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자녀를 낳아 키우며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음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이겠죠..
교회의 또 다른 모양인 이 곳이 모든 지체에게 유익함을 제공하고 공유하는 아름다운 공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인생은 짧다. 절대 공감..
2012-03-24 22:24:52 | 김상희
이 글을 읽다 보니 눈가에 이슬이....
2012-03-24 18:50:47 | 허광무
두 아이를 키운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을 헤아려 본다,
한 성도님의 가정에 쌍둥이 아이들이 출산했다. 교회의 경사스런 일이다. 나는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다보니 아이를 어떻게 낳았는지 어떻게 키웠는지 잘 모르겠다. 아내는 “무심하니까 그렇지~” 하면서 핀잔을 준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로서 준비가 부족했던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대부분의 준비된 부모들은 태중에 있을 때부터, 더더욱 아이들의 출산이 임박해지면 질수록 여러 가지 준비로 분주하다. 이 아이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각종 유아용품부터 먹을 것에 이르기까지, 아이가 있어야 할 공간까지 세심한 부모일수록, 능력이 있는 부모일수록 더 많은 것들을 아까운 줄 모르고 준비한다.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육지에 온갖 풀과 꽃과 나무들을 채우시고, 그것도 형형색색의 독특하고 다양한 모양과 향기를 지닌 채 종류대로 창조하신다. 바다속은 어떠한가? 어두운 칠흙같은 공간일지라도 그안에 얼마나 다양한 모양과 색조를 지닌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군락하는가? 공중에는 이름조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때로는 큰 집단을 이루며, 때로는 짝을 이룬 채 화려한 색깔을 뽐내면서 알 수 없는 기괴한 소리가 온 지면을 휘덮는다. 육상을 채우고 있는 동물들도 그 모습의 씩씩함과 기개가 각각의 종류에 따라 흘러 넘친다. 이 모든 것들이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하시는 부모된 심정의 하나님이시지 않을까? 사람이 거주하기에 너무나 편안한 공간을 섬세하게 아름답게 향기롭게 단장하시는 친절하신 하나님을 뵈옵는다.
새로 태어난 아이는 부모에 대해 절대적 신뢰를 갖는다. 하늘에 높이 던져 올려도 부모의 손안에 있는 이상 거기에 두려움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이제 아이가 성장해 감에 따라 부모는 조금씩 아이에 대해 엄격해 진다. 항상 손안에 감싸고만 있지 않고 독립적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방치를 한다. 그렇지만 항상 부모의 시선은 아이에게 고정이 되어 있다. 아이가 그것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간에 부모는 아이에게 어떤 위험한 순간에 처하지 않을까 조바심을 하면서 바라보게 된다. 여기에서 또한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우리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하나님의 시선은 우리에게 고정되어 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 삶에서 인지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보여진다. 이 시점에서 아이는 어렸을 때 가졌던 편안한 마음보다는 불안감을 많이 느끼게 된다. 자기 가까이에 부모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아이를 나뭇가지에 결쳐놓고 뛰어 내리라고 하면 선뜻 뛰어 내리지 못하게 된다. 유아기의 절대적 믿음에서 혹시나 하는 불안감을 느끼면서 청소년기를 통과한다. 부모가 멀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부모의 보호와 공급을 통해 살아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장성한 시기가 되면 더 이상 부모의 품속에만 살 수는 없다. 이제 독립적으로 선택하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여야 하며, 부모를 자발적으로 섬기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도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거친 우리에게 지각(senses)을 통한 믿음을 소유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때로는 어려운 상황에 놓기도 하고, 한동안 침묵하시기도 하시고, 많은 풍요로움 속에 두시기도 하고, 다양한 상황속에서 어떻게 행하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지각을 통한 믿음이 무엇인지 처음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여러 상황을 통과한 뒤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듯하다. 바로 장성한 자의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각(senses)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신다. 이 지각은 말씀을 통해 연단을 받고, 사람들을 통해 연단을 받고, 환경을 통해 연단을 받고,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 연단을 받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라시는 삶을 자발적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의 존재를 인지하기를 원하시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원하신다. 나의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나의 성공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겠지만 나의 실패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영광받으시기를 원하신다. 나의 처해진 상황에 상관이 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야 말로 우리 믿는 자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요즘 홈페이지가 신앙의 유용한 매개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목회자의 신념과 목회철학이 담겨 있으며, 우리 믿음을 일깨워 주는 유용한 글과 설교가 풍성하게 들어 있다. 사랑과 격려의 글도 있고, 전문적인 식견의 글도 있으며, 불꽃 튀기는 논쟁의 글도 있다. 모난 부분이 다듬어지기도 하고 철을 더 예리하게 만드는 그런 도구로도 사용이 되고 있다. 나는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가능하면 내 역할을 뒤에서 묵묵히 하는 것을 소신으로 삼고 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홈페이지를 묵묵히 관람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리라고 본다. 하지만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 할지라도 기록한다면, 새삼스럽게 나까지 나서야 할 필요가 있나 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교회란 다양한 연령과 다양한 신분과 다양한 재능과 다양한 믿음이 아우러져 있는 공간이다. 나보다 더 연약한 사람들이 있기에 이미 아는 내용이라 할지라도 다시한번 새로운 각도로 바라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일정 수준이상의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면 새로이 믿음을 시작하시는 분들께는 소외되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외람된 글을 기록하였지만 우리 모두가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아기의 믿음에서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해 나가는 장성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나아 가는데 동참했으면 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 수록 흰머리 숫자가 늘어만 가는데 시간이 흘러감에 따른 단순한 흰머리가 아니라 의로운 길에서 얻은 흰머리가 되었으면 한다.
“흰머리를 의의 길에서 얻으면 그것이 영광의 관이 되느니라.” (잠16:31절)
2012-03-24 13:47:13 | 조양교
영원하신 아버지의 사랑!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계심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2012-03-24 10:44:54 | 김정훈
하늘의 만나~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
2012-03-24 10:43:42 | 김정훈
깨진 항아리를 쓰는 주인의 마음씀이 느껴지는
예화입니다. 한없는 따스한 사랑-
주인이신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네요.
내모습 그대로를 인정하시고도 버리지 않는
영원하신 아버지의 사랑이 너무 잔잔하게 느껴집니다.
감성이 풍부하신 형제님 맞네요.
감사합니다.^^
2012-03-24 09:13:54 | 이수영
하루밤 자고 일어나면 글과 사진들, 그리고 댓글들이 하늘의 만나가 내렸듯이 수북히 쌓이네요, 깨어진 옹기 절대 공감합니다.
2012-03-24 08:59:02 | 조양교
카~ 이제 '마력'을 넘어서 '매력'으로.. 앗싸~!
2012-03-24 00:20:35 | 김정훈
그렇지요, 우리는 주님앞에서 모두 깨어진 항아리 입니다!
2012-03-24 00:19:35 | 김정훈
분명 그리 될 것입니다~
2012-03-24 00:18:55 | 김정훈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형제님!
2012-03-24 00:17:58 | 김정훈
별말씀을요~~ 형제님, 전에 올려주셨던 '꽃들의 합창' 참 좋았었는데요.. 언제쯤 다시 또 글 올릴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2012-03-24 00:17:16 | 김정훈
글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깨지고 낡아 못생긴 항아리처럼 부족하고 보잘것 없는 죄인을
이모습 이대로 사랑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내리는 봄비처럼 마음을 (주님의 은혜로) 촉촉하게 적셔주는 아름다운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2012-03-23 23:57:06 | 김상희
아멘!
제 자신의 얘기를 죽마고우 형제님의 글로 보게 되는군요.
2012-03-23 22:40:29 | 차대식
형제님은 창조과학분야와 성경적인 지식과 더불어 이런 감성적인 부분까지 질투가 날 정도로 부럽습니다.
2012-03-23 21:46:22 | 김영익
우리 홈피는 마력을 넘어 매력이 넘치는 것 같아요,,
이래 저래 설전을 해도 주일엔 모두 엎드려 하나님의 얼굴을 모두 구하며
한층 성숙한 자세로 서로를 반기며 건전한 대화로 더욱 친해질 것 같아요...
2012-03-23 17:50:26 | 오혜미
형제님 이 글은 감성으로 읽었습니다...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라는 말도 있는데 묵묵히 부족하더라도 자기자리를 감사한 마음으로 지키면 주님이 필요한 때 다 쓰임으로 족할 날이 있으리라 봅니다..
2012-03-23 17:40:28 | 최현욱
ㅎㅎㅎㅎ 저도 웃으면서 한마디....
차 형제님, 맞아요~~
성철의 말 아무 뜻 없어요.
말 그대로인데 무슨 큰 의미가 있는 줄 고심하는게 불교에서 도 닦는(참선) 일이죠.
참고로 제가 예전에 불교 신자였거든요.ㅎㅎ
2012-03-23 16:11:37 | 김상희
* 오래 전에 어디선가에서 읽었던 글인데, 같이 느껴 보시지요..
조금 깨어져 금이 가고
오래되어 낡아진 약간은 못 생긴
물 항아리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항아리의 주인은
다른 온전한 항아리들과 함께
그 깨어진 항아리를 같이 데려가서
물을 길러왔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 주인은
깨어진 항아리를 버리지 않고
온전한 항아리와 똑같이
늘 아끼며 사용했습니다.
깨어진 항아리는
다른 항아리와는 달리
물을 온전히 담아 올 수가 없는 자신의 모습에
늘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온전치 못하여 주인님에게 폐를 끼치는구나.
그토록 힘들게 구한 물이
나로 인해 새어버리는데도
나를 아직도 버리지 않고 사용하시다니….’
어느 날, 마음에 큰 용기를 내어
깨어진 항아리가 주인께 물어 보았습니다.
“주인님, 어찌하여 깨어진 저를 버리고
새로이 온전한 항아리를 구하지 않으시나요.
저는 이제 별로 소용 가치가 없는 물건일 뿐인데요...”
주인은 그의 물음에 대답대신
빙그레 미소만을 짓고는
그 항아리를 등에 지고
집으로 계속 걸어만 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길을 지날 때 쯤
미소 지은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얘야, 우리가 걸어 왔던 길을 보아라.”
그제야 깨어진 항아리는
주인과 함께 늘 물을 길어
집으로 걸어오던 그 길을 보았습니다.
그 길가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예쁜 꽃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아름답게 피어 있었습니다.
“주인님, 너무 예쁜 꽃이네요!
어떻게 이 산골 길가에
이렇게 예쁜 꽃들이 피어 있는 걸까요?”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메마른 산 길가에서 너의 깨어진 틈으로
새어나온 물을 먹고 자란 꽃들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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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마음속으로 이렇게 같이 기도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 저의 모나고 깨어진 부분일지라도
하나님 손에 붙잡힘 되어
메마른 땅에 꽃을 피우는 도구로
시용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은 봄비가 종일 촉촉하네요~
2012-03-23 16:03:20 | 김정훈
성철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였으면 그만인데....
뭐 헤아리고 할 것이 있나요?
2012-03-23 15:58:45 | 차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