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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요즘 왜?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힘들때가 많았는데 자매님의 글을 읽으며 "다만 우리가 사력을 다해 붙들 것은 주님의 말씀이요 그 말씀의 요새에 굳건히 머물며, 불안에 떨던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신 주님의 평강을 누리며 살아야겠다." 라고 말씀하신 이 부분에 제 셍각을 정리하며 더욱 위로를 느낍니다. 늘 좋은글, 생각할 수 있는 글 올려주셔서 감사 합니다.
2017-11-16 13:03:36 | 이명숙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힘을 주는 말씀입니다. 지나친 염려가 있고/ 인간적인 논리가 하나님의 말씀(복음)위에 작동할 때 그것은 결국 믿음없음을 보여주는 증상이겠지요!!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일 것을 미리 염려하지말고 ... 다만 사력을 다해 붙들 것은 주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100% 공감합니다. 위로가 되는 말씀 감사합니다.
2017-11-16 09:22:35 | 박정수
아이 수능을 앞두고 이렇게 되었지요. 쫄아있는 저에게 주신 말씀이네요. 내일 일은 주님만이 아시니 주께 맡기고 자렵니다. 정신 더 바싹 차리고 맑은 정신 가지고 나아갈게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자매님.
2017-11-16 00:26:31 | 이청원
동감입니다. 생각해보면 오늘을 사는 저에게 염려는 오늘로 족하네요. 내일 염려는 내일에게 맡기고 오늘 심을 사과나무나 심어야 겠습니다. 발등을 찍고 깨달으신 것 치고는 상당히 심오하고 고상하십니다.
2017-11-15 21:50:20 | 이남규
점심을 준비하려고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무언가 떨어져서 내 발등에 내리찍혔다. 악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통증이 느껴졌는데 냉장고 안에 불안 정하게 얹혀있던 음료 깡통이 그 주범이었다. 그런데 그 아픈 순간에 왜 어제 일이 떠올랐을까?  어제 저녁 난 우연히 유튜브에서 2017년에 일어났던 일을 기막히게 알아맞혔다는 어떤 외국 예언가의 2018년도 예언을 보게 되었다. 내용인즉슨 내년 초에 북한 쿠데타가 발생해 김정은이 중국에 망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번 쓱 보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그런데 내가 발등이 찍히는 순간 마음 속에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네가 5분 전에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기나 했냐? 그런데 뭘 내년 일까지 알려고 하니?" 이 일을 빌미로 나는 몇 가지 내 스스로에게 교훈을 받았다. 우리는 영원에로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하루하루를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그 이유는 찬송가 464장의 가사에도 나와 있듯 " l know who holds tomorrow and I know who holds my hand." 누가 내일을 붙들고 계시고 누가 내 손을 붙들고 계심을 알기에! 그래서 하는 말씀인데 이 어두어져 가는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충만한 안식을 누릴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진리를 위해 소수자로 몰리든 대세를 거스르는 자로 몰리든 우리가 받을 핍박을 미리 겁낼 필요가 없고 거짓된 위로에 취해 내일을 장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사력을 다해 붙들 것은 주님의 말씀이요 그 말씀의 요새에 굳건히 머물며, 불안에 떨던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신 주님의 평 강을 누리며 살아야겠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포항시 북구 북구 6킬로미터 규모 5.5 지진 발생" 문자가 뜨면서 앉은 의자가 몇 초 간 흔들림을 느낀다. 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주님의  평강의 약속은 얼마나 큰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참으로 고난 중에 즉시 만날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움직이든지 산들이 이동하여 바다 한가운데 빠지든지 바다의 물들이 큰 소리를 내며 뛰놀든지  그것들이 넘쳐서 산들이 흔들리든지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로다. -시46:1~3
2017-11-15 21:01:23 | 박혜영
50대 형제님들의 모임을 살짝 방문했습니다. 먼저는 각자의 가족 상황과 교회에 더해진 이야기를 짤막하게 나누시네요. -부천 거주, 6년차, 가치관의 변화가 있음. -4월에 아내와 함께 나오기 시작. 그저께 교회와 10분 거리로 이사함. -남양주 거주, 우여곡절 끝에 아내와 두 딸 모두 한 믿음 안에서 감사. -인천 계양 거주, 혼자 나옴. 중학2년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나 암 수술 후 더 하나님을 찾기 시작. 주일학교 교사로 성경을 더 알기 원해 U-Tube 찾기 시작. ‘성경 바로보기’ 접하고 계속 듣다가 성경을 알아갈수록 고뇌가 심해짐. 2017년 여름에 침례 받고 정착하게 됨.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 제대로 믿어야 하는데 성경에 무지했음. 정수영 목사님 ‘교회사’를 들으면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유랑한 믿음의 선진들과 같은 침례교인이 된 것이 자랑스러웠음. -시흥 거주. 2014. 11월에 교회 옴. 가족 중 처음으로 기독교를 믿음.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서 10년 지내는 동안 의문이 많이 생김.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 ‘왜 안하는가?’ 지속적으로 듣고 열심히 성장 중. -영종도 거주, 교회가 추구하는 바에 동감. 우리 교회가 귀하고 소중함. -부평 거주, 온 가족이 다 교회를 섬김. -인천 거주, 15년 마지막 주에 옴. ‘영혼의 등불’ ‘왜 킹제임스 성경인가?’ 종교개혁 이야기 처음 들음. 행위구원에 늘 시달림. 지인들에게 전하지만, 방언, 예지론, 구원 등 언급하면 늘 부딪힘. 지금은 감사하며 생활. -만수동 거주, 루터의 종교개혁은 한마디로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한 것. 지속적으로 설교 말씀을 듣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온유해짐. 신약교회 추구. 두려운 하나님 –진리가 자유하게 함.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알게 됨. 구원 이후 좋은 교회에서 자라야 함. -부천 거주. 9년차. 아내와 두 아들. -인천 거주 0월 17일 교회 옴. -수원 거주. 아내가 U-tube 통해 말씀 듣고 6개월 전에 우리 교회 나오고 방언기도, 부흥회, 새벽기도 부담이 아내와 함께하게 되어 약 두 달 됨. -일산 거주. 아내가 먼저 듣고 이끌려서 왔지만 어느새 온종일 말씀 CD와 함께 함. 지인들에게 흠정역 얘기만 하면 할수록 멀어짐.     *종교개혁 500주년의 의미와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 -박해만 받던 침례교인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야 침례교단을 형성. 우리는 조용히 신앙생활만 하는 교회인가? 세상을 바꾸는 교회인가? -종교개혁 당시와 지금이 비슷한 상황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내교회(전도지)를 사용하면 좋겠다. 종교개혁 500년이기에 합법적으로^^ 카톨릭과 교회를 비교할 수 있는 적기. -성경신자=침례교인, 정치엔 관심 없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 -침례교회가 미국 건국 후 큰 힘을 발휘함. 종교의 자유를 헌법화에 기여함. -하나님을 알 수 없어서 악습 출현. 루터가 95개조 대자보를 한 일이 하나님의 섭리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전 세계에 퍼짐. 지금 시점도 그 때와 비슷- 대각성 운동을 인쇄술 대신 미디어로. 올바른 말씀을 미디어로 효과적 전달. Total Truth, Total church! 딤후 3:16절은 많이 외우지만 중요한 것은 17절에 있음.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함이라“ -타인이 -하는 것을 비판하지 말고, 다수를 비난 하지도 말고, 개인적으로 내가 루터라는 마음가짐이 필요. -루터는 여러 사람이 쌓아놓은 화약에 불을 붙인 역할. 인쇄술로 폭발함. -인간 이성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시대. 이미 종말시기. 내 삶을 통해 가족들 에게 선한 영향력 실천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 -자기 입장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다르다. -직지심경은 금속활자지만, 10권의 한자 책만 인쇄. 구텐베르크는 목판인쇄지만 성경을 인쇄. 인쇄 내용의 엄청난 차이. -착한 아이가 10년 지난 뒤 좌경화된 것을 보고 놀람. 교육의 중요성. 미래교육은 어릴 때부터 해야. -역할이전에 올바른 자세가 필요.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 종교개혁의 500주년과 5솔라 표어 의견.   형제님들이라 분위기가 아주 다릅니다.
2017-11-05 22:54:45 | 이수영
바람이 옷 틈 사이로 들어오네요.오래전에 파수꾼에 관한 시를 쓰다가 말았었는데 오늘 말씀을 보며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족하지만 같이 나누고 싶어서 올립니다. 이사야서 56장10 그의 파수꾼들은 눈먼 자들이요, 그들은 다 무지한 자들이며 다 말 못하는 개들이므로 짖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잠자고 눕고 졸기를 좋아하니 11 참으로 그들은 탐욕이 심하여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개들이요, 깨닫지 못하는 목자들이라. 그들이 다 자기 길만 바라보고 저마다 자기 구역에서 떠나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깨닫지 못하는 목자들...이스라엘의 무책임한 지도자들을 향하여 개에 비유하며 책망한 것을 보며 파수꾼에 대하여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어요. 파수꾼<경계하여 지키는 일을 하는사람><어떤 일을 한눈 팔지 아니하고 성실하게 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입을 열어야할  지도자들을 향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소경, 무지한 자,벙어리라고 하며 이방의 침입을 예언합니다.이사야 56:9 ¶ 들에 있는 너희 모든 짐승들아, 숲에 있는 너희 모든 짐승들아, 참으로 삼키러 올지어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내일도 이 날과 같고 또 더욱 풍성하리라> 말합니다.파수꾼아! /이정자어제도 맑은 날오늘도 맑은 날내일도 맑은 날이려니내일도 이 날과 같고 또 더욱 풍성하리라갑작스런 장대비에 앞도 캄캄뒤도 캄캄올 것은 오고...맑은 날이 있었던가!맑은 날이 있었던가!파수꾼아!파수꾼아!너의 입을 열어다오.(이사야 56장)오늘은 이스라엘의 무책임한 지도자들을 보며 파수꾼과 먼저 믿은 그리스도인을 생각해 봤습니다.디모데후서 4장2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3 때가 이르리니 그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자기를 위해 선생들을 쌓아 두고 4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 낸 이야기들로 돌아서리라.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랄게요.♡
2017-11-05 08:39:07 | 이정자
가을의 선선함이 참 좋네요. 오늘 이사야서 36장을 보며 마음에 와닿아서 묵상한 말씀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이사야서 36:4 ¶ 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제 히스기야에게 말하라. 위대한 왕 곧 아시리아 왕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신뢰하는 이것이 과연 무슨 확신이냐?   과연 무슨 확신.... 오늘은 예루살렘을 포위하며 항복을 독촉하는 아시리아 왕의 질문을 보며 기도의 대상에 대하여 생각하고 기도의 확신에 대하여 묵상하였습니다.   요한1서 5:14 그분 안에서 우리가 가진 확신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무엇이든 구하면 그분께서 우리 말을 들으신다는 것이라.   감기 조심하시고 오늘도 성령 충만한 하루 되시기를 바랄게요.  
2017-10-17 11:31:20 | 이정자
나의 믿음생활은 얼마나 순수하고 간절하게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고 있는지.. 지금 이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내가 해야할 일은 과연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하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7-10-15 12:20:23 | 김상희
샬롬~ 최근에 읽었던 말씀중에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공유합니다.   [본문 : 누가복음8장43-49절]    의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는 이 시대에는 과거에 인간에게 치명적이었던 질병들이  현대에 와서는 어렵지 않게 치료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본문 누가복음 8장]에 등장하는 혈루증 환자 여인의 이야기는 별로 감흥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눅8:43 - 12년 동안 혈루증이 있어서 의사들에게 자기의 모든 살림을 다 갖다 바칠 정도로 치료비로 썼지만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한 비참한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혈루증은 현대 의학용어로 "만성 자궁출혈"로 볼수 있습니다. 여성은 한달에 한번씩 생리기간을 겪게 되는데, 그 기간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여성들에게 상당히 힘든 기간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한 이 여성은 12년 동안 하혈에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죠.  특별히, 레위기15:19-30을 살펴보면 유대인들의 정결례에 따라, 생리기간에 여성은 부정하게 취급받고 그녀가 누운 곳과 앉은 곳, 그 위에 놓은 물건들, 옷가지 등을 만져도 부정하게 취급 당했습니다. 한마디로 생리기간에는 여성은 몸과 마음이 너무도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더욱 힘든점은 레15:25-26 을 보면 생리기간이 아닌데도 피의 유출이 멈추지 않으면 그것이 마칠때까지 그 여성은 한마디로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살아 있지만 식물 인간과 같은 지경에 놓이게 됨을 알수 있습니다. 그녀와 관계된 것들은 모두 부정하다고 하니 어디를 마음대로 돌아다닐수가 있겠습니까? 먹는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가족조차도 율법을 지켜야 하기에 어쩔 도리가 없이 외톨이로 지낼수 밖에 없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상황이 이쯤 되니, 이 여인이 12년 동안 치료되지 않은 혈루병을 치료받기 위해 왜 전 재산을 다 쓸수 밖에 없었는지 심정이 이해갑니다. 그런 그녀는 어느날 예수님(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신 분)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차마 정면에서 그분을 뵐수가 없어서 그분의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단(the hem of his garment)에 손을 댑니다. 옷단(the hem)은 보통 옷의 끝 부분을 의미합니다. 마9:21에 보니 그녀가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온전하게 되리라' 그러자 눅8:44...즉시 그녀에게서 피 나오는 것이 멎으니라.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즉시 역사하여 효력이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일이 생기게 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자부하며 여러가지 일들을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 중에 몇명이나 되는 사람이 이 혈루증을 치료받은 여인과 같이 예수님을 향한 순수하고 간절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제 자신에게도 이 질문을 던졌을때,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에 가슴속 깊이 뜨거운 눈물이 나왔습니다. 혈루증 여인이 치료되는 그 상황속에 수많은 인파가 예수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모습으로 상상해보면, 예수님과 셀카를 찍고, 팔짱을 끼고, 어깨 동무를 하고, 동영상 촬영을 하고...그렇지만 그 수많은 인파 가운데, 혈루증 여인같이...    ' 내가 그분의 옷자락 끝이라도 만지면... 내 힘으로 해결할수 없었던 이 병, 내 전 재산을 유능하다는 의사들에게 다 갇다 줘도 해결하지 못했던 이 고질병, 내 인생을 깊은 어둠으로 몰고가고 비관하며 ...하루에도 수만번 자살하고 싶게 만들었던...이 문제가...예수님께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가져가면 해결될 것이다' 라는 순순하고 간절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단 한사람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한사람을 아시고 그 사람에 대해 궁금해 하시며 관심을 보이십니다.(막5:32...이일을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심) 그리고 그 한사람에게 너무도 사랑스럽게 용기를 북돋고 소망을 심어주십니다. 눅8:48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온전하게 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살 소망이 없던 혈루증 여인에게 예수님은 참 평안을 주시고 이후로 남은 삶의 참 소망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왜 따르며 살아가십니까? 나에게 혈루증 여인과 같은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예수님을 향한 가식없는 사랑이 있습니까?   세상을 보면 점점 악을 향해 치닫고 있고, 현재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안보 등등의 여러 모습들이 하나같이 소망이 없는 모습들로 인해 마음이 어둡고 괴로운 시절이지만...   예수님께 대한 순수하고 간절한 믿음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분께만 우리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요.
2017-10-12 23:43:02 | 오광일
좋은 글 감사합니다. 구약을 읽으며 요즘 우리나라 상황을 대입하여 생각하게 되네요. 분명 하나님의 허락 하에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그럼에도 간절하고 애타는 심정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훈련(?)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 시점에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여야 함과 바른 믿음은 어떤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게 되네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세상 만사에 그에 따른 지식이 중요함을 새삼 실감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지금같이 혼란한 시국에는 적어도 몰라서 속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서서히 데워지는 솥에서 튀어나가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들여다 봅니다.
2017-09-25 06:56:58 | 김상희
가슴 답답했는데 자매님 글 읽으며 같은 생각하며 같이 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생각에 힘이 나고,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하고 계신 주님을 의지하며 또 힘을 내봅니다.
2017-09-23 21:02:02 | 김혜순
  김이수 헌재소장의 임명동의가 국회에서 부결되었을 때, 기도하던 우리는 환호했다. 그러나 곧이어 김명수 대법원장의 임명동의가 가결되자 우리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일희일비의 순간을 겪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하박국처럼 탄식하면서 주께 부르짖는다. “주여, 어찌하여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십니까?”   우리는 분명한 진실에 마주치게 된다. 모든 기도가 다 응답되는 것은 아니라고. 내가 주의 말씀에 따라 의로운 일을 위해 기도한다 해도 주로부터의 대답이 분명히 “No!"라고 거부될 때가 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하박국처럼 무척 당황하게 된다.   그런데 하박국은 이 엄연한 현실 앞에 어떻게 했기에 나는 여전히 주를 기뻐하고 노래한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을까? 내우외환 속에 파멸이 훤히 내다보이는 현실에서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했을까? 부럽기까지 한데, 우리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그에게서 발견하고 위로를 받는다. 그런데 그런 위로에는 전제가 필요하다.   나에게 하박국처럼 지금 현실에서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부르짖는 심정이 있는가? 그냥 현실에 만족하면서 내게 직접적인 위해가 가해지지 않는 이상 골치 아프게 그런 문제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하박국의 고백은 결코 나의 고백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박국 그는 진지하게 솔직하게 기도한다. 당장 응답 없는 기도라 할지라도 끝까지 하나님 왕좌 앞을 떠나지 않는다. 기도에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나가는 일, 그래서 어떤 분은 기도를 노동이라고 표현했을까?   이런 그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이 온다. 현실은 하나도 바뀌지 않는 응답. NO라고 불릴 수 있는 응답이 온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영 현실성이 떨어지는 응답. 당장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응답이 온다.   옛날 욥의 그 수많은 질문에 일일이 응대하지 않으시고 대답하시던 하나님의 방식 그대로 하박국에게 현실에 대한 답이 아닌 아주 먼 미래, 역사의 종결을 보게 하시고 생각하게 하신다.   더딜지라도 하나님의 시간표에 분명히 정해져 있는 그 계획대로 이루어질 응답을 생각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결국 하박국의 고백의 동력이 된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본다. 하박국이 최종적으로 주님을 기뻐하고 그분을 노래할 수 있기까지 주께서 하신 응답에 완전히 동의하고 순종하고 결단하기까지의 그 시간들을. 내 시간에 내 방법대로 응답해 달라는 자기중심적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완전한 섭리에 굴복치 않으려는 자아의 교만을 꺾기까지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해 본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하박국의 다른 하나의 결단이 결국 주를 기뻐하고 노래한다는 그의 위대한 고백의 배경이 된다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곧 “비록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올리브나무에 수고의 열매가 없고 밭이 먹을 것을 내지 아니하며 우리에서 양 떼가 끊어지고 외양간에 소 떼가 없을지라도” 하는 철저한 고난 가운데 내가 처해진다 해도 나는 그것을 감당하겠다는 결연한 결단 말이다.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말씀을 붙들고 더딜지라도 반드시 이루게 될 주님의 심판의 날을 바라보며 지금은 그 어떤 악한 상황에서도 견디겠노라 하는 결단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박국의 찬양으로 터져나온 것이리라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심판의 시점은 우리의 그것과 너무도 다르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정의가 세워지지 않으면 우리의 죽음과 함께 정의가 묻히므로 어떻게든 살아 있는 동안 불의가 심판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렇지 않을 경우 억울해 하고 조급해 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최후에는 다 밝혀주고 심판하겠다고 하셔도 “그건 너무 먼 미래입니다!” 하면서 현실성이 없고 자기와는 무관한 말씀이라고 여기기까지 한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먼 미래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 드러나리라는 것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밝히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보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믿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 아마도 하박국은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는 의미를 이해했으리라.   우리는 하박국에 비해 연약해도 한참을 연약한 자들이기에 우리는 하루하루를 성령님께 의지하며 도우심을 구하며 나갈 뿐이다. 우리가 하박국처럼 주님을 나의 기쁨으로 삼을 때 또 그와 같이 우리도 외칠 수 있으리라.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니~나를 나의 높은 곳들에서 다니게 하시리로다!”
2017-09-23 14:18:32 | 박혜영
18. 징벌하지 않는 하나님 영화 “오두막”의 하나님은 어떤 악인도 징벌하지 않는다. 맥이 엘루시아에게 “누구를 유독 싫어하느냐?”고 묻자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한 번도 징벌한 적이 없다”라고 말한다. 이미 죄책감만으로도 충분한 벌이 되므로 달리 벌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있으라!”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죄 없으라!” 는 한 마디면 죄도 없앨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죄를 용서는 해 주셨지만 그 대가를 인류 대대에 지불하도록 하심으로 하나님의 질서를 세워나가셨다. 용서를 남발하면 영적 모럴헤저드가 발생해서 이 세상은 지금보다도 더 크고 흉악한 죄로 가득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죄에 대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따를 것을 명시하고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이 영화는 하나님의 양면성인 공의와 사랑에서 균형을 잃고 사랑을 강조하고 심판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반쪽짜리 하나님을 보여준다.    19. 죽은 자를 만날 수 있는가? 맥은 동굴 입구에서 흐르는 폭포수에 몸을 씻고 천국의 모습을 환상으로 본다. 미시가 꽃이 가득한 들판에서 다른 아이들과 예수님과 함께 천진하게 뛰어놀고 있다. 맥은 즐겁게 잘 지내고 있는 미시를 보고 안도감을 느끼고 행복감에 젖는다. 성경은 죽은자에 대한 참된 위로는 부활을 믿을 때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그 나라에서 분명히 만날 것이고 부활한 몸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랑했던 사람들과 함께 다시는 죽음이 없는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엘루시아는 누구나 고통을 면할 수는 없으며 죽음은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라고 말했지만 성도에게는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권세가 있고, 영생의 길이 주어져 있다. 이 영화는 모든 이의 참 소망이 되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침묵한다는 점에서 아쉽다.  엑스터시를 경험한 맥에게 예수가 어땠느냐고 묻자 맥은 테러블하고 원더풀한 경험이었다면서 미시를 볼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대답한다. 그날 밤 성부 성자 성령은 맥을 데리고 들판으로 나간다. 사라유가 맥의 눈을 쓰다듬자 맥의 눈이 열려 영혼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무수한 언어와 종족, 나라에 속한 영혼들의 성격과 감정이 온갖 색깔과 빛으로 나타나 보인다.  그때 저쪽편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온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맥을 보고 끌어안더니 “정말 미안하다. 내가 눈이 멀어 널 제대로 못 보았다. 널 용서하마.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자기를 살해한 아들을 쉽게 용서한다. 맥은 어설프게 포옹하며 화해를 한다. 아버지의 영혼은 “나중에 또 보자”하면서 사라진다.  죽은 자의 영혼과 산 자가 만나 교류하는 것은 뉴에이지적인 설정이다. 성경은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죽으면 즉시 그 영혼은 낙원이나 음부로 떨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된다는 설정은 무의식적으로 심령술이나 영매의 활동을 부추기며 심판의 즉각성과 엄중함을 흐릴 위험이 있다.   20. 무조건 용서가 가능한가? 맥이 아버지와 화해한 후에는 파파가 인디언 할아버지로 변신해서 등장한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데 이 장면은 경우에 따라서 변하는 분으로 왜곡된 인식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하나님 아버지를 양성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모습으로 형상화해 표현하고 있는 영화적 한계에서 비롯된 위험성이다.  파파는 맥과 함께 아이의 시신을 찾으러 간다. 파파는 맥에게 “나를 믿고 옳은 일을 하라. 최선이 뭔지를 깨우치라. 그의 목덜미를 놓아주라. 내면의 고통이 자신을 옭아매고 기쁨을 빼앗아가 사랑할 능력을 잃게 된다” 라고 말하면서 너 자신을 위해 그 자를 용서해 주기를 권한다.  맥이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항거하자 또 다시 심판자가 되었느냐고 묻는다. 그도 내 자식이라 그도 구원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나는 너를 용서한다”를 반복해서 자꾸 외우면 용서가 될 거라고 말한다. 맥은 번민 속에서 자기 손 안에서 살해범을 상징하는 무당벌레를 죽이려다가 살려서 날려보낸다. 맥은 딸의 시신을 안고 돌아오면서 여러 차례 그 말을 반복하면서 범인을 용서한다.  “나는 너를 용서한다”는 말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면 용서가 된다는 것은 바알신앙적이고(왕상 18장), 주술적이며 샤머니즘적인 세계관이다. 힌두교나 샤머니즘 등의 바알 신비주의에서는 말 자체가 능력이 있어 말로 신의 힘을 끌어낼 수 있다고 본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용서는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친히 보수하실 때 비로소 용서가 된다. 내가 엄청나게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아빠가 박애정신을 가지고 내가 그 애도 사랑하니까 무조건 용서하라면 말이 안 된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라. 아빠가 그 녀석 혼내줄게.” 이래야 그 애를 나중에 혼내 주어 내 억울함을 풀어줄 정의의 아빠를 믿고 간신히 눈물을 그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한 것은 맥 자신도 아버지를 간접살해한 살인자가 아니던가? 나는 아버지를 살해해도 되고 내 딸은 누가 살해하면 안 되는가? 자기가 누구를 용서할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용서받을 자리에 있는 자라는 것을 깨달을 때 인간은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죄를 죄가 아니라 상처라고 말하기 때문에 치유의 장면은 나오지만 맥이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는 회개의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용서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기도하거나 말씀을 읽고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는다거나 하나님에게 원수 갚는 것을 의탁하며 자유를 얻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영화 “오두막”에는 영적인 치열함이 없다.    21. 말씀과 체험 이 영화는 체험에 비해 성경말씀을 중요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에서 성경책이 딱 한 장면 나오기는 한다. 맥이 서랍에서 성경책을 꺼내 침대에서 누워 보려고 하다가 잠이 들어 스르르 성경책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리고 침대가 붕 뜨면서 환상을 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어떤 꿈이나 환상의 체험이 말씀을 압도하는 이미지의 그림이다. 성경은 체험을 중요시하지만 그 어떤 체험도 성경 말씀 위에 두지 않는다. 한순간의 체험이 그 후의 삶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삶을 변화시키고 성화되어 가는 것은 체험이 아니라 말씀의 힘이다. 그런데 “오두막에서는 어린 맥을 정죄할 때 외에는 성경구절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바로 세워나가는 데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  사도바울은 3층천에 다녀오는 최고의 영적 체험을 하고도 14년간이나 침묵했다. 체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체험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바울이 그것에 대해 침묵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맥처럼 무언가 눈으로 보고 듣고 만져지는 영적인 체험을 원하지만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후로 지금은 계시가 다 열려 말씀으로 완성된 시기이다. 그래서 말씀으로 응답하시고 역사하시는 시대이다. 그래서 누가 무슨 꿈을 꾸었다, 환상을 보았다, 직통계시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한다. 이미 계시되어 완성된 성경 말씀만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다.    22. 나비 파파는 미시의 죽음을 상징하는 붉은 색깔의 표시가 있는 돌을 치우고 미시의 시신을 찾아주어서 예수가 짠 관에 넣어 장례를 치르게 해 준다. 이런 의식은 부모의 한을 풀어주는 일이다. 몸은 한 때 영혼의 장막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님의 재림날 육이 부활한다는 점에서 비록 시신일망정 엄숙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목수인 예수가 만든 관에 나비문양이 많이 새겨져 있다. 정원을 파고 관을 내려 미시를 묻자 사라유는 눈물병을 열어 그 관 위에 치유의 눈물을 몇 방울 뿌려준다. 그것은 맥이 그동안 흘린 눈물을 성령이 모아둔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그 땅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큰 나무가 쑤욱 자라나온다. 그때 제왕나비가 나타나 맥의 얼굴을 터치하고 무수한 나비들이 온 정원을 뒤덮는다. 나비들은 환생을 의미한다. 제왕나비는 마인드컨트롤의 대표적인 심벌이다. 근래에 케이팝 아이돌의 뮤직비디오에 가수의 마인드컨트롤 장면과 나비들이 자주 등장한다. 나비가 갖는 상징성을 생각할 때 연출상의 아쉬움이 남는다.    23. 인간은 우주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성부성자성령은 맥에게 여기에 남아서 당장 미시를 볼지 남은 가족에게로 돌아갈지 선택하라고 말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다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말한다. 파파는 맥에게 “네가 사랑하고 용서할 때마다, 너의 친절한 행동 하나하나가 우주를 더 낫게 변화시킨다. 한 가지라도 상관이 있으면 다 상관이 있다. 어느 하나라도 중요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네가 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네가 중요하다. 모든 친절과 봉사를 통해서 네 목적은 이루어지고 어느 것도 예전 같지 않게 된다”라고 말한다.  중국 베이징에 있는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훗날 미국 뉴욕에 폭풍을 가져온다는 ‘나비효과’처럼 나의 작은 행동이 우주와 연결되어서 우주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를 신으로 보고, 그 우주와 하나인 인간도 신적인 존재로 보는 뉴에이지 세계관을 반영하는 말이다. 그래서 “네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도 우리 한 영혼이 우주보다 귀하다고 말씀한다(막8:36-37). 그러나 내가 우주의 중심이며 우주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라서 중요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철저하게 무능하고 연약한 존재이다. 성경은 인간의 행위로 세상이 바뀐다고 보지 않는다.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을 때이다. 자기의 선행과 용서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용서조차도 그분이 하게 해 주셔야 할 수 있는 것이다.    24. 해피엔딩 이렇게 해서 맥은 지상의 세계로 돌아온다. 눈을 떠 보니 병원이고 친구 윌리가 곁을 지키고 있다. 금요일에 차를 빌려서 갈 때 40톤 트럭에 받히는 교통사고가 난 것이다. 맥은 오두막에 가지 않았다. 꿈을 꾸었던 것이다.  맥은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딸 케이시에게 “내 슬픔 속에서 허우적대느라고 네가 이기도록 돕지 못해 미안하다. 지나간 건 생각하지 마. 나도 이제야 털어내는 법을 배워가고 있거든. 우리 함께 배워나가자”라고 말한다. 가정은 회복되고 관계도 회복되고 예전의 평화가 찾아온다. 정말 환상 한번 본 것 갖고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되고 기복 없이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는지는 의문이다.  영화는 윌리의 시각에서 자기 친구 맥이 그 경험 후로는 거의 매일 심오한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남을 빨리 용서하고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는 형식으로 끝난다. 이 영화가 주장하는 대로 맥의 용서와 친절한 행동으로 인해 우주가 어떻게 변하는지까지 다루었더라면 더 친절하고 신뢰도 높은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25. 사람들은 왜 힐링에 집착하는가? 영화 “오두막”의 하나님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놓여나게 하고 기분 좋게 해 주는 하나님이다. 3위 혹은 4위의 신이 총동원해 한 사람의 내면의 상처를 치료한다.  사람들이 힐링에 집착하는 이유가 뭔가? 내 고통을 제거하고 평안과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나를 가장 위해주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내 힐링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에게 집중해 있고 자기가 중심에 있고 자기가 우상이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다.  그런데 자비의 하나님이 죄로 인해 상처 가득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일시적인 힐링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힐링을 넘어 구원까지 가야 한다. 예수님에게 치유 받은 사람은 많으나 다 영혼의 구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힐링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그러나 구원은 꼭 받아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이용해 치유받고 평안을 얻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을 얻는 구원의 종교이며, 자신을 힐링하는 것이 아니라 킬링하며 자기로부터 눈을 떼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는 종교다.  영적 성숙을 위해서 쓴뿌리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힐링에 집착하는 것은 이제 와서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과거와 셀프에 집중하게 만들어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만들 위험이 있다. 기독교는 미래지향적이고 하나님중심적이고 타자중심적이다.  주인공을 오두막으로 보내는 설정은 사람이 상처를 치유받으려면 억압하지 말고 직면하라는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서도 보면 사람이 죄를 오래 덮어두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서서 만 천하에 다 까발리신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오두막에 가야만 하나? 과거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서는 상처 입은 과거의 그 현장으로 거슬러 되돌아가서 해야 한다는 것은 최면요법적 치료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맥이 잠 못 이루며 고통을 받는 것은 아버지를 간접 살해한 죄책감 때문이었는데 왜 자기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도 한 장소에서 생긴 그 깊은 상처는 왜 유년기의 자기 집으로 가서 치료하도록 설정하지 않았을까?    26. 고통의 의의 파파가 맥에게 “고통이 없는 세상을 원하느냐?”고 묻자 맥이 “그렇다”고 답변한다. 파파의 말대로 그런 세상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이 싫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고통을 제거하라고 말하지 않으며 그 고통의 원인인 죄를 제거하라고 말씀한다. 그게 구원의 길이며 고통을 종식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끝없는 인생에서 한 가지 고통을 해결하는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성경은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셀프가 아닌 하나님에게 집중하라고 말한다.  고통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이다. 고통은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죄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은 신 중심적 세계관이다. 죄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하나님 한분만 바라보면서 구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한 무수한 사례들이 등장한다. 이해할 수 없으나 성경에 따르면 고통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하나의 방법이다.  고통을 받으며 인간은 비로소 고통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며 완전한 구속의 그날을 꿈꾼다. 고통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알고 신 앞에 겸허해진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시고, 고난을 통과한 자에게 존귀로 옷 입히신다. 그런 점에서 고난은 영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고통은 당사자에게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아가는 기회가 되고 그것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기회가 된다.  우리의 시선이 우리 자신에게 머물러 있으면 외부, 즉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구원을 보지 못하게 된다. 성경은 우리의 중심축이 자기로부터 타인과 하나님으로 이동하기를 촉구한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셨다. 우리가 영육간에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보다 주님이 더 원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치유 자체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궁극적 골(goal)은 아니다.  인생이 얼마나 연약하며 치료가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시고 구하게 하시고 응답하심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치료자되시고 구원자 되심을 경험적으로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나 개인을 치유하신 주님의 이름을 공동체에 전하게 하심으로 나를 통해 공동체를 치유하시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개인과 가족에게만 시선이 머물러 있어 나와 가족만 행복하면 다 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는 몸과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해서 상처를 입으신 주님은 우리에게 너도 남을 위해 상처를 받고, 네 상처로 다른 상처 입은 사람들의 영혼을 보듬어주고 섬기면서 살라고 말씀하신다.  나를 위해 상처 입으신 주님을 바라보며, “나도 상처가 있는데 쯧쯧, 너도 상처가 있구나” 하면서 다른 상처 입은 사람을 긍휼한 마음으로 품고 가다보면 어느 새 상처가 낫고 새 살이 돋으며 그 상처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영광이 된다. 고통을 통해 인간은 정금 같이 단련되고 영적으로 성숙하고 강인해진다.    27. 샤머니즘화된 기독교 영화 “오두막”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인간과 늘 함께하면서 내면을 치유하는 하나님이다. 그것은 성경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로 삼고 나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도구로 삼는 것은 기복주의적인 샤머니즘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요한다.  기복신앙이란 신의 힘을 빌려 현세의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 모든 형태의 신앙을 이른다. 남들은 이것저것 있는데 내게는 그게 없는 것이 고통이므로 신의 감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치성을 드리며 자꾸 복을 달라고 비는 것이다. 만약 나의 고통을 없애기 위한 치유의 수단과 방편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게 기복신앙이다.  뉴에이지는 종교 자체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종교를 인간의 필요와 상황에 따른 치료방법이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수단화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먼저 추구할 때 결과적으로 모든 영육간의 축복이 따라온다고 말한다.    28. 환상은 죄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맥이 살아오면서 받은 깊은 상처는 그것뿐이었나? 맥이 치유 받고 변화된 삶을 살아갔다고 하지만 그 후로 행복하기만 했을까? 인생이란 것이 고난의 연속인데 그다음에 또 상처를 깊이 받으면 그때는 어떻게 치료할까? 또 그 장소에 가서 환상을 통해 4위 하나님을 만나야 할까?  죄로 인해 생기는 문제들이 환상을 한번 보면 일시에 해결될까? 인생의 모든 문제는 죄로부터 시작되며 그 죄 문제가 예수님을 만나 해결되지 못하면 그는 참 평강을 누릴 수도 없고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맥의 죄를 죄라고 말하지 않고 ‘치유 받아야 할 상처’라고 말한다. 상처라고 한다면 그건 치유의 영역이지 회개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 상처의 치유는 죄 문제를 회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데 맥은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개의 기도를 드린 적이 없다.  성경은 인간의 치유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나의 죄와 질고를 대신 담당해서 죽으셨음을 믿을 때 일어난다고 말씀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29. 총평 저자는 선교사이던 아버지의 율법적이고 정형화된 신앙교육에 대한 반작용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직된 사고방식을 가진 편협한 신앙인들이 좀 더 폭 넓은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성경을 다양하게 변주하는 과감한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아버지에 대한 반발과 여성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일면 이해는 간다. 그러나 해석의 논란을 일으킬 여지가 많은 영화다.  판타지는 포스트모던적이라 초월적 세계에서 인간이 갈망하는 어떤 것도 다 성취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에 현실의 억압에서 해방시켜주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한다. “오두막”은 판타지 영화로 현실세계에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경험하게 해 관객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해 주기는 하지만 대증요법적인 진통제 기능을 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면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잠시 위로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인생의 근본 문제를 치유하지는 못한다.  이 영화는 개인과 여성과 주관을 중시하고, 모든 진리에 대해 관용적이며, 기존의 모든 권위와 질서를 해체하는 포스트모던 세계관의 영향으로 기존의 신학체계를 뒤집고 허용치를 넘은 주관적인 해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려가 된다. 주관이 중시되는 이 시대에 성도들은 내가 믿고 싶은 하나님을 믿는 위험에 자주 노출된다.  이 영화는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으시고 영이시며 우주보다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만져지고 보이는 형상으로 축소하고 제한한다. 그래서 우주에 충만한 신성의 경외감을 제하고, 아주 능력 없고 만만하게 여기고 사람의 마음대로 부리며 우상화할 위험이 있게 만든다.  엘루시아는 여자이면서 자기를 ‘파파’라고 부르라고 해 젠더상의 혼란을 일으킨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을 서로 뒤섞고, 4위의 신격을 제시해 삼위일체 신학에 혼란을 일으킨다. 하나님을 여성화해 엄마같이 자애롭고, 친구 같이 친밀한 하나님을 제시함으로써 진노를 제하고 공의와 사랑의 양면성을 지닌 하나님에 대해 균형감을 잃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영광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연적인 고난을 제거할 문제로 바라보게 만든다. 내가 우주의 변화의 단초가 되기 때문에 내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존재이며,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나의 고통을 제거하는 내적치유가 중요하다고 여기게 만들며, 하나님도 치유의 수단으로 대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시킨다.  그리고 개인을 중시하고 공동체에는 무관심하게 만든다. 나는 맥이 정말로 거듭났다면 딸을 잃은 자신의 아픔으로 다른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영혼을 섬기는 일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를 믿는 믿음보다는 우주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용서, 선행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왜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방치했느냐면서 성부를 공격하고 정죄하기 위해 예수의 죽음은 언급하고 있지만 우리의 모든 소망인 예수의 부활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쪽짜리 예수를 보여준다. 그리고 어떤 죄도 다 무조건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무효화하고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아예 불필요하게 만든다. 성경은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끝나는데 이 영화는 예수님에 대해 충분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참 많다.  영화 ‘오두막’에서는 성부 하나님을 뚱뚱한 흑인 여자나 인디언 느낌의 할아버지로, 성자 예수님을 아랍인 남자로, 성령님을 아시아인 여자로, 지혜의 여신을 백인 여자로 형상화하여 모든 인종을 등장시켰다. 이들이 일체로 묘사되는 점으로 보아 초인종적인 평화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뉴에이지 영성은 다원종교적, 종교혼합적, 보편주의적 구원을 주장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더 잘 알게 되고 예수님을 더 잘 믿게 되었을까? 만약 예수님이 이 영화를 보셨다면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2017-09-11 18:31:58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