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주제와 내용이네요.
우리 교회안에서도 인생의 멘토가 되고 또 되어주는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지체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저도 부족하지만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줄 용의가 있고 또 저의 멘토들도 주위에 많이 두고 싶어요.
교회안에서가 아니면 어디가서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겠어요.......
2015-10-19 12:29:50 | 오혜미
며칠 전 우연히 디모데후서 1장 말씀을 보다가 인상 깊은 구절이 보였습니다.
2절에 보면, ‘나의 극진히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인데 우리가 보통 정확한 국어사전의 의미를 찾아보지 않고서라도 누군가에 ‘극진히’라는 표현을, 그것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표현 하였을 때는 그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얼마나 지극한지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3절에 보면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내가 밤낮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너를 기억하므로 내 선조들 때부터 내가 순수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 혹은 믿음 안에서의 선후배이자 동역자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 어느 스승이 제자에게 저런, 어찌 보면 낯간지러운 표현들을 서슴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또 어느 제자와 스승의 관계가 어머니, 할머니에 이르기 까지 깊은 이해관계를 형성 할 수 있을까요?
문득 그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이정도 사제지간의 깊은 신뢰와 이해가 형성이 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흔히 말하는, 함께 숙식을 하며 오랜 기간 숙련의 과정을 거쳐 기술을 연마하는 도제식 수업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 같습니다.
그럼 바울에게 디모데는 어떤 제자였을까요?
4절에 보면 ‘네 눈물을 마음 깊이 생각하며 너 보기를 몹시 원함은’과 5절에서 ‘내가 네 속에 있는 꾸밈없는 믿음을 회상하노니’의 표현을 미루어 짐작컨대 디모데 역시 스승을 깊이 신뢰하고 따랐으며, 그의 성품은 주 안에서 매우 정직하고 깨끗한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이와 같은 지극한 관계를 생각하니 한편으로 제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는 바울과 같이 믿고 따를만한 가치 있는 스승이 있는가?’
‘나는 누군가에게 디모데와 같은 사람인가?’
‘나에게는 디모데와 같이 나를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가?’
이 세 가지 질문 모두에 제 자신은 불합격은 아닌지…….
문득 불안하면서도 우울한 마음이 몰려왔습니다. 또 평소 남편에게 자주 듣는 핀잔을 떠올리니 저는 이와는 정 반대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잠시 여담이지만 결혼해서 큰 아이를 낳고 유치원에 보내기 전까지 살림이 그다지 넉넉지 않아서 학습지만 겨우 시켰지 그 흔한 문화센터 한 번을 제대로 데려간 적이 한 번 도 없었습니다. 요즘은 걸음걸이만 겨우 하는 정도의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문화센터마다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물론 꼭 돈 때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한 번도 가 본적은 없었고 그러면서도 또래 아이들보다 뒤처지거나 소외되지 않게 하려고 나름 많은 궁리 속에서 아이를 키웠던 것 같습니다. 어느새 큰 아이가 자라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저는 아이에게 영어학원, 보습학원, 피아노 학원 등 때로 아이가 다니고 싶어 하는 학원조차 제대로 보내지 못했지만 나름 우리 형편에서 아이에게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지만 나름 자기주도 학습의 방법을 터득하게 하려고 여러 가지 노력들을 했는데 그 중 재미있는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아이가 1~2학년 정도 무렵이었는데 아침에 학교에 가기 전 엄마아빠에게 외치는 구호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나 저도 이 방법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습니다.
먼저 저나 남편이 아이에게 거수경례로 “고집!”하고 외치면 아이는 부모에게 거수경례로 “열공!”하고 답을 합니다. “고집!”의 의미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수업시간에 집중하라’는 의미이고, “열공!”의 의미는 ‘열심히 최선을 다해 공부한다는’ 약속의 의미입니다. ㅎㅎ
이렇게 비장한 다짐으로 즐겁게 등교를 준비하던 그 시절이 문득 그립습니다.
그 결과 아이도 선생님께 수업시간 집중도와 참여도가 매우 높다는 칭찬을 적지 않게 들었던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아이 자랑을 하려던 게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있어 먼저는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과 이를 잘 듣고 따르는 제자의 관계는 마치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와도 같을 것이란 생각에 떠오른 일화였습니다.
우리 인생의 참 된 목적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궁극적으로 하려던 바로 그 말이 정답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게 된 [하나님]의 선물을 네가 불붙이게 하려고 너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노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아니하시고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우리 [주]의 증언과 그분의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따라 복음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 (딤후1:6~8)
우리가 다 이와 같은 바울과 디모데 같은 관계이면 좋겠습니다. 그런 바램 속에 문득 얼마 전 찬양했던 곡의 가사를 떠올리며 부족한 글을 마치려 합니다.
주가 주신 모든 것에 우리 모두 감사해 그 일로 우리 주의 일을 시작하려네
주가 함께 동행 하면 그 믿음 가지고 우리 함께 주의 말씀 나누면서 널리 전하리.
2015-10-19 01:38:23 | 김경민
자매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또한 비슷한 경험을 떠 올리며
깊이 공감을 하게 되었네요.
생각하기 싫어하고 생각없이 살아가는 현대인 속의 나는
어떠한가 점검해보게 됩니다.
사소한 일상 하나도 놓지지 않고 하니님께 촛점을 맞추어
생각하는 모습이 귀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2015-10-17 02:18:55 | 김상희
김남희 자매님 ..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마음은 친구같아요.
캐나다에 사시지만 저희 교회와 함께 믿음을 지키고 교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10-16 23:26:54 | 오혜미
반려견과의 산책이 둘만의 즐거운 시간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안전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려면 주인의 지혜와 배려가 꼭 필요하지요.^^
지혜로운 주인은 둘만의 즐거움 혹은 둘 사이의 교감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상관없는 제삼자의 입장을 항상 민감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일 겁니다.
그런 사람은 윗글에서 알려주신 대로 강아지와 또 길거리의 다른 행인들 모두를 의식하며
모두의 즐거움과 안전을 위해 민첩하고 세심하게 목줄의 중재에 힘을 쏟는 사람이겠죠.
이처럼 우리 인생의 가장 합당하고 객관적인 시선, 곧 진리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을 귀한 글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대양 너머 멀리 캐나다에서 진솔하고 귀한 묵상의 글을 발송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5-10-16 10:40:24 | 김대용
소소한 일상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라 더 공감이 가네요.
순간순간 늘 보고 계실 주님을 한번더 깊이 생각해봅니다.
2015-10-16 09:49:47 | 김혜순
남희자매님. 카나다에 살아도 마음은 우리와 함께 있음을 알아요~
자식을 키우면서 부모의 마음을 알아간다고 하지요.
자매님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주께 고정시킨 자에게 완전한 평강을
주께서 주신다는 이사야26:3 말씀이 생각이
났어요^^
항상 주님을 신뢰하는 자매님의 모습이 보이네요.
자주 등장해 주실거죠?
차분한 상념의 글에 동감하며 ^^
2015-10-16 06:44:41 | 이수영
날마다 빠지지 않고 오후 6시쯤이면 강아지 목줄을 채우고 산책을 나갑니다.
늘 그렇듯 출발은 산뜻하게 시작이지요.
가다보면 사이좋은 친구도 만나고. 멀리서 풍기는 냄새도 싫은 덩치 큰 친구도 만나 서로 으르렁 거리기도 합니다.
그땐 손에 연결된 목줄로 중재를 해주고 땡기기도 하고, 할 수 있는 한 멀리 가서 자유를 느끼게도 해줍니다.
아주 가끔은 완전히 목줄을 풀어주어 자유롭게 뛰어 다니게도 해 줍니다.
제가 지켜 보는 시야 안에서 맘껏 뛰어다니다 영역표시를 다 마친 후에 절 보고 전력질주를 다해 제 품안에 돌아와 안길때면 그렇게 이쁠 수가 없습니다.
날 버리고 한없이 멀리 멀리 갈 것 같던 강아지가 제 목소리를 듣고 잘 찾아오는 걸 보는 것만큼 기쁠때가 없지요.
그런데 어느 날은
이녀석이 나와 연결 된 목줄을 마다하고 온 힘을 주어 풀어달라 땡깡을 놓기도 하고 꽤 긴 길이의 목줄을 끌어당겨 저를 오히려 자신의 원하는 길로 끌어가기도 하는 고집을 피웁니다.
주인인 저로서는 멀리 내다 보았을때 위험한 요소들이 있기에 오늘은 풀어 주어선 안되겠다..판단을 하고 이 녀석의 안전을 위해서 그러는것인데도 한번 마음껏 자유를 누려본 강아지는 오늘은 왜?? 라는 의문의 눈빛을 보내기도 하고 영 말을 안듣기도 하지요.
그때 방법은 딱 한가지입니다.
목줄을 더 타이트하게 잡고 목줄 길이 만큼의 자유도 주지 않고 무서운 목소리로 주의를 주고 더욱 가까이 바싹 붙어 걷게 하는것입니다.
이 안에서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말씀의 줄의 범위 안에서 누리는 자유도 충분할 터인데 너무나도 자주 더 많은 자유를 달라며 연결된 줄을 풀고 달아나려 합니다.
그 줄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좀 모자르다고 땡깡을 놓으면서요.
그리고 하나님이 저에게 맞춰주면 어떠시냐고 땡겨보기도 합니다.
멀리 나가더라도 나의 주인을 잘 알아보고 달려 들어오면 다행인데 맘껏 뛰어다니다 길을 잃어 헤매기도 하고 전혀 모르는 길에서 주저 앉기도 하지요.
강아지와 산책 중 제 모습이 보여 먼 하늘 바라보며 주인이신 우리 아버지를 생각해봅니다.
아버지를 알아보고 제대로 방향 맞춰 뛰어오는 제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실까?
때론 제 멋대로인 저를 보고 얼마나 슬퍼하실까?
인생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나님과의 연결로 주신 말씀안에서 주시는 충분한 자유로
이땅에서 영역표시(?) 해가며
조금은 멀리서도.
조금은 바싹 옆에서도.
온전히 내 주인을 잘 알아보고
감사하며 살 것을 다짐해 보는 그런 저녁입니다.^^
--강아지와 자식을 통해 하나님 마음을 알아가는 철없는 여인이...
2015-10-15 23:59:38 | 관리자
바른 말씀을 만나게 하시고
듣고 깨닫게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감사하네요.
말세에 더욱 분별력 있는 자가 되기를...
2015-10-06 17:16:14 | 백인숙
"네 마음을 다하여 주를 신뢰하고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지어다. 네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네 행로들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절실히 느낍니다. 대언자 예레미아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오 주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며 걷는 자의 걸음을 인도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삶의 첫걸음은 그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도를 받으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잠언 3장 5절은 믿음으로 시작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주를 신뢰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믿고 삶을 맡기길 원하십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혼을 회복시키시며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행로들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당연히 우리는 주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삶에 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 계획대로 따라가기 원하십니다.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지어다."는 말씀은 본성적 논리를 의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내 명철을 의지한다는 말은 내 경험, 내 사고를 의지하며 그것을 하나님 뜻에 복종시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려면 우리에게 두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를 신뢰하고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지어다.(잠 3:5)" 이것이 믿음입니다. 나아가 잠언 3장 6절에 "네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네 행로들을 지도하시리라." 이것이 순종입니다. 참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 뜻에 대한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 뜻을 알고나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순종하면 깨닫게 하십니다.
삶에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려면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대한 청사진을 갖고 계시며 사랑으로 그 계획을 이루시기 원하십니다. 잠언 3장 5-6절의 공식은 간단합니다. 믿고 순종하면 됩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를 신뢰하고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지어다. 네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네 행로들을 지도하시리라."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 워렌 위어스비.
2015-10-04 23:01:08 | 박진태
주님을 생각만해도, 평안이 다시 찾아오네요. 진정한 알맹이의 의미가 주로부터 오는 것을 생각합니다.
2015-10-02 01:39:47 | 김정호
튼실하고 고소한 잣 알맹이와의 만남을 고대하며 수많은 난관을 극복했음에도
쭉정이나 속이 빈약한 알맹이와 만났을 때의 당혹감과 실망감
바로 이것이 구원을 끝끝내 거부하는 사람들과 겨우 구원만 받은 사람들을 마주한
예수님의 마음이라면 정말 정신이 번쩍 드는 일입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일단 구원이 전부이지만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마땅히 구원 그 너머의 것을 추구해야겠지요. 우리 삶의 열매가 미미했을 때
주님께는 큰 실망감을, 자기 자신에겐 쓰린 수치를 안기는 결과가 된다면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라 두 눈이 번쩍 뜨이게 됩니다.
귀한 교훈을 자연을 비유의 소재 삼아 자연스럽게 전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5-09-30 16:12:57 | 김대용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분별력의 지혜를 다시금 간구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2015-09-30 12:05:50 | 김상희
문학작품을 보는 듯 추억을 떠올리는 아름다운 글입니다.
제 어릴적 초등학교 때 맹꽁이 운동화에서 만화캐릭터가 신발 등에 븥어있는
범표 운동화를 어머니께서 사 주셨을 때의 기쁨이 잔잔하게 떠올랐네요.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상고하게 되는 감동의 글 감사합니다.
2015-09-30 11:43:45 | 김상희
열매를 까서 먹으면서도 구원과 성화에 대한 자기성찰이 귀감이
되는 좋은 글이네요.
내 속에 감추인 진정한 구원과 성화에 대해 다시 한번 점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2015-09-30 11:27:21 | 김상희
서울 한복판 인왕산 자락 어느 골목길에서 살구를 따 먹던 일과 고무신에 관한 아기자기한 추억을 접하니
정말 옛날이야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만화 '검정 고무신'만큼이나
글이 정겹고 감동적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대한 참신한 해석도 저에게도 귀한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가 즐겨 신으시던 하얀 고무신이 오버랩되는 명절에 어울리는
정겨운 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5-09-30 10:38:10 | 김대용
소소한 일상에서도 이렇게 심오한 깨달음을 얻는군요 ㅎㅎ
주님 보시기에 모든면에서 실하게 꽉찬 알맹이기를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2015-09-29 17:25:16 | 김혜순
낮에는 여름의 태양보다 더 뜨거운 햇볕에 ‘아 뜨거워--’ 하고 그늘을 찾아다니다가
어느새 아침과 저녁에 느껴지는 쌀쌀함이 춥다는 생각까지 드니
겨울이 곧 오겠구나 싶습니다.
강원도에 사는 친구가 통잣과 까는 기구를 주어서 가져 왔는데
콩알보다 작은 잣을 먹자니 까는 것도 귀찮고 기구사용이 서툴러선지
단단한 껍질이 이리저리 사방으로 튀어서 밀쳐놓았다가
요즘에 조그만 그릇에 한주먹만큼 덜어서 시도를 하다 보니
이제 제법 단단한 껍질이 도망가지 않게 깔 수 있네요^^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이 단단한 껍질 속에 들어있는 잣이 몸에 좋은 것을 알았을까요?
잣나무에서 잣송이를 따기가 송진이 끈적거려서 사람들도 기피하기에
원숭이를 훈련시켜 따게 했지만 원숭이도 안하고 나무에 매달려 있거나 도망가는 바람에
사람들이 꼭 수확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무엇이든 사람들의 손이 안가는 먹거리는 없지요.
친구가 힘들게 물세척하여 준 것인 데도 가끔씩 투명한 액체 같은 것이 묻어 있어서
부주의로 만졌을 때 숲속의 냄새같이-피톤치드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은 좋은데
에구- 손이 정말 끈적끈적하니 만지는 것마다 끈적임이 묻어요.
잣이 비싼 이유가 있었구나!
그런데 어떤 것은 아주 단단한 껍질을 깼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이 자꾸 나와요.
“정말 이상하다? 깼는데 속 알맹이가 어디 갔지?...... ”
“에이 이것도 알맹이가 없네......”
남편이 보더니 한마디 합니다.
“그게 쭉정이라는 거야”
똑같은 잣의 모양으로 겉으로는 온전한 잣인데 알맹이가 없는 잣을 보면서
‘겉모양으로는 진짜 그리스도인 인줄 알았는데
나중엔 아닌 것이 드러나는 일이 있다‘는 것에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좀 통통한 것으로 골라 이건 좀 알맹이가 크겠지 기대하며
깨고 보면 아무것도 없어서 쓸데없는 일을 한 셈이 되곤 합니다.
껍질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주님께서 알곡은 곳간에, 껍데기는 불 속에 태운다는 마3:12 말씀이 저절로 생각이
났어요.
한 자매님과 함께 잣을 까먹으며 자연스레 이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예전엔
' 어떻게 해서라도 구원을 꼭 받아야 해’
‘천국에 무슨일이 있어도 꼭 가야만 해’
‘못가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에 늘 머물러 항상 두려움 속에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남편의 인도로 우리교회에 와서 구원에 대해 정확히 알고
지금은 평안을 누리고 있다고 하였지요.
남편에게 너무 감사하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 가운데 생활하고 있다고.
에베소서 5:8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엡 5:8 너희가 한 때는 어둠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니 빛의 자녀들로서 걸으라.
개역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로 되어있지요.
‘빛의 자녀들처럼’ 이란 말은 빛의 자녀가 아니기에 흉내 내는 것을 의미하지요.
흠정역성경의 탁월함에 감탄하게 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문제는 다시금 확인하고 또다시 확인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해요.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을 누리고 계시겠지요?
잣을 바로 까서 속껍질을 벗기고 먹으니 참 고소합니다.
이것을 황 잣이라고 하고 백 잣은 뜨거운 물에 살짝 삶아 속껍질을 까고 말린 것인데
백 잣은 담백하고 황 잣이 훨씬 더 고소하고 영양이 많다고 하지요.
잣을 까면 딱딱한 껍질 속에 꼭 맞게 얇은 속껍질을 입고 알맹이가 들어있는데
가끔은 알맹이가 날씬하니 실하지 않은 것들이 나와요.
알맹이가 통통하게 꽉차있는 것이 맛이 있는데 말이지요.
그걸 보면서 ‘알맹이라도 실한 것과 실하지 못한 것이 있구나!’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겨우 구원만 받은 것이 이런 모습일까?
주님 앞에 섰을 때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했는데 겨우 구원만 받았으면
정말 부끄러울 것 같다는 생각에 나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눈앞에서 행하고 있는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칭찬을 받기 원하는지?
주님을 섬긴다면서 나를 알아주길 원해서 하는지?
혹시라도 내가 나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지?
내가 애착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나의 정욕들은 어떤 것인지?
육신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지?
...............................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갈 5:24-26
2015-09-29 13:39:29 | 이수영
안녕하세요?
참으로 감칠맛 나게 글을 써 주셔서 마치 제가 글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시는 의미도 제대로 알았어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9-28 20:10:48 | 관리자
# 신발에 얽힌 추억
누구나 “자린고비의 선비”이야기는 다 아실 것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자린고비의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그 선비는 외출할 때마다
신발을 신지 않고 들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외출할 때마다 신발을 들고 가다가 저 만치 앞에서 사람이 오는 것을 보게 되면
그 자리에서 급히 신발을 신고 움직이지도 않고 서 있다가
그 사람이 지나가면 다시 벗어들고 버선발로 유유히 사라졌다는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이것은 신발이 닳는 것까지 아까워했다는 없이 살던 그 시대에 지어낸
웃자고 한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제가 어렸을 때도 어머니가 새 신발을 사주시면
그 신발이 아까워서 선반 위에 올려놓기도 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발을 신고 다니지도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만큼 귀히 여겼다는 뜻이지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옛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동네 아이들과 달리기 시합을 할 때,
신을 벗어놓고 맨발로 달리기를 했었던 기억!
그러다가 새끼발가락을 다쳐 피까지 흘려야했던 기억에
지금도 그 발가락이 아프게 느껴집니다.
그때는 운동화보다 고무신을 더 많이 신었었습니다.
운동화는 학교에 갈 때나 외출을 할 때 주로 신었지만
고무신은 집에서 놀 때나 보통의 일상생활에서는 이 하얀 고무신을 주로 많이 신었습니다.
그 당시, 고무신은 쓰임새가 다양한 우리들의 놀이기구이기도 했습니다.
냇가에 놀러갔다가 송사리를 잡으면 신고 있었던 고무신에 담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그랬으니 그 고무신은 어항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또 모래 백사장에서는 고무신에 모래를 가득 담아 퍼 나르는 놀이도 했었습니다.
그랬으니 고무신은 장난감 트럭이 되기도 했던 셈이죠.
인왕산 어느 골목길에서는 신고 있던 고무신을 던져 살구를 따먹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랬으니 고무신은 먹이를 구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또 다른 기억이 떠오릅니다.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키면 투덜투덜 투정을 부릴 때 사용하기도 했었습니다.
한번은 가기 싫었던 심부름에 투정으로 툭툭거리며 발을 내 지르다가
신고 있던 내 고무신이 옆집 지붕위로 날아올라 내려오질 않자
덜컹 겁을 먹고 놀랜 적도 있었습니다.
또 넓은 운동장에서는 신고 있던 고무신을 발로 힘차게 차올려
누가 더 멀리 신발을 보내는가 하는 놀이도 했었습니다.
그러다 그만 신발을 잊어버려 그것을 찾느라 한참 헤매며 고생했었던 기억도 납니다.
또 이런 기억도 생각나는군요.
장마철 황톳물 흐르는 도랑을 건너다 벗겨진 고무신이 둥둥 떠내려가자
발만 동동거리다가 기어코 눈물 콧물 울음까지 터뜨렸던 기억에 헛웃음이 나옵니다.
그때 그 고무신 한 짝이 지금쯤은 서해바다 어느 깊은 바다 속에 가라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계절 전천후 신발이었던 고무신은
바닥이 종잇장처럼 얇아져 찢어지거나 구멍이 나도 절대 바로 버리지 않았습니다.
찢어진 곳이나 그 구멍을 때워서 신었기 때문이죠.
우리 동네 시장입구 한쪽 구석에 고무신 때우는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지금기억으로는 "빵꾸전문, 기술본위, 신용보증"이러한 문구로
유리창 문에 써 붙여놓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아저씨의 다른 기술은 몰라도 때우는 기술만큼은 최고였었습니다.
어른들은 감쪽같이 때웠다고 감탄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구멍 때운 고무신을 신고 다니면 어찌 그리도 창피했었는지,,,,,,,
특히 여자아이들이 내 신발만 보는 것 같았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하얀 고무신을 떠올리면 내 어린 시절이 눈물 나도록 그리워지는 것은
아마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잃어버린 한 시대였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이렇게 하얀 고무신을 떠올리다보니
수년전에 신어야만 했고 신을 수밖에 없었던 하얀 고무신이 떠오릅니다.
20여 일간을 꼼짝없이 붙잡혀 있어야 했던 학익동의 어느 장소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도 어김없이 이 하얀 고무신을 신어야만 했었습니다.
그곳에서의 하얀 고무신에 대한 경험들은 흐르는 강물에 그냥 흘려보내고 싶습니다.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렵니다.
새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가던 날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새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가면 잃어버리기 십상이니
당분간 집에서만 신고 다니라던 어머니의 말씀을 못들은 체,
새로 산 검은 운동화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간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종례를 마치고 우르르 몰려나와 신발장을 보니 내 신발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혹시 내가 잘못 놓았을까 싶어 아이들이 다 나간 뒤에 다시 확인해 봐도
짝이 다른 헌 운동화 한 켤레만 남아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짝짝이 신발을 끌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두 발의 무게는 천근만근이나 무거웠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답답하고 슬프기만 했습니다.
동네 입구 공터에 걸터앉아 하릴없이 풀을 쥐어뜯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집으로 향했지만
꾸중을 들을까봐 집 문 앞에서 서성거리기를 한참,,,,,,,,
구정물을 버리러 나온 어머니가 보이자 그만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었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얼굴이 왜 그다지도 서러웠던지,,,,,,,
지금은 그 기억이 새롭기만 합니다.
아주 오래된 일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기억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애절한 추억의 한 토막들입니다.
운동화나 고무신과 같은 신발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나 실타래 하나를 다 풀어도 끝이 없을 만큼
즐겁고 애달프고 아기자기한 기억들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아이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이야기쯤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석연휴라 그런지 케이블 TV방송에서는 "모세"라는 영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껏 수차례 보았던 영화이기는 하지만 또다시 보고 있으니 재미가 쏠쏠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뵙기 위해 [하나님]의 산, 곧 호렙에 오릅니다.
나뭇가지에 불이 활활 타는데도 나무는 멀쩡히 그대로인 것을 보기도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명령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여기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시고” (출 3장 5절)
이제껏 많이 보아왔고 또 성경에서도 수 없이 읽어왔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 동안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느낌이 있어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습니다.
모세의 몸과 거룩한 곳을 가르고 있는 것이 신발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벗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거룩한 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거룩하게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내 몸과 거룩한 곳을 가르고 있는 것은 없을까?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혹,
지금도 나에게 거룩한 곳을 가르고 있는 것을 벗으라고 명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머리끝에서부터 전율이 온 몸을 타고 흐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 벗어 버려야 할 텐데~~
2015년 9월 27일
유 용수
2015-09-27 23:43:52 | 유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