그에 대한 나눔이 성도들 간에 열심히 오가야 한다. 다만 누구라도 깨달은 말씀을 나눌 때는 바울이 교회에 편지를 썼던 것처럼 자신의 주장 가운데 ‘생명의 법’이 함께 들어 있는지를 뒤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나, 목적이 어긋난 ‘판단’은 금물이다. 전하는 말 가운데 생명이 흐르고 있다면 결코 그 말이 추상적인 관념의 나열이 될 리가 없다. 듣는 자 또한 진정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목마른 자라면, 그 말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으로 인하여 즐거워하지, 그 말씀을 전해 준 자를 두려워할 리가 만무하다. 우리는 서로가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라도 서로가 서로를 세워 줄 수 있다. 반드시 학문이 혹은 신학적 지식이 많아야 성경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왜 서로의 다르게 느낀 바를 말하기를 주저하는가? 그날 당장 납득이 안 되면 다음 날 이해를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다음 날도 이해가 안 되면, 두었다가 웃으며 나중에 천국 가서 같이 확인해 보자고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교회 안에서 서로의 다르게 느낀 바를 말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가려 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말씀을 상고하고 나누는 그 어떤 모임도 교회 안의 다른 많은 모임들과 같이 ‘사랑’ 안에서 이뤄질 수 있다. 아니,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단순히 나는 부족한 사람이니까 가능하면 드러내기를 꺼려하고, 형제를 ‘지적’ 하거나 ‘판단’하면 논쟁이 되어 덕이 안 될 수 있으므로 가능하면 입을 다물고, 학문과 지식은 상대방을 기죽이고 무미건조한 관념의 유희로 전락할 소지가 있으므로 입도 뻥끗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랑’은, 내가 부족한 사람이어도 그 부족한 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나의 생각을 드러내고, 비록 다소간의 원치 않는 논쟁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능히 서로를 향한 존경과 예의와 인내로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판단’을 나누고, 필요 하다면 학문과 지식 또한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되도록 아낌없이 사용하는 모습 가운데, 더 풍성해 진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편지하기를, “내가 이것을 기도하노니 곧 너희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판단에서 여전히 더욱 더 풍성해지고, 너희가 뛰어난 것들을 입증하며 그리스도의 날까지 성실하고 실족거리가 없는 사람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들로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이 되기를 구하노라”(빌 1:9-11) 라고 하였다.   그렇다! 사랑은 지식과 모든 판단 안에서 오히려 더욱 더 풍성해질 수 있는 것이다    (Your love may abound yet more and more in knowledge and in all judgment) !!    
2012-03-08 17:53:21 | 김정훈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거액을 들여서 지으려는 욕망은 예배드리는 장소인 예배당을 성전으로 잘 못 가르쳐서 인간의 욕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가 되겠죠. 성도 개인도 빚을 지게 하고 교회가 빚을 지게 되면 고스란히 성도들의 이중 부담으로 남는 거겠죠.. (안타까운 교회의 현실이 이것뿐이겠어요..)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몸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며 믿는자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것을 바르게 알도록 캠패인이라도 벌여야 하는건 아닌지.. 구약시대에의 성막도 아니고.... 사람들이 탐욕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일에 열을 올리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눈먼 교회 지도자들과 분별력 없어 어리석고 불쌍한 성도(?)들의 합작품 중의 하나가 거대한 교회의 건물이며 빚이 아닌가 싶네요..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고전6:19 이 말씀은 몸에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지만 우리 몸이 성전임을 분명히 말씀하신거죠. 내 백성이 지식이 부족하므로 망하는도다. 호4:6
2012-03-08 15:19:46 | 김상희
"우리는 자신의 죄에서 깨끗케 되었음을 알지만 자신의 육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음을 알고 괴로워한다." 이말이 왜이리 저에게 다가오는지요...오늘은 목요자매 모임을 가지 못하여 혼자 집에서 묵상합니다. ^^자매모임 궁금하네요..
2012-03-08 11:31:49 | 주경선
이세상 속에 아무리 훌륭한 지체일지라도 모자라고 부족함이 조금씩은 있을것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옳고 그름이 판단될 때도 있구요. 얼마나 빨리 깨닫고 고쳐가는가에 더 점수가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나서서 애쓰시는 형제, 자매님들 때문에 소망과 희망이 키워지고 있다고 봅니다.
2012-03-08 09:49:19 | 최현욱
주일학교, 학생부, 청년부는 사랑침례교회의 힘입니다. 공부하기도 좋을 때이고, 놀기도 너무 좋을 때인데 하나님께 붙잡힌바 되어서 바른 믿음을 쌓아가는 모습이 너무 좋습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나를 향한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내가 먼저 변하는 것이 다른 것을 바꾸는 첩경이라 생각됩니다. 좋은 글, 좋은 생각 감사합니다.
2012-03-08 09:44:43 | 조양교
교회가 빚을 지면 나중에 휴거되었을 때 고스란히 휴거되지 못한자들에게 전가되어 경제적 부담이 더욱 가중된다고 하네요, 예수님의 몸된 교회가 하나님앞에 가서 무어라 답변할까요? 능력이상의 빚은 지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2012-03-08 09:36:10 | 조양교
우리 삶속에서 균형을 잃어 버릴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안에서 균형잃어 버린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기울어진 부분은 채우고 올라간 부분은 비워서 삶에 균형을 잡아 나가기를 원합니다.
2012-03-08 09:29:13 | 조양교
토저 목사님의 글은 잠언서와 더불어 강력한 경고와 긴장을 주어 옷매무새를 다시금 하게 만듦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공포심을 갖지는 않는다..." 두려운 하나님이시지만 더이상 공포의 하나님이 아니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2012-03-08 09:17:55 | 조양교
진솔한 간증 감사합니다. 유준호 형제님 같은 좋은 청년들이 교회에 더욱더 많이 함께 하기를 소망합니다. 추신 : 유준호 형제님외 다른 청년 형제자매님들도 아주 훌륭한 사람들 입니다. 이름이 언급안되었다고 삐치기 없기 ^^;
2012-03-08 08:02:30 | 송재근
너무나 엄청난 비리라? 아니면 집단 세뇌? 무모한 신앙을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착각하는 목회자와 성도간의 악순환의 연속을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교회의 직분을 유지하고 받으려고 돈을 투자하는 현실은 또 어떻고요.. 타락한 중세의 교훈이 무색하네요.. 더욱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야겠습니다...
2012-03-08 06:42:05 | 오혜미
형제님.. 내게 비친 형제님의 모습은 올바른 정신으로 그래도 무엇을 믿고 있는지 잘 설명하는 그런 청년입니다. 적어도 우리교회에 나오고 또 이렇게 홈피와 킵바이블을 읽고 섭렵하는 사람이라면 어느정도 믿음과 사랑에 대한 균형을 가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아마 그런 마음이 이미 있기에 이렇게 글을 올리셨겠지요..저도 자네.... 그 책을 읽고 깊게 감명을 받았지만 그대로 행해야 한다면 아무도 그에 준하는 목회자가 될 수 없을 겁니다 ...그 책의 내용처럼 목회자의 길을 접을 수밖에 없는 고백을 하게 될 뿐이지요. 목회자의 길은 정말 멀고도 험란해서 자기자신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고 그저 진리와 소망과 부담이 있을 때 하나님 말씀을 선포한다고 봅니다. 가르치는 자와 진리를 말하는 자는 스스로 겸손의 옷을 입어야 하지만 배우고 듣는자는 그의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과연 그의 말이 옳은가에 집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상식이하의 태도도 볼 때가 있지만 형제님은 그정도는 아닐텐데 너무 자책하다가 진리가 빛을 드러내지 못하면 너무 아쉽지요. 분명히 성령님은 오래 참으시며 우리를 가르치시며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모처럼 청년들이 유년부를 지도하는데 내심 그러한 시간을 통해 건전한 생각과 일을 한다는 것 자체에 저는 소망과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어떤 선생님이든 자기를 잊어버리고 타성에 젖지 않기를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용기를 내세요..^^
2012-03-08 06:30:46 | 오혜미
   시골 교회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복음을 하는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모두 구원을 경험하고, 매일 자신들을 도우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지체들과 함께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중의 한 형제가 부르심을 받고 신학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많은 형제자매들은 그 형제가 목회자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였고, 기도로 그의 가는 길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는 도시에 있는 신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목사가 되기 위한 수업을 열심히 받았습니다.그리고 어느 날, 방학을 이용하여 이전에 그렇게 사랑하던 아름다운 시골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전처럼 많은 지체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처럼 성경 본문을 읽고 각기 그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깨닫게 된 것과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들을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각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들과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온 신앙의 간증들을 이야기하는 '평신도적' 성경 공부를 진행할 때, 입을 굳게 다문 채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바로 한 학기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온 그 청년이었습니다.    성경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 청년은 그 모임을 인도하던 형제에게 최근의 신학 연구에 관해 주워들은 이야기를 장광설로 늘어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최근의 신학 연구는 신화, 전설, 역사, 비평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에 대한 지식 없이는 성경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향의 친구들이 그런 말을 한 신학도에 대하여 순간적으로 두려운 느낌을 갖기도 전에, 그는 신학교 강의실에서 얼핏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음으로써 그들을 기죽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신학교 문턱도 못 들어가 본 지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의 발언은 경건주의적이고, 아까 그 형제의 견해는 정통적이고, 저 친구의 의견은 메서디스틱하구먼...."  "오호라,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렇다면 자네는 그 점에 있어서 오시안더파에 속해 있군. 그런데 그 오시안더 학파는 말이야, 아직 성경이 말하는 칭의의 법적 성경에 대하여 적절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지...."    성경을 읽으면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이야기하려고 하면 그때마다 이 청년은 이런 식으로 지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낯설어하는 신학 용어들을 마치 특혜를 베푸는 양 설명해 주곤 하였습니다. 그의 어쭙잖은 신학 지식은 성경 공부를 하러 모인 다른 지체들을 무력하고 비참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생명력 있는 한 젊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내적 생명력이 추상적인 신학의 관념이라는 무거운 갑옷에 눌려서 압사당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 모인 모든 지체들은 경이로운 눈빛으로 이 작은 신학자를 바라보았지만, 그것은 매우 불행한 신학도의 귀향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신학의 대가처럼 생각했지만, 그 신학생 때문에 성경 공부 모임의 생명은 사라졌고 논쟁과 관념만 가득한 모임이 되었습니다.  모임을 모두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잡다한 관념이 가져다준 혼란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매월 첫째 주마다 청년들이 모여 독서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낙스 목사님의 '성령의 열매'라는 굉장히 유익한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간입니다.그런데 이 모임을 할 때마다 형제들끼리 작은 논쟁이 있었습니다.모임에 참석하셨던 분들은 모두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   처음 모임에서는 흠정역 성경의 완전성에 관한 토론.  1)   두 번째 모임에서 치유의 은사의 지속성에 관한 토론. 2)   세 번째 모임에서 욥기의 기록연대 추정에 관한 토론. 3)   공교롭게도(?) 모두 제가 개입되었고, 그때마다 저는 항상 맞는 말을 나름 온유하게 해왔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다 며칠 전 우연하게 이 책 4)의 첫 장을 읽게 된 순간 저는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저에 대한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그 신학도처럼 누군가를 가르칠만한 한 학기분량 만큼의 지식마저도 없습니다.그러면서도 저의 행동은 그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는걸 깨닫고 저 자신이 너무나도 창피하고 함께 논쟁하던 형제들에게 너무나도 진심으로 죄송스러웠습니다.     몇 년 전 처음에 킹제임스 성경을 알게 된 때에도 그랬었던 것 같습니다.킹제임스 성경을 읽고, 럭크만의 주석서들을 찾아보면서 잔뜩 머리가 커져서개역 성경을 읽는 분들을 속으로 무시하며 다니엘의 70이레가 어쩌고, 전천년주의 세대주의가 저쩌고...제 기억으론 틀린 얘기는 별로 해본 적이 없던 것 같습니다만, 성령의 열매 역시 전혀 맺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주변에 제 얘기를 듣고 흠정역을 보아야겠다고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구요...^^;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달라졌다 생각했는데 그 때와 별로 변한 게 없습니다.게다가 그나마 있었던 한 줌의 지식도 이제 다 까먹고 잊어버려 아는 건 더 없어졌습니다.그런데 이렇게 형편없고 교만한 사람이 얼마 전부터 유년부에서 말씀을 전하는 교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사람들 앞에 나서 말을 하는 것이고, 그 다음이 정신없고 시끄러운 초딩들인데,게다가 가장 아끼는 시간을 빼앗아 가시다니요!뭔가 정말로 말이 안 되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습니다.분명히 계속 거절하고 피하고 도망 다녔는데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ㅎㅎ   하나님께서 어떤 분을 보내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는데 그 사이 잠깐 땜질할 사람이 필요하셔서 모자라도 별수 없으니 너라도 잠깐 써야겠다..하시고 그만큼의 분량을 허락하신 걸로 믿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로소 두려움보다는 감사한 마음이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드디어 다시 뭔가를 맡겨주신 것 같아서, 저같이 무익한,아니 해로운 사람도 이렇게 써주시는구나..그런 마음이 들어 감격과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의2 타의8로 시작하게 된지 석 달이 되어가는데도 아직 제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일요일 아침 발걸음이 무겁고, 매주 맡겨진 시간 15분이 마치 15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겨우겨우 한주씩 버티고 있습니다. 빨리 그 분께서 오시길 바랍니다..^^;   저를 포함한 주일학교 교사로 수고하시는 모든 분을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과 아이들 앞에, 지체들 앞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항상 말에 조심하고 또 행동을 조심하도록 기도로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형제님,   사랑합니다. 성도님들.      불행한 신학도로서의 마지막 글을 조금 덧붙입니다. 다시는 지체들과 논쟁을 하거나, 가르치려는 태도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ㅜㅜ 1)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218    흠정역을 보시며 주변에 전하시려는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2)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 표적과 치유의 은사를 허락하신 때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와 엘리야와 엘리사의 때,    그리고 예수님과 사도들의 경우 정도이며 또한 분명한 필요와 목적과 함께 제한적으로 허락하셨으며    확실한 성경 말씀을 모두 주신 이후로 그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  우스 사람 욥의 세 친구인 데만사람 엘리바스, 수아사람 빌닷, 나아마사람 소발의 이름이나 관련 지명은 역대기상     1장 32절에서부터 42절에 걸쳐서 모두 언급되며 만약 이들이 모두 우연하게도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욥기의 추정     기록연대는 최소한 이삭이나 에돔 이후의 시대로 늦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김남준.    이 책은 몇 년 전 김재근 목사님이 사랑침례교회에서 하셨던 킹제임스 성경 세미나 음성파일을 듣다가 문득 호기심이    생겨 구입해 놓았다가 며칠 전 처음 펴본 책입니다. 저는 신학도가 될 마음도 능력도 자격도 전혀 없습니다만,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2012-03-08 00:17:38 | 유준호
지난 3월 2일 날짜로 <news and joy>에 실린 글을 링크로 걸어 놓습니다. 이글은 <복음과 상황> 3월호에 실린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암울한 현실입니다. 주님이 오늘 밤 오신다면 한국교회를 보고 뭐라고 말씀 하실지 상상이 되십니까? 왜 우리에게 올바른 교회가 중요한지 더욱 실감이 나십니까?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제대로 보고 알게 되면, 비로소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를 또한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7111#210246
2012-03-07 23:39:48 | 김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