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어떤 사람이 말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면 바로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요 능히 온 몸도 제어하는 사람이라.(약 3:2)"
우리가 얼마만큼 실제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깊숙히 연합되어 있으며, 또 우리가 얼마나 성숙한지는 우리의 '혀'가 말해줍니다. 마치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자기 혀를 절제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소위 신실한 사역자들마저도 함부로 말함으로 자신의 '육'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만일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 있다면, 그것은 무절제한 혀를 통해서일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혀는 불이요 불법의 세계니라. 혀는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서 그와 같아서 온 몸을 더럽히고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이며 지옥 불 위에 놓여 있느니라.(약 3:6)"고 했습니다. '본성의 행로'란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타락한 성향을 말하는데, 혀는 잠자고 있는 이 본성에 불을 붙여 갑자기 확 살아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평온한 상태에 있다가도 어떤 말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분노가 확 끓어올라 폭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시대에 사탄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지옥의 무기는 '혀'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주님께서는 부당한 고소와 심문을 당하시는 중에도 놀랍게 침묵을 지키심으로 구원받은 성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본질을 나타내셨습니다.(눅 23:9)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주님의 죽음과 연합된 성도들은 주님처럼 침묵함으로 '혀'의 요란함과 분쟁을 피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혀는 아무 때나 옛사람의 본성에 불을 질러, 우리 안에 분노와 증오의 지옥불이 활활 타오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몹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혀를 절제함으로 자신의 영적 수준을 드러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입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 안에 깊숙이 거하여 혀를 다스리는 가운데, 요란하며 조급하고 분노에 찬 말들을 주님의 침묵으로 이겨낼 줄 알아야 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완전함은 우리의 기도의 능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혀에 재갈을 물리는 힘은 오직 기도에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디모데전서 2:8)"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우리의 영적인 위치를 확실히 지키도록 하십시오. 말실수 하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십시오.
"오 주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편 141:3)"
십자가의 도(제시 펜 루이스).
2014-11-14 23:54:40 | 박진태
저도 어떤 문제를 만나면 입으로는 주님을 찾지만 인간적인 방법들을 생각해 보고 총 동원해 보다가 결국 그것으로 해결이 안될때에야 비로소 마음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2014-11-11 15:14:13 | 이정희
"우리가 전에 왕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그분을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나 그분의 권능과 그분의 진노는 그분을 버리는 모든 자를 향하나이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원수를 막고 우리를 도와줄 병사와 기병의 무리를 왕에게 요청하기를 내가 부끄러워하였기 때문이라.(에스라8:22)"
예루살렘을 향해 일행들과 함께 멀고 험한 길을 떠나는 에스라로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호위병이 함께 따라가 준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거룩한 부끄러움 때문에 단 한 명의 호위병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혹시라도 이방국의 왕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보호해 주시지도 않는 분이라고 생각할까봐 조심스러웠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일인데,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인간의 도움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일행은 사람들의 어떤 보호도 받지 않은 채,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해서 그분의 보호를 받으며 담대히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에스라처럼 하나님을 위해 이런 거룩한 부끄러움과 조심스러움을 느끼는 성도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꽤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조차도 사람의 도움을 너무 의지하다가 자신의 간증에 먹칠을 하곤 합니다.
가이사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주님을 부끄럽게 만드는 셈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교회를 위해 주정부에서 기금을 받아 내려고 그렇게 애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실 수 없는 분인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후원자는 없어도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것만큼 복된 일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 의지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래도 그렇게 급히 친구나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달려가시겠습니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렇지만 우리는 인간적인 수단도 사용해야 합니다." 라고요? 물론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의 수단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아서 일이 잘못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도 인간적인 방법을 너무 많이 의지해서 일이 잘못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인간적인 수단을 다 포기하고 주님만 의지하면 그 믿음의 분량대로 주님께서 응답하십니다. 2천년 교회의 역사 속에서는 그런 간증이 아주 많습니다.
스펄전.
2014-11-10 23:57:26 | 박진태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마20:22)"
영적생활에 혼란을 느끼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인도하시는 곳을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적 혼란을 겪고 나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친밀함이 보이지 않을 때(눅11:5 ~ 8) :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친구에게 무심해 보이는 한 사람을 예로 들어 때로는 하나님아버지도 그렇게 보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하나님께서 무심하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모든 것이 밝혀질 때가 올 것입니다. 더 깊이 알고 온전히 하나 되기까지는 우정에도 어두운 날이 있고, 사랑에도 고통스런 기다림이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전혀 보이지시 않을 때도 그분을 신뢰하며 잠잠히 기다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그늘이 덮일 때(눅11:11 ~ 13) : 하나님께서 때로는 얼핏 냉담한 아버지로 보이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구하는 자마다 받고 찾는 자는 찾으며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니라(10절)" 지금은 하나님아버지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지만, 왜 당신이 그 모든 것을 겪어야 했는지 언젠가 밝히 보여주실 것을 믿고 인내하십시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심이 생길 때(눅18:1 ~ 8)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어떤 혼란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지금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해도 에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꼭 붙잡아 믿음 안에 더욱 굳건히 서십시오.
지금 주님께서는 당신이 원하는 그 일을 위해서라도, 그보다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더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계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중"
PS "하나님 형상닮게 모난 나를 연단하실때"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시고, 나는 고난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은 내게 낮은 마음가지게 하시려고 좁은 길로 인도하실때 하나님은 은혜라 부르시고, 나는 연단이라 부릅니다.
사탄이 하나님과 나를 떼어 놓으려고 부와 명예를 풍족히 갔다줄때, 하나님은 시험이라 부르시고, 나는 축복이라 부릅니다.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2014-11-04 22:29:08 | 박진태
죽음의 두려움을 이길 구원의 믿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세상이 점점더 악해지고 사나워지고 살기 어려워져 가는것을 보면서도 짙은 어둠후에 여명이 밝아오듯 우리 주님께서 오실날이 가까워 옴을 알기에 두려움에 빠지지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평안히 쉴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2014-11-04 15:25:26 | 이정희
주님은 모든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에 오래 참으시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결말이 되어 참으로 기쁘셨겠네요~
더불어 상급도 많겠구나 ~하는 생각도 ^^
특별한 경우라 잊혀질수 없는 아름다운 마침표네요.
2014-11-03 17:30:11 | 이수영
한 혼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눈물로 씨를 뿌리신 과정이 참 아름답고 귀하시네요.
그 기도에 주님께서 아름다운 결실로 화답해 주신듯 합니다.
세상을 떠날때 마음에 조금이라도 맺힌것이 없을수 있게 살아가는 동안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겠네요.
가슴 따뜻하고 제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시는 잔잔한 글 감사드립니다.
2014-11-03 16:01:52 | 이정희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로다. 내가 신뢰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능력이시오, 나의 노래시며 그분께서 또한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이사야12:2)”
두려움에 빠지기 너무도 쉬운 이 시대에 이사야 12장 2절은 꼭 알아두어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가 되면 장차 올 일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이 낙담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주를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성경은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공경과 경외를 의미합니다. 이는 잔인한 주인 앞에서 벌벌 기는 노예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아버지를 향한 자녀의 합당한 공경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삶의 길이 이 두려움에서 열립니다.
두려움의 노예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뜻하신 삶이 절대 아닙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셀 수 없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두려움을 이기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싸움에 이기도록 능히 도우실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의 근본 원인을 찾아보면 분명히 부각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두려움의 참 원인은 불신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폭풍우 속에서 배가 침몰하려 할 때에도, 조금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다는 신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12장 2절에서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로다. 내가 신뢰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비결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풀지 못할 만큼 큰 문제, 지지 못할 만큼 무거운 짐, 싸워 이길 수 없을 만큼 힘겨운 싸움은 없습니다. 둘째는 하나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우리 믿음이 자라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 의해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느니라”는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셋째는 기도하며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아니하시고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 안에 계신 성령님은 연약한 당신에게 능력을 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두려움은 당신을 약탈하고 농락하고 무기력하게 만들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27:1)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워렌위어스비) 중.
2014-11-02 23:12:19 | 박진태
참 아름다운 기억입니다.
한 영혼을 주님 전에 인도하기까지 여정..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물론 주님의 은총없인 불가한 일이기도 할테구요.
또한 아직도 사랑치 못하는 대상과 완악한 제 자신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를 주셨습니다.
감사드려요.
2014-11-02 22:25:22 | 장경희
가을이 되니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주위에 아는 분들이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부터 한 17년 전이 되는 것 같네요.
이층교회를 하고 있을 때 하루는 젊은 부부 집사님이 찾아와서 자기들은 큰 교회를 나가는데 우리 교회를 나오겠으니
친정아버지가 위암인데 앞으로 6개월밖에 못산다고 병원에서 시한부로 판정을 받았다고 전도를 좀 해서 그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반갑던지 전도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부탁을 받고 그 집을 찾아가니까 언덕진 마을에 구멍가게를 하고 생활을
하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딸만 셋인데 큰딸 부부가 우리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손녀딸 이름이 김꿈새 였습니다. "꿈새 할아버지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가십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하면서 성경을 읽어
드리고 기도와 찬송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완강하게 거부를 하면서 내가 믿을 것 같으면 젊어서 믿었지 안 믿겠다고 하시면서 전엔 예수님 믿으라고 전도하는 목사를 멱살을 붙잡고 싸우기까지 했으니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부탁을 받았으니 일주일에 두 번씩 가서 예배를 드리고 전도를 했습니다. 바싹 여위고 배만 복록 나와서 기운이
없어서 밖으로 나가시지는 못하니까 돌아누워서 대꾸도 안 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얼마 안 있으면 세상을 떠나야 할 혼을 생각하니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한 마음은 그분의 딸 부부만 부탁을 안 했어도 안 믿겠다고 완강히 거부한다는 핑계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사위와 딸. 부부는 열심히 교회에 나오시면서 온 교인들이 함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 교회서는 매월 마지막 주에는 구제헌금을 드렸습니다. 앞에다가 헌금 바구니에 차례로 나와서 어린이들도 천원 하나라도 찬송을 부르며 오른쪽으로 나와서 좌측으로 들어가면서 성의껏 구제헌금을 모아서 어려운 집이나 갑자이 어려운 일 당한 집을 도왔습니다. 하루는 그 구제헌금을 싸들고 가서 그날도 냉랭한 반응으로 대하는 꿈새 할아버지께
"이 돈 얼마 안 되는데 병원비에 써 주세요." 하면서 놓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찾아갔더니 반가워하면서 "어서 오세요." 하시는 겁니다. 속으로 깜짝 놀랐어요. 물질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이렇게 큰 줄 그때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 후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귀를 기울이면서 말씀을 듣고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점점 병이 깊어져서 집에서는 힘들어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입원하신 병원이 세브란스 병원인데 주일이면 그 안에 있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곤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궁금한 것도 물어보시고 믿음이 쑥쑥 자라는 것이 제 눈에 보였습니다.
한번은 갔더니 세례 [침례]를 받고 싶다고 해서 준비를 해 가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장로교회서는 세례라고
했으니까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습니까?" 목사님이 물으시니까 "그러니까 받죠!" 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리시는
것입니다. 그때 제 생각에는 약식 세례가 이럴 때는 좋은 것이구나. 만약 침례 같으면 못 받으셨을 텐데 .
다 죽어가는 사람을 침례탕에다 들어가게 할 수는 없겠구나.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평소 때는 예수님도 요르단강에서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시는 침례를 받았는데 왜 머리에 물만 묻히는 약식 세례를 주는 걸까? 하는 의문은 있었지만
침례 교회서만 침례를 주는 것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시며 감격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아주 더운 여름이었습니다. 그날도 병원을 찾아갔더니 의사가 초음파 검사하는 모니터를 연결해놓고는 환자의 맥박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다가 점점 잦아지고 일직선으로 쭉 그어지면 운명하시는 거니까 의사나 간호사에게 알려달라고 하면서 얼굴까지 덮어 놓았습니다. 마지막 혼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입성하는 귀한 시간이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이 환자가 손으로 얼굴에 덮인 이불을 벗기면서 "저거 어떻게 되었나 보세요."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놀래서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 했습니다. 조용히 숨을 거두어야 하는 분이 모니터에 자기 생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라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데 기가 막혔습니다.
그때부터 고민이 되었습니다. 왜 못 돌아가실까. 대게는 병원에서 가신다고 하면 가시는데 원인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가실 분은 빨리 가셔야지 며칠 안 남었다고 해서 매일 가다시피 하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 다음 날 못 가시는 원인을 알았습니다. 그 부인되시는 분이 "사모님 참 이상해요. 동네 사람들이 손을 잡고 말을 하면
잘하는데 나는 손을 잡으면 뿌리치고 외면을 해요." 하는 것입니다. 아, 원인이 여기 있구나. 하고 환자한테 갔습니다.
"꿈새 할아버지 천국에 가셔야지요." 하니까 "가야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에 못 가시겠네요." 했드니 왜요?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 문이 안 열려요. 아니 천국에 가시려면 누구든지 다 용서하시고 사랑해야 하는데 왜 부인이 손을 잡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면 뿌리치고 외면을 하고 마음 아프게 하십니까? 그래서는 천국에 못 가십니다.
천국에 갈 마음에 준비가 되어야 천사가 와서 데려가는데 그 마음가지고 못 가십니다."
"살다 보면 부부간에 섭섭 한것도 있었겠지만 다 풀고 용서하셔야지요, 꿈새할머니가 병원 뒷바라지 하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시는데요. 전에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잃으셨습니다. 한 손으로 가게 보며 살림하시고 얼마나 고생하시는데 ,
고마움도 모르시고 그렇게 부인 마음을 섭섭하게 해 놓고 천국에 가신다고요. 절대 못 가십니다."했더니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럼 제가 하라는 대로 하시겠어요?" 했드니 "네!"하고 대답을 하시는 겁니다.
"그럼 절대로 건성으로 하시면 안됩니다. 진심으로 하셔야 합니다." 꿈새 할머니를 모셔올 테니 여보 그동안 수고 많이 했어요, 고마워요. 하라고 하고서는 꿈새 할머니를 모시고 남편 있는 침대로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가 자기 부인 손을 붙잡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여보, 수고 많이 했어요. 고마워. 당신을 사랑해 ,!" 하면서 눈물이 글썽이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모님 사모님 이 양반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어요."하면서 감격해 하였습니다. 아니 ,어찌 평생에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도 안했단말인가. 이런 부부도 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천국 문이 열리겠구나!
사람이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조금이라도 마음에 맺혀있는 것이라든지 섭섭하고 원망 들을것 은 다 용서하고
풀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평안할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것 같아요.
지옥에 가는 사람은 끝까지 원망, 불평하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나지만, 천국에 소망이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 용서가 될 수 있으니까요. ; 그래요. 우리 모두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워 나가면 이 세상을 떠날 때
기쁨으로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 이로서 모든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시니라 요 13 ;34.35
그런데 그분은 그 다음 날 오전에 조용히 천국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장례식은 은혜롭게 교회에서 마쳤습니다. 한번도 교회에 못 나오시고 딱 6개월 믿고 가셨어요.
물론 병원 교회에는 몆 주 나가셨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 일이 생생하고 흐뭇합니다.
귀한 생명이 영원히 구원받은 일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그 이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답니다 송 관 하 성도님............
2014-11-02 05:22:32 | 윤정용
"내가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예수님의 기쁨은 무엇이었을까요? 행복이라는 말을 예수님과 관련해서 사용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일종의 모욕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자기 포기와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그 일을 행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오니 참으로 주의 법이 내 마음속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8)", "항상 주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오니 기뻐하라.(빌4:4)"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쁨도 예수님의 기쁨같이 충만하기를 간구하셨습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그 기쁨을 내게 들어오게 하시도록 마음 문을 열었습니까?
은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세상적인 성공, 육신의 건강, 환경의 좋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충만한 삶을 살려면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가지셨던 것 같은 사귐 가운데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기쁨을 가장 먼저 방해하는 것은 주위 상황에 몰두한 나머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품는 짜증과 분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염려가 들어와 말씀을 숨막히게 하여 열매 맺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무슨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염려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참된 기쁨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에게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통해 생수를 쏟아내실 수 있는 그런 샘이 되십시오. 위선과 교만을 멈추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추어져 있는 당신의 참 생명안에 거하십시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주위 사람들에게 그 존재 자체가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중.
2014-11-01 00:29:54 | 박진태
어느 대기자가 쓴 칼럼을 읽으며 느꼈던 경탄과 비탄이 교차합니다.
경탄이란 필자로서 형제님의 뛰어난 지식과 실력,
그리고 킵 바이블에 저장된 엄청난 물량의 보석에서 발산하는 빛의 압도입니다.
비탄이란 독자로서 저 자신의 무식과 무능,
또 우량 기업 킵 바이블의 한 주주로서 전혀 주가를 알지 못 하는 어둠의 굴레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글로서 자주 일깨워주시니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10-27 23:51:01 | 최상기
킹제임스 성경이 주님께서 온전히 보존해 주신 성경이라는 것을 다시금 제 마음에 각인케 해주시고 어떤 마음가짐 으로 성경 말씀앞에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하게 해주시는 귀한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둔한 사람인지라 출력하여 여러번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2014-10-24 15:45:34 | 이정희
아침시간에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글 감사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바가 잘 정리된 것 같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분이라도 믿음의 근거인 잘못된 교과서를 사용하면 다른 길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믿는 자의 삶이 영적 싸움중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영적 무장을 느슨하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깨어서 종을 울려주고 경각심을 주는 글 감사합니다.
2014-10-24 09:36:43 | 조양교
야고보서 3:13 너희 가운데 지식을 갖추고 지혜로운 자가 누구냐? 그는 지혜의 온유함으로 선한 생활에서 나오는 자신의 행위를 보일지니라.
야고보서 3: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며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야고보서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요, 땅에 속한 것으로 관능적이며 마귀에게 속한 것이니
야고보서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거기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느니라.
야고보서 3:17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다음으로 화평하며 부드럽고 간청을 잘 들어주며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하고 차별이 없고 위선이 없나니
야고보서 3:18 의의 열매는 화평케 하는 자들의 화평 속에서 뿌려졌느니라.
이 아침에 머리를 맑게 하는 귀한 글 감사합니다. 링크된 내용도 찬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2014-10-24 08:34:45 | 김경민
참 놀랍고 감탄스런 논고입니다.
우리가 늘 지니고 있어야 할 대답들을 한꺼번에 정리해 주셨네요.
맑은 정신과 부드러운 심정으로 잘 썼다는 표현에 저도 공감백배합니다.
형제님 부지런히 주변의 복잡한 생각들을 잘 정리해서 우리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늘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거든요..ㅠㅠ
2014-10-24 08:01:25 | 오혜미
긴 답변을 써주셔서 많은 것을 느끼고 알게 되었습니다.
순수한 믿음이라면 "(시12 ;6.7)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라는 말씀을 믿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킹제임스 흡정역 성경을 만나기 전에는 성경이 왜 이렇게
기록 되었을까 했는데 지금은 그 의문이 다 풀렸습니다. 보존된 바른 성경이 킹제임스 성경이
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어 마음속이 시원하고 기쁩니다.
바른 신약 교회를 하기 위해 애쓰시는 정동수 목사님을 볼 때 얼마나 마음에 감동이 되는지요.!
그 목사님 밑에서 배운 형제님의 글을 읽을 때 스승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네요. 긴 답변을 통해 많이 알게 되어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2014-10-24 06:42:07 | 윤정용
하나님의 단순하지만 명확하고 완전하신 말씀에 믿음의 기초를 동여매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길을 따라 걷는 것....
처음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주님의 기쁨이 되고자 하여 걷는 길에서도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스스로 자만에 빠져 지뢰밭을 밟기도 하고
혹은 사탄에게 생각을 내어주어 다른 길로 걷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합니다.
형제님의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믿음의 기초가 명확하다고 생각함이
혹시 혼자만의 착각인지 아닌지 되짚고 또 짚어 봅니다.
2014-10-23 22:54:29 | 태은상
맑은 정신과 부드러운 가슴으로 기록한 훌륭한 글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로 저와 같이 글 솜씨가 부족한 성도들을 잘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패스터 정동수
2014-10-23 17:25:50 | 관리자
존 맥아더 목사의 구원론과 오래된 사본에 관한 논담
갈수록 짙어지는 가을 단풍에 웬일인지 하염없어지는 계절입니다. 그동안 안개 자욱한 삶의 골짜기를 지나며 어찌어찌 살다 보니 제법 오랜만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우연히 메일을 통해 접하게 된 한 자매님의 질문으로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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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신지요? 저는 정동수 목사님의 유튜브 설교와 성경 강해를 통해 바른 말씀을 듣고 기쁨이 넘쳐나는 자매입니다. 저는 요즘 목사님을 영상으로 거의 매일 뵙습니다.^^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 존 맥아더 목사님의 성경 강해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랑침례교회 홈페이지와 킵바이블을 통해 듣는 목사님의 성경 강해와 비슷한 것 같아서 듣다가 몇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첫째, 존 맥아더 목사님의 구원론 중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은 분명한데 그렇게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뉘앙스가 감지됩니다. 이 분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둘째, 존 맥아더 목사님은 마가복음 말미 16장 9절 이하는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사본학적으로도 오래된 사본에는 이 구절이 나와 있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어째서 킹제임스 성경은 후대에 첨가된 이 구절들을 받아들였을까요? 또 사본은 오래된 것일수록 항상 옳은 겁니까?
귀한 시간을 내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답변을 기대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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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자매님의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질문에 답변을 드리고 이어서 이것과 연관되어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 놓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존 맥아더(John Fullerton MacArthur, 1939~) 목사님이 얼마나 저명하고 대단한 사람인가부터 간략히 소개합니다. 5대째 목회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 내 저명한 신학대 중 하나인 탈봇신학대학을 장학생으로 졸업한 후 캘리포니아 썬 벨리에 위치한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부임해 오직 설교 역량으로 1만 명이 넘는 대형교회로 성장시킨 사람입니다. 또한, 1985년부터 매스터신학대학의 학장으로 재직하며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고 여러 기독교 서적을 저술했습니다. 현재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를 성경 해석에 관한 한 현존하는 최고의 설교자라고 인정하고 있으며 강해 설교의 대가, 진리 수호의 백전노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목사님입니다.
이제 막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성경 신자의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도 이처럼 현존 최고의 설교자 중 한 사람이라 할 존 맥아더 목사의 주장에 흔들리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 분의 명성과 권위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조건 없이 모두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건 안될 일입니다. 잘못된 자신의 가르침이 가져올 광범위한 피해까지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경 신자 측면에서 볼 때 존 맥아더 목사의 문제점을 잘 정리한 글을 소개해 드립니다.
*존 맥아더의 두 가지 오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2077
윗글의 내용을 정리하면 존 맥아더의 문제점은 ‘예수님의 피는 보배롭지만, 그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해 성경 신자들과 달리 천사가 아닌 경건한 셋의 후손으로 해석한다는 겁니다. 또한, 가장 큰 문제로 국내에도 번역된 그의 저서 ‘참된 무릎꿇음’등과 설교를 통해 ‘Lordship salvation(주재권 구원론 혹은 주 되심 구원론)’을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이 구원론은 극단적 칼빈주의 구원관으로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점차 영적으로 성숙해지며 제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과 구원받는 것, 즉 구원과 성화를 잘 구분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구원받음에 있어 ‘믿음 더하기 행위’를 요구하는 비성경적 구원관입니다.
본문 밑에 달린 댓글들도 잘 읽어 보시면 존 맥아더 목사의 문제점에 대해 이해를 깊이 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존 맥아더는 개혁주의(칼빈주의)신학의 많은 부분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국내 장로교 목사님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분을 좋아하고 따릅니다. 또한 부흥과 개혁사 같은 본격 개혁주의 출판사에서 존 맥아더의 저서 여러 권을 번역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가 언급되었거나 관련 있는 아래의 글들도 참조하십시오.
*폴 워셔와 Lordship salvation(로드십 혹은 로드쉽 구원)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1761
*칼빈주의(개혁신학)의 확산을 경계하며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447
*구원 취소의 이단 교리가 퍼지는 이유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2536&page=8
*우리는 진정 복음을 알고 있는가?(Do We Really Know the Gospel?)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82&page=
링크 걸어 놓은 글들을 다 읽으시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읽어 보시면 메일로 질문하신 자매님처럼 존 맥아더 목사의 가르침으로 고민하는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자 그럼 이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당대 최고의 설교자이자 훌륭한 성경교사요 신학자로 정평이 나 있는 존 맥아더 목사는 마가복음의 마지막 장인 16장의 9~20절은 최초에 마가가 마가복음을 집필한 뒤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덧붙여진 것이라 가르칩니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지금까지 발견된 사본 중 기록 연대가 오래된 사본에 이 구절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혼란은 아래의 글들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영광 8장: 본문 문제 3, 마가복음 16장 9-20절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128
*마가복음의 마지막 12 구절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1530
윗글들의 핵심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마가복음 16장이 8절에서 끝나고 9절 이후부터는 확실하지 않다고 믿는다면 누가 보아도 마가복음의 결론은 완결되지 않은 채 모호하게 끝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기록한 복음서가 이렇게 갑자기 모호하게 끝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를 포함해 오늘날 대부분의 성경 본문 학자들이 내린 결론을 따라 본래 마가복음의 결말 부분은 손실되거나 했고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16장 9절부터 20절까지는 마가가 아닌 후대의 누군가가 첨가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성경 보존의 교리(시12:6-7)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 신자는 아무리 대단한 신학자와 목사, 저명한 성경교사가 주장한다 해도 절대 이렇게 성경과 어긋나는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더불어 ‘마가복음의 마지막 12 구절들’이란 글에서 논증된 것처럼 마가복음 16장이 본래 8절까지만 기록되었다는 주장은 신약성경 전체와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충돌하기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래된 사본일수록 더 정확하고 믿을만하다는 존 맥아더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십시오.
*왜 킹제임스 성경인가?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45
위 긴 글에서 ‘오래된 사본’에 관한 내용만 발췌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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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천주교회(로마 카톨릭)의 성경 본문 비평에는 내재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뒤늦게 후대에 기록된 사본들에는 필사자들의 실수가 축적될 가능성이 크므로 기록 연대가 오래된 사본일수록 성경의 원문에 더 가깝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본문 비평가들은 후대의 사본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상대적으로 수가 훨씬 적은 오래된 사본에 더 많은 신뢰와 권위를 줍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국제 사본학계의 주류에 있는 다수의 사본학자들 또한 이러한 주장을 지지합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그들이 가장 신뢰하는 사본은 바티칸 도서관에 보존된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산 동방 정교회 수도원에 보존된 ‘시내 사본’입니다. 이것들은 주후 4세기경 필사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초기 교회들이 천주교회의 바티칸 사본이나 시내 사본 같은 소수 사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거의 모든 곳에서 공인 본문 사본만을 사용하였고 그 사본이 닳아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면 조심스레 그것을 필사하고 불태워버렸습니다. 이런 이유로 초기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하던 오래된 사본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워낙 많은 교회들이 이런 사본들만을 사용하였으므로 이런 계통의 사본들은 현존하는 사본들의 99%를 차지할 정도이며 유럽과 아프리카, 팔레스타인 등의 기독교가 전파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됩니다.
반면에 사실상 기독교를 타락시켜 중세 암흑시대가 시작하는 기반을 닦은 대음모자 콘스탄틴 황제의 꼭두각시였던 유세비우스가 황제의 명령을 받아 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티칸 사본이나 시내 사본 등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채 바티칸 도서관과 시내 수도원에 간직되어 왔습니다. 또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 값싼 파피루스에 대부분의 사본들을 필사하였기에 이것들을 오래 보존하기 어려웠으나 바티칸 사본 등은 벨럼이라는 가죽에 필사되어 장기간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개역성경이나 현대 역본들의 각주에는 종종 “더 좋은 사본 혹은 더 신뢰할 만한 사본 혹은 더 오래된 사본에는 이 구절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언급되는 ‘더 좋은 사본’, ‘더 신뢰할 만한 사본’, ‘더 오래된 사본’은 하나같이 천주교회의 소수 사본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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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오래된 사본일수록 더욱 신뢰할만하고 권위가 있다는 주장은 얼핏 타당한 것 같지만 사실 기독교와 사본의 역사를 조금만 살펴보면 얼마나 헛된 믿음인가 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의 글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새로 발견되는 사본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합니까?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98
*영화: 어둠 속의 등불(A Lamp in the Dark): 킹제임스 성경과 교회의 역사(영화 후반부에 ‘바티칸의 비평 본문<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과 현대 역본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 시청하시면 도움이 됩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4&write_id=30
너의 믿음의 기초를 어디에 매어 놓았는가?
이제 순수한 마음으로 메일을 보내주신 자매님의 질문에 신실한 분들의 훌륭한 글에 힘입어 부족한 답변을 갈무리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생각이 있습니다. 왜 존 맥아더처럼 대단히 탁월한 지성인이 매우 치명적이라 할 비성경적 구원론과 잘못된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앞서 설명했지만 존 맥아더는 저 또한 배우고 싶은 점이 많은 뛰어난 설교자요 세상이 인정하는 기독교계의 거물입니다. 더구나 그는 그저 오순절 은사주의자나 번영신학 따위를 추구하는 속된 기독교계의 거물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성경의 진액을 잘 뽑아내는 탁월한 성경교사임을 부인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함에도 그의 가르침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지성인이 그보다 한참 못한 지적 능력을 소유한 우리가 분별해 낼 수 있는 잘못된 사상과 가르침에 깊이 빠져들 수 있을까요? 혹시 우리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히려 우리가 대단한 지적 자만심에 빠진 건 아닙니까? 이쯤 되면 상당히 불안해지기까지 합니다. 혹시 성경 신자의 믿음을 추구하다 나도 모르게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먼저 제가 왜 1611년 반포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오늘날 하나님께서 한 점의 오류도 없이 완전하게 보존해 주신 성경이라고 믿는지 몇 가지 단순하고 명백한 이유를 고백하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시편 12편 6~7절에 하나님께서 친히 주님의 순수한 말씀들을 온전히 보존해 주시겠다고 더없이 분명하게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6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7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혹자는 어떻게 이런 중차대한 믿음 또는 교리를 단 두 구절의 성경을 기반으로 해서 세우려 하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한 구절, 한 단어라도 하늘과 땅보다도 쉽게 없어지지 않고 모두 성취되는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마5:18, 마24:35) 그래서 저는 위 구절들을 통해 성경을 보존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습니다.
둘째, 오늘날 완전하게 보존된 성경이 없다면 그와 함께 초래되는 극심한 혼란과 배교 현상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영적 피폐함을 바로잡을 길이 없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시리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경 전체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공의로우심, 지극하신 사랑의 성품을 생각할 때 도저히 성경 보존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방법이 없습니다. 더불어 불완전한 부분이 너무도 많은 개역 성경 등 로마 카톨릭이 퍼트린 천주교 사본에 근간한 성경들이 가져온 폐해는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피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받아들이고 말고를 떠나 이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의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연 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할 때 주께서 이런 영적 무지와 혼란 속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내버려두실 분이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너무나 단순한 진리에 근거해 킹제임스 성경이 완전하게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셋째, 평균적인 수준의 중·고등학생 정도의 논리력과 사고력을 가지고 기독교 역사, 성경 사본의 역사, 그리고 킹제임스 성경의 출간 과정과 킹제임스 성경 자체를 조금만 살펴보면 누구라도 수백 년의 역사 속에서 검증된 킹제임스 성경 외에 말씀을 온전히 보존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부합하는 다른 대안이나 후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진리는 반드시 명시적이고 단순합니다. 그래야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위고하,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경의 뼈대를 이루고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대한 교리가 매우 복잡다단한 설명과 학문적 논증 과정을 거쳐야만 온전하게 설명되고 이해된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절대 성경의 모든 교리와 방대한 내용 모두를 누구나 쉽게 파악하고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꼭 깨닫고 알아야 할 믿음 생활의 뼈대를 이루는 중대한 교리는(예를 들어 예수님의 대속 사역, 인간의 구원, 천국과 지옥, 재림 등) 누구나 설명하면 쉽게 알 수 있는 뚜렷하고 단순한 논리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겁니다. 성경 보존의 교리와 사본의 역사에 대한 부분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처럼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에 완전하게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이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맑은 정신과 바른 지각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 반대편에 있는 소위 오래된 사본에 뿌리를 둔 성경들이 더 정확하고 여러 번역본을 참고하고 그것도 모자라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어 성경까지도 참고해야 겨우 희미하게나마 완전한 성경에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워질 수 있다는 주장은 어떻습니까? 하나같이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본학과 신학의 전문 지식을 동원하고 복잡다단한 논증 과정을 거쳐야 겨우 순진한 그리스도인의 고개를 끄덕여 볼 수 있을까 말까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면 어떤 분은 당신들도 성경지킴이나 출간한 여러 책자에서 사본학을 거론하고 심지어 그렇게 터부시하는 성경 원어까지 가끔 거론하며 나름 복잡하게 킹제임스 성경을 변호하지 않느냐고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물론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께서 오늘날 보존해 주신 흠 없는 완전한 성경이라는 믿음의 논증은 위에 제가 명시한 몇 가지의 단순한 항목만으로 차고 넘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세상엔 교묘하게 자신의 신학적 지식을 동원해 순진한 성도들을 영적으로 미혹하고 혼란에 빠트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들은 성경 신자들 중에 지적 능력이 뛰어난 지체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킹제임스 성경을 신학적으로 연구하고 사악한 주장을 반박한 자료들이 축적된 선한 열매로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연구의 결과물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을 견고하게 다지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됩니다. 그러함에도 저는 확신하건대 성경 신자의 믿음의 기초는 반드시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뚜렷하고 단순한 진리에 매여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확고한 기준이 흔들리면 존 맥아더 같은 뛰어난 목사나 신학자, 저명한 성경교사가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성경과 배치되는 가르침을 퍼트릴 때 대다수의 순진한 성도들이 그 함정을 피하거나 헤치고 나오기 어렵게 됩니다.
가끔은 성경 신자들 사이에서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경악할만한 소식을 접하게도 됩니다. 오랫동안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교회에 출석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좋은 제목으로 여러 성도들에게 평가되어 근본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해외의 좋은 대학에서 유학까지 마치고 와서 정작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말씀에 대한 믿음을 버린 분이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런 분들은 심지어 교회를 쪼개고 나가서 소위 킹제임스 성경의 불편한 진실을 알리는 것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막상막하의 기가 막힌 소식이 또 있습니다. 한때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킹제임스 성경을 알리고 심지어 킹제임스 성경이라면 콧방귀를 끼는 청교도 개혁주의 인터넷 카페에까지 담대하게 킹제임스 성경과 바른 교리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알리던 한 분이 지금은 그가 목이 터지라고 외쳤던 그 모든 믿음을 완전히 폐기하고 킹제임스 성경을 반대하는 사람들 편에 서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대체 이분들의 믿음의 기초는 어디에 매여 있었을까요?
성경에 기록된 뚜렷하고 단순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자신의 믿음의 기초가 매여 있었다면 이런 처참한 결과는 절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결국 이분들이 따르던 것은 더욱 정교한 논리와 자신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킬 만큼 더욱 치밀하고 빈틈없는 가르침이며 허탄한 지적 유희를 즐겼을 뿐입니다. 매우 민감한 이야기고 욕먹을 각오를 하고 꺼내는 이야기지만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이렇게 겉으로는 엇비슷하지만 본질상 전혀 다른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물론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많은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아무 문제가 없을뿐더러 이런 태도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성경도 이런 태도를 가질 것을 적극 권면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또한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벧후1:19)
또한 애초에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께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완전하게 보존해주신 한 치의 오류도 없는 말씀이라는 진리는 몇몇 선하고 영민한 신학자들에 의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하더라도 그들의 연구로 또렷해진 진리를 믿는 대다수의 성경 신자의 믿음이 이분들의 복잡다단한 신학 지식과 사본학 지식을 모두 다 섭렵하고 나서야 탄탄해지는 것은 아니고 또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대한 성경의 진리는 반드시 명시적이고 단순한 특징을 보이는 것입니다.
지식을 쌓는 것엔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지식만을 추구하는 태도입니다. 심지어 이런 사람들은 지적 유희를 즐기는 데만 탐닉하고 자신의 믿음의 기초가 지금 어디에 매여 있는지, 자신의 영적 성숙이 지금 어떤 수준에 도달해 있는지 살펴볼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때 흔쾌히 성경 신자의 믿음에 동의하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도 무언가 새로운 지식, 자신이 보기에 더욱 월등한 가르침을 대면하면 금방 자기 믿음의 기초를 옮겨 버립니다. 차라리 조급함을 버리고 차분하게 그런 가르침과 주장의 허점을 연구해 볼 인내심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이러한 미덕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지식만을 추구하자면 교단 신학을 하는 신학자들이 우리보다 훨씬 세상에서 인정받는 유명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적어도 세상의 눈엔 우리 못지않은 치밀하고 논리적인 변증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만 쫓아간다면 성경 신자임을 가장해서 알량한 원어와 사본학 지식을 동원해서 킹제임스 성경을 공격하고 은근히 개역 성경을 옹호할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교단 신학의 포근한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장자 교단의 달콤한 열매를 함께 나누는 편이 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처지가 남 탓만 할 상황은 아닙니다. 과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바른 신약교회를 추구하고 킹제임스 성경을 더 널리 알리자고 하면서 혹시 누군가 매우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 혜성처럼 등장해 치밀한 논리와 해박한 신학 지식을 무기로 세상의 저 오만한 신학자들과 목사들을 단번에 무릎 꿇게 하고 킹제임스 성경이 한국의 주류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경이 되도록 해 줄 것이라는 은근한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아니 그게 아니라도 다만 일반 교회와 교인들이 무시하지 않게 독립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라면 이왕 해외 유학을 다녀오면 좋을 것 같고 영어도 잘하면 좋을 것이고 아니면 다만 어떤 방법으로든 미국 근본주의 신학교의 졸업 이력이라도 홈페이지에 걸어 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진 않습니까? 혹은 이도 저도 아니면 탄탄한 세상 경력이라도 갖추고 있으면 선한 사역이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은근한 기대가 우리 사이에 잠재해 있는 것은 아닙니까?ㅡ물론 이것은 현재 그저 선한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로 그러한 여건에 계신 분들을 무분별하게 비판하려는 의도가 절대 아닙니다. 그런 모습만을 추구하며 하나의 기준으로 삼고 나아가려는 우리 안의 은밀한 욕구에 대한 지적일 뿐입니다.ㅡ배교의 거대한 물결이 온 세상을 뒤덮은 마지막 때 우리를 영적 소수자로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가 이런 정도라면 너무도 서글픈 일이 아닐까요?
성경 신자들이 왜 오늘날 소수의 진영을 이루어 힘겹게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깨닫고 부디 스스로 자기 믿음의 기초를 절대 흔들리지 않는 뚜렷하고 단순한 진리에 매어놓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해박한 성경 지식은 분명히 이 단순한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고 아직 깨닫지 못한 자들을 설득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 지식의 방대함과 해박함이 우리 믿음의 뿌리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항상 사람들이 보기에 월등하게 보이고 정교하게 보이는 지식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에 믿음의 기초를 묶어놓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고 혹시 너의 연약함을 합리화하려는 의도는 아니냐며 비소를 보내신다면 그 또한 달게 받겠습니다. 저는 그저 사람의 속 중심과 마음은 오직 그것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판단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끝으로 비록 개혁주의를 받아들였지만 ‘설교와 설교자’라는 불후의 명저를 남기고 위대한 통찰력을 소유했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 중에 제가 가장 감동했던 한 부분을 인용하며 미욱한 사람의 글을 맺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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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원천은 공부입니다. 지혜의 원천은 분별력입니다. 지식은 공부함으로써 얻습니다만 지혜는 그런 방법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이 공부하면서도 지혜를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분별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보통 그 특성상 추론적인 반면, 지혜는 좀 더 직관적입니다. 지식은 대화와 이야기와 고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혜는 어떤 의미에서 거의 타고난 재능입니다.
지식과 지혜는 이 외에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지식은 일반적으로 이론적인 반면 지혜는 언제나 실제적입니다. 지식은 인생과 삶 등 본질적인 부분에 대체로 큰 관심이 없지만 지혜는 언제나 이런 문제들에 실제적인 목적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이렇게 지혜는 항상 살아서 무언가 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구분점은, 지식으로는 의지와 상관없이 활동하는 정신을 소유하는 반면, 지혜에 있어서는 의지에 복종하여 행동하는 정신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지혜는 올바른 종류의 지식입니다. 그리고 이런 지혜가 현대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하다는 저의 말에 여러분도 동의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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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지혜와 통찰력이 오늘을 사는 성경 신자들에게 차고 넘치기만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15 지혜는 루비보다 귀하니 네가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 그것과 비교될 수 없도다. 16지혜의 오른손에는 많은 날이 있고 지혜의 왼손에는 재물과 명예가 있나니 17지혜의 길들은 즐거운 길이요, 지혜의 모든 행로는 화평이니라. 18지혜는 그것을 붙잡는 자들에게 생명나무니 그것을 간직하는 자는 다 행복하도다.(잠3:15~18)
13 악한 자들과 유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14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네가 그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15또 어린아이 때부터 네가 거룩한 성경 기록들을 알았나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16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3:13~17)
2014-10-23 17:24:07 | 김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