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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 때 새해에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이다 여기며 떨리는 손으로 책갈피를 뽑았던 일이나, Q.T를 하며 나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시 하던 옛 모습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마지막 말씀이 참 중요한 핵심이네요.
2013-07-24 01:50:11 | 김경민
이 글은 원래 김문수 목사님이 쓰신 것인데 최근에 출간을 위하여 허락을 받고 제가 조금 내용을 추가하였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보는 지혜가 있으니 잘 보시고 큰 평강을 누리기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                  “성경 해석이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정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해석 방법은 일반적으로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일차적으로 본문 내에서 문법적 해석을 바르게 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 말씀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수신자, 기록 목적 등을 살펴보며 역사적 해석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문법적, 역사적 해석이 먼저 바르게 된 다음에라야 거기서 올바른 신학적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위의 내용은 지금으로부터 약 14년 전에 저와 함께 성경을 공부하던 분들로부터 얻어들은 내용입니다. 당시 그분들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분들이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성경 신자들(Bible believer)과는 일부 견해가 다를 수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성경 말씀은 일차적으로 그 문맥 안에서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는 데에는 입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저는 한창 Q.T.를 열심히 하면서 “이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주는 개인적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관점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경 말씀에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개인적 의미(사적인 해석)’를 발견하는 데에 몰두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신명기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가 신명기 26장 12절에서 아주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개역: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신26:12) 그것은 지금 나에게 있어서 신명기 26장 12절에서 말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누구인가, 나는 누구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한 끝에, “객(나그네)은 하늘나라를 영원한 본향으로 두지 못한 자요, 고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자요, 과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시지 못한 자다.”라는 (그 당시로서는) 참으로 기발한 생각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적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묵상을 통해 깨달은 바를 함께 성경 공부하던 분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다른 분들이 이런 묵상에 대해 칭찬을 하지는 않더라도 동의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것은 성경 말씀을 ‘영해’하는 것이라고 지적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의 말에 의하면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읽지 않고, 자꾸 거기에 무슨 오묘한 뜻이 있지 않나 생각하고 영적인 의미만을 찾다보면 결국에는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지 못하고 말씀을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맨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일차적으로 본문의 문맥 가운데서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는 조언을 듣게 된 것입니다.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의 의미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문법적 해석 이것은 성경 본문의 문맥에 맞추어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택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다고 말씀하시면(창1장; 출20:11), 그것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6일간의 창조’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엿새 동안에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읽고 받아들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간혹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6일 만에 어떻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느냐? 60만년이나, 6억년이 아니겠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충분히 그렇게 하실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분명히 ‘six days’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6일’이라고 이해합니다. 만약 그 기간이 60만년이었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는 데 60만년이 걸렸다.”라고 기록하셨을 겁니다. 요한계시록 20장 2~7절에는 한 절마다 한 번씩 ‘천 년’이라는 단어를 써서 분명히 천년왕국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저는 이것 역시 문자적으로 천 년이지, 막연히 추상적으로 ‘오랜 기간’이나 ‘영원토록’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 절에서 ‘천 년 동안’, ‘천 년이 끝날 때’, ‘천 년이 다 차매’라고 기록하여 그 기간이 유한한 기간으로서의 천 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단어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자적 해석은 물론, 시제, 태, 단수/복수 등에 대한 문법적인 검토, 수사법(직유/은유/시적표현), 비유 등도 함께 고려하여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문법적 해석이 반드시 글자 그대로의 경직된 문자적 해석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는 신자들을 조롱하는 자들은 “성경이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다.”, “시편에서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위다.”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며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법적 해석에는 이런 수사적 표현에 대한 고려도 포함됩니다. 즉 성경에 나타난 명백한 비유나 수사적인 표현까지 억지로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안 됩니다. 누군가가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기대면서 “당신의 가슴은 푸른 풀밭이오.”라고 말하면, 이것은 그의 품이 편안하고 아늑하게 쉴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지 그 사람의 가슴 피부에 진짜로 풀이 자라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어린양’(요 1:36)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진짜 짐승입니까? 시편 기자가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시18:2)라고 했는데, 정말로 하나님이 돌덩어리입니까? 이렇게 문장의 수사법을 고려하지 않는 경직된 문자적 해석은 잘못된 것이며, 이런 것을 가리켜서 문법적 해석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문법적 해석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에 어떤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문장의 시제나 능동태/수동태, 명령문/수사의문문/평서문, 전체 문맥 속에서 문장들 간의 관계 등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1) 단수와 복수 문제 성경을 읽을 때 단수와 복수를 잘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단수와 복수의 구별이 중요하다는 것을 갈라디아서 3장 16절을 통해 직접 보여 줍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실 때 ‘씨들’(seeds)이라고 하지 않고, ‘씨’(seed)라고 단수로 표현하셨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3:16).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라고 하셨는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us, our)라는 복수형을 사용하셨는지, 성령의 열매(the fruit of the Spirit)는 아홉 가지인데 왜 단수의 ‘fruit'으로 표현되었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죄(sin)/죄들(sins), 하나님(God)/신들(gods), 주(LORD, Lord, lord) 등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개역성경 역자들이 거의 대부분의 중요 단어들을 번역하면서 단수와 복수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2) 시제의 문제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단번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금 많이 내고, 종교의식에 잘 참석하면 나중에 구원을 준다는 이야기나, 우리가 죽은 다음에 혹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끝난 후에야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없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5:24). 요한복음 5장 24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현재 영존하는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죄의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에 미래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되어도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믿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수동태,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그것이 이미 완료되어 계속적으로 효력을 미침)고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교인들을 일평생 교회에 묶어두기 위하여 구원이란 계속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며, 믿는 자들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제에 유의하여 성경을 읽으면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자의 구원은 확정적이며,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성경을 읽다보면 동사의 어미에 -th, -eth가 붙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이 고어체 스타일의 표현이라고 싫어하는데, 이것은 3인칭 단수 현재 시제라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한 것이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에 주의하지 않고 대충 읽고 번역하면 개역이나 한글킹제임스성경처럼 스가랴서 3장 2절을 엉터리로 번역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별도로 소개하겠습니다. (3) 명령문/평서문/의문문 성경을 읽을 때, 그 문장이 명령문인지, 평서문인지, 의문문인지, 수사의문문인지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종종 설교 시간에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라!”, “너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라!”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취지는 저도 이해를 하지만, 문제는 성경 말씀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뒤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나를 위한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사도행전 1장 8절은 “너희는 증인이 되어라!”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성령님께서 임하신 뒤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한 증인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님께서 믿는 자 안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주시고, 우리를 그분의 증인으로 사용하신다는 뜻이지, 우리가 전도 훈련을 받아서 증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는 땅의 소금이로되 만일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리요? 그 뒤에는 그것이 아무 쓸모없으므로 버려져서 사람들의 발밑에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산 위에 세운 도시가 숨겨지지 못하리라(마5:13-14). 마태복음 5장 13~14절 역시 “너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라!”라는 명령문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 ‘소금이요, 빛이다’라는 사실 진술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소금이라면 자연히 맛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려고 어떤 노력을 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빛이면 저절로 그 환한 광채는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어둠을 물리치게 됩니다. 빛은 원래 밝고 퍼져나가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빛들로서 빛날 뿐(ye shine as lights, 빌2:15), “빛이 되어라!”는 도덕적 훈화 말씀처럼 빛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반면 고린도전서 16장 13절이나 에베소서 5장 18절은 명령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 역시 이를 주님께서 주신 명령으로 읽고 이해해야 그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4) 문맥의 중요성 제가 선교단체에서 활동할 때, 매일 아침 선교회 회원들이 모여서 그 날 묵상한 말씀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한 형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시편 5편 6절을 읽었는데 하나님은 피 흘리기를 즐긴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어린양의 피를 즐기셨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수많은 가나안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셨고,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피 흘리는 것도 즐기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다른 형제들은 부분적으로 뭔가 공감하는 듯 하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매우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개역과 흠정역으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개역: …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시5:6)흠정역: … {주}께서는 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를 몹시 싫어하시리로다. 그 당시에는 다들 개역성경을 사용하던 터라 끊어 읽기를 잘못하면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와 같이 읽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형제가 그 앞에 나오는 “주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시5:5)라는 말씀을 함께 읽었더라면 이런 오해는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자들은 문맥을 무시하고, 성경 본문에서 자기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부 내용만을 추출하여 제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There is no God.”(시14:1)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있는 자는 더 받아 풍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자기에게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된다”(마13:12)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의 병폐라고 할 수 있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설명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처럼 자기 입맛에 맞게 끼워 맞추기 식의 해석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그들은 부패하여 가증한 일들을 행하였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시14:1). 있는 자는 누구든지 받아서 더욱 풍성하게 될 터이나 없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에게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13:12). 제가 글을 쓰면서 여러 참고 구절을 인용하거나 종종 전후 문장의 흐름과 맥락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이런 문맥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나 마태복음 16장 28절에 나오는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라는 말씀도 전후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2. 역사적 해석 역사적 해석이란 역사적인 시대나 그것이 기록된 배경과 목적, 수신자, 당시의 생활풍습 등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문맥에 맞게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네가 취할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는 다 네 사방의 이교도들 중에서 취할지니 너희는 그들에게서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를 살지니라(레25:44). 레위기 25장 44절은 그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는 계급 사회였기 때문에 왕, 귀족, 평민, 제사장, 노예라는 신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제도 속에서 살 때 마땅히 지켜야 할 규범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에 글자 그대로 적용하여 자기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노예로 사고팔고 하면 안 됩니다. 레위기 11장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지 말 것에 대한 규례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레위기 11장 7절에 의해 돼지갈비나 삼겹살은 먹으면 안 되고, 레위기 11장 12절에 따라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 속 생물들(오징어, 굴, 해삼, 전복 등)은 가증하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처럼 어떤 짐승들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들 짐승들이 이교도들의 우상숭배와 연관된 것이거나, 전염병을 옮기는 것이거나, 이스라엘의 더운 날씨에서는 쉽게 부패하고 변질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약 시대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저런 음식물에 대한 규례가 적용되지 않으며, 우리는 디모데전서 4장 3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만드신 음식물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고 명령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사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게 하셨느니라(딤전4:3). 성경에 나오는 할례나 안식일에 대한 규례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택하신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이지 우리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으면서 이 말씀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잘 구별해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사내아이는 다 할례를 받을지니 이것은 나와 너희와 네 뒤를 이을 네 씨 사이의 언약 곧 너희가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17:10).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로 내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그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있을 표적이니 이것은 내가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니라(출31:13)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만, 각 세대별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루시고 경영하시는 경륜의 방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어느 세대에 속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신약교회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바르게 나누어서 이해해야 합니다(딤후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역사적 해석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이 성경 말씀은 누구를 위하여, 어느 시대 사람들을 향하여, 어떤 목적으로 기록하셨는지를 함께 공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하늘의 왕국과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왕국이 어떻게 다른지, 4 복음서는 수신자와 기록 목적, 배경 등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믿음과 행위에 대하여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는지 등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법적 해석뿐만 아니라, 역사적 해석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기록된 당시의 역사, 문화, 기후, 풍습, 제도 등에 대해 공부를 해 두면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맛 잃은 소금(마5:13),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요10장), 친족의 상속 재산을 대신 물러주는 제도(룻기4장), 형사취수 제도(창38장), 이스라엘의 달력과 주요 명절, 지역별 기후와 특산품, 유대인들의 식사예절 등도 알아두시면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 외에 성경에 등장하는 동물, 식물 등에 대해서 공부해 보는 것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래에 나오는 신학적 해석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찾는 해석이라기보다는, 그 말씀을 각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3. 신학적 해석 신학적 해석이란,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 가운데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해석은 다소 복잡하고 사람들마다 어떤 신학적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성경 기록자가 최초로 성경을 기록한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차적인 성경의 독자들(수신자들)이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을까를 생각해보며, 이에 근거하여 그 말씀이 오늘날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묵상하여 적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명기 17장 18-20절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는 {주}의 말씀을 필사하여 평생 옆에 두고 읽으며 그 말씀을 따라 행하라”는 내용을 발견하고 마음속에 성경 말씀을 읽어야겠다는 동력이 솟아나서 성경을 읽기로 결심했다고 합시다. 그는 이미 여러 권의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데 문자 그대로 성경을 다시 필사해야 할까요? 혹은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에게 해당되는 규례이지 나는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왕도 아니므로 나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하시겠습니까?  문법적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구약시대 이스라엘 왕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자신의 말씀을 읽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라는 일반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올바른 문법적, 역사적 해석의 토대 위에서 이 말씀이 나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내 삶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 말씀이 직접 우리를 대상으로 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말씀을 읽으면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구약성경의 내용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에게 여러 가지 본보기와 훈계를 주기 위해 그 말씀들을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 10:11). 이제 이 모든 일은 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났으며 또 그것들은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해 기록되었느니라(고전10:11). 사도 바울 역시 신명기 25장 4절에 나오는 “곡식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는 율법의 말씀으로부터 영적인 의미를 찾아서 그것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에게 적용하여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해석하였습니다(딤전5:18). 너는 소가 곡식을 밟을 때에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신25:4). 성경 기록이 이르기를, 너는 곡식을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하고 또, 일꾼이 자기 품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느니라(딤전5:18). 모세의 율법에, 너는 곡식을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하고 기록되었나니 하나님께서 소들을 위해 염려하시느냐?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 말씀하시느냐? 틀림없이 이것은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나니 밭을 가는 자는 소망 중에 갈며 소망 중에 타작하는 자는 자기의 소망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하니라(고전9:9~10). 성경 말씀을 해석할 때에는 문법적 해석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며, 그 다음으로 그 말씀이 기록된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나 수신자, 기록 목적 등을 검토하여 역사적 해석을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신학적 해석은 그가 어떤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해석의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고, 각자가 개인의 삶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달라서 여러 가지 다양한 묵상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그 해석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인정받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삶에 주시는 의미를 발견하고 그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저는 이것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 잘못된 해석들 몇 가지 잘못된 성경 해석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문맥을 무시한 해석 [그가] 바람이 사나운 것을 보고 두려워하다가 가라앉기 시작하며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마14:30) 마태복음 14장 30절을 보면 바다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진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 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구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죄로부터의 구원’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전후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해석이며, 죄가 아니라 물에 빠진 베드로의 입장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 해석이고, 문맥 내에서 특정 부분만 도려낸 잘못된 해석입니다. (2) 비유적 해석 성경 100독 세미나로 유명한 조현주 장로나 이만희가 교주로 있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은 모두 성경을 비유로 풀이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기적이나 표적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 마가복음 6장 35-44절에는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명석을 교주로 하는 이단 JMS에서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빵을 떼면 크기가 작아지고 가루가 나기 때문에 절대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것을 비유로 해석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배불리 먹었다고 해석합니다. 이처럼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지 않고 함부로 비유적 해석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절대 변명할 수 없도록 마가복음 6장 43절에 “남은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가득 거두었다”고 기록하셨습니다. 이게 말씀 잔치였다면 ‘남은 빵 조각’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우리는 남은 빵 조각들로 가득 찬 바구니를 생각할 때, 정말 그들이 실제로 문자 그대로의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비유적 해석을 할 때에는 주의를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비유적 해석이 다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방인들의 길로도 들어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어떤 도시로도 들어가지 말며 오직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마10:5-6). 마태복음 10장 5-6절에 나오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은 정말 문자 그대로 양들(sheep)일까요, 아니면 이스라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사야서 53장 6절을 읽고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등은 당연히 비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3) 문법적, 역사적 해석 vs 상징적 해석, 영적 해석 저는 제법 오랜 기간 동안 장로교회에 다니면서 언약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마다 이해가 안 되는 말씀들과 부딪혀야만 했습니다. 또 내가 봉인된 자들의 수에 대하여 들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십사만 사천이더라(계 7:4). 그들이 왕좌 앞과 네 짐승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 같은 것을 부르더라. 땅에서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외에는 아무도 능히 그 노래를 배우지 못하더라(계14:3). 요한계시록 7장 4절에는 이스라엘 자손 중 봉인된 자가 14만 4천 명이며, 14장 3절에는 구속받은 자가 14만 4천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구절을 들고 와서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14만 4천이라고 주장하며, 자기네들만 구속받은 무리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아마도 여호와의 증인들의 신도 수는 이 숫자를 넘으면 안 되나 봅니다. 이런 이단의 주장에 대해 조언을 구하면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 구원받는 사람이 14만 4천이면 그중에 네가 들어가 있고, 구원받는 사람이 100명이라도 그중에 네가 들어가 있고, 구원받는 사람이 1명이라고 해도 그중에 네가 들어가 있다고 믿어라. (성경 말씀에 근거한 답은 안 해 주고 구원의 확신으로 밀어붙이라는 이야기입니다.) - 14만 4천은 상징적인 숫자다. 3은 하나님의 수, 4는 세상의 수, 두 수의 곱은 12로서 주께서 택하신 열두 지파, 열두 제자를 나타낸다. 12의 제곱은 144이며 여기에 1,000을 곱한 것이 14만 4천인데 이것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도의 상징적 해석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이 14만 4천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우리 믿는 사람이 다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이는 어거스틴이나 칼빈에게서 나온 언약신학의 산물입니다.)“그렇다면, 영적인 르우벤, 영적인 유다, 영적인 시므온, 영적인 갓, 영적인 아셀은 누구입니까?”(저는 지금까지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해 주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 14만 4천은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구속받은 자를 말한다. (다행히 문자적 해석을 했습니다.)“그렇다면 이스라엘 자손 말고 이방인 중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계7:9에 나오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바로 구원받은 이방인들이다.”“그런데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큰 환난을 통과하고 나옵니까?(계7:14) 살전4:16-17에 의하면 믿는 사람들은 이미 다 휴거되어서 큰 환난을 겪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요.”(대부분 여기에서 말문이 막힙니다만, 간혹 다음과 같은 새로운 교리를 내세우며 우기는 사람도 있습니다.)“그러니까 대충 믿지 말고 열심히 잘 믿어야 하고, 등잔과 기름을 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고, 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하고, 끝까지 견뎌야 하고 등”(이하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구속받은 이스라엘 자손 144,000명’에 대해서 상징적 해석을 하여, “예수님을 믿는 신약교회 성도들이 곧 영적인 이스라엘이다.”라고 주장하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거기에 거론된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들은 도저히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믿고, 그 숫자도 실제 숫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경영 방식을 나누지 않고, 믿는 우리가 곧 이스라엘이라고 영적 해석을 해 버리면, 우리 성도들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 의해 휴거도 되어야 하고, 또한 우리가 곧 이스라엘이므로 대환난도 통과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공중으로 휴거되어 공중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예수님과 휴거된 성도들 머리 위로 대환난이 쏟아진다.”라는 새로운 엉터리 주장을 늘어놓거나, 성경의 가르침대로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적용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4)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한 상징적 해석의 실례 아래 인용문은 이전에 함께 성경을 공부하던 ooo 형제님께서 쓰신 내용입니다. 지금은 아마 목사님이 되어서 교회 성도들을 섬기고 있을 겁니다. “이제 잘못된 성경 해석의 실례를 하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한번 봅시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교회이고 여리고는 세상입니다. 교회에서 세상 밖으로 나가면 강도를 만납니다. 우리는 여리고로 내려가지 말고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합니다. 또 만약 강도를 만나서 피투성이가 되었다면 - 죄악에 물들었다면 - 포도즙과 기름으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포도즙은 그리스도의 피요, 기름은 성령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성령으로 치료를 받아서 우리 영혼의 상처를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더 잘 치료 받으려면 데나리온 둘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신약과 구약입니다. 또 더욱 더 심하게 해석하는 경우에는 강도 만난 자를 태우고 가는 짐승의 네 다리는 사복음서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복음서라는 짐승을 타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적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또 어떤 목사는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이고 두 데나리온은 2,000년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사건 이후 2,000이 지난 이 시점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비유에서 과연 어디에 예수님의 재림 내용이 있습니까?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를 알려주시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문맥과는 전혀 무관하게 해석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나 그 말씀을 들은 율법사의 반응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비유나 상징으로만 해석하면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전달하고자 하시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을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우리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게 기록하셨으므로, 우리가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읽고 받아들여도 문제가 없다. 오히려 그 말씀 속에 무슨 다른 뜻이 있거나, 감추어진 신기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이를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하다 보면 오류에 빠지게 된다. 각 시대별로, 각 수신자 집단별로 각기 다르게 적용되는 말씀들에 대해서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연구해야 하며, 그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도 함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2013-07-23 14:57:45 | 관리자
이 글은 원래 김문수 목사님이 쓰신 것인데 최근에 출간을 위하여 허락을 받고 제가 조금 내용을 추가하였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보는 지혜가 있으니 잘 보시고 큰 평강을 누리기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마태복음 24장의 올바른 해석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그분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바를 기록한 복음서이지만, 각 복음서가 목표로 하는 수신자(target audience)와 기록된 목적과 성격은 각기 다릅니다.   그중에서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을 읽을 때에는 항상 그 말씀의 일차적인 수신자는 유대인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자료실에 있는 정동수 목사님의 마태복음 강해 첫 부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마지막 날들의 표적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본문 말씀이 어떤 맥락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잊어버리고, 이것을 신약 교회에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 장에 나오는 사건들을 신약 교회와 연관 짓다 보니 부분 휴거설이니 환난 중 휴거설, 환난 후 휴거설 등의 이론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4장은 교회의 휴거 사건을 다루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것이 미래형(I will build)으로 기술되어 있을 뿐, 이 당시에는 아직 신약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마태복음 24장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아직 신약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님의 침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연합되었습니다(고전12:13).   이번 글에서는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마지막 날들에 대한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으며, 그것이 누구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인지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나서 가실 때에 그분의 제자들이 성전의 건물들을 보여 드리려고 그분께 나아오매   1절에 ‘성전’(temple)이 나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전은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이고, 다른 하나는 신약 교회 성도들을 말합니다(고전3:16). 일부 대형 교회에서는 분당 성전, 강남 성전, 과천 성전 등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성전이 아니라 예배당 건물일 뿐입니다. 2절에 나오는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라는 표현으로 볼 때 이것은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 건물을 말합니다. 이 말씀이 신약 교회가 환난기에 들어가면 종교적 박해가 일어나서 어느 지역교회의 건물이 파괴된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땅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을 말합니다.   1절에 나오는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 제자들이며 그들은 신약 교회 성도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 장엄한 모습을 자랑하려고 했습니다.   어떤 이들이 성전을 가리키며 그것이 좋은 돌과 예물로 꾸며진 것을 말하매(눅21:5)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아니하느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4:2). 실제로 AD 70년 로마의 타이투스(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불길에 금이 녹아내려 돌들 사이에 스며들자 타이투스는 모든 기둥과 돌들을 다 파헤쳐서 금과 보석들을 찾아내도록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돌들이 깨어지고 가루가 났으니 돌 위에 다른 돌이 겹쳐지지 않을 정도로 파괴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 그분께서 올리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은밀히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에게 말씀해 주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들이 있으리이까? 또 주께서 오시는 때의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이리이까? 하니   이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적 배경은 올리브 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메시아가 큰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올 때에 올리브 산에 임하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 자체가 ‘유대인들’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날에 그분의 발이 예루살렘 앞 동쪽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설 것이요, 올리브 산이 거기의 한가운데서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므로 심히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며 그 산의 반은 북쪽으로, 그 산의 반은 남쪽으로 이동하리라(슥14:4).   ‘유대인 제자들’은 자기들의 신앙생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다는 말씀에 걱정이 되어서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며, 주께서 오시는 때의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정확히 어느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2절에서 ‘주께서 오시는 때’란 유대인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러 오실 때’를 말합니다(행1:6). 제자들이 말하는 그 때는 예수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시고 성도들의 몸이 공중으로 채여 올라가는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관복음에는 ‘교회의 휴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교회를 대상으로 기록된 요한복음에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믿는 자들을 데려가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요14:3).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   개신교회의 많은 분들은 마24:2를 인용하면서 마태복음 24장은 과거에 일어난 것이지 미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폅니다(과거적 해석 방법). 이 말이 사실일까요? 아닙니다. 마24:2는 1차적으로 AD 70년에 이루어졌지만 24장의 나머지 내용은 AD 70년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시는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3절에 있는 유대인 제자들의 질문 즉 “세상 끝의 표적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자세히 보기 바랍니다. 아직 세상 끝이 임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태복음 24장은 미래에 유대인들에게 이루어질 일들을 다룹니다.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라, 하며 많은 사람을 속이리라.   5절에서 ‘그리스도’란 히브리어로 ‘메시아’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거짓 종교의 지도자들 중에는 자기가 신의 아들이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메시아"라고 하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 말씀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 또 너희가 전쟁들과 전쟁들의 소문을 들을 터이나 주의하여 불안해하지 말라. 이 모든 일들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7] 민족이 민족을 왕국이 왕국을 대적하여 일어나고 곳곳에 기근과 역병과 지진이 있으리니[8] 이 모든 것은 고통의 시작이니라.   6-8절은 마지막 날에 있을 전 세계적인 재앙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교회나 신약 교회 성도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재앙이 시작되기 전에 교회는 먼저 휴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은 신약 교회 성도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이 땅에 남아 있을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휴거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들에게 닥칠 ‘야곱의 고난의 때’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아, 슬프도다! 그 날이 커서 그것과 비길 날이 없나니 그 날은 곧 야곱의 고난의 때로다. 그러나 그가 그 고난에서 구원을 받으리로다(렘30:7).   개역성경은 6절에서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라고 번역하였고 이를 근거로 많은 분들이 여기의 ‘전쟁과 전쟁’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개역성경은 복수를 제대로 번역하지 않아서 ‘전쟁과 전쟁’이 된 것이지 원래는 ‘전쟁들과 전쟁들’입니다.     [9] 그때에 그들이 너희를 넘겨주어 고통 받게 하고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해 모든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9절에서 ‘너희’란 이스라엘 민족 즉 유대인들을 말하고, ‘민족들’(nations)이란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a nation’으로 등장하며, 이방 민족들은 복수형인 ‘nations’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마지막 날들에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대대적인 핍박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7년 환난기에 들어가면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물이 피가 되고, 전쟁이 일어나는 등 전 세계적인 재앙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중에서 이방 민족들이라고 무사할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민족들에게 임할 고난보다는 유대인들이 겪게 될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10]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고 서로 배반하여 넘겨주며 서로 미워하고[11] 많은 거짓 대언자가 일어나 많은 사람을 속이며[12] 불법이 성행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서로 배반하고, 미워하고, 속고 속이며, 불법이 성행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이 땅에는 불법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님께서 그것을 저지하고, 막고 계십니다(살후2:6-8).   너희는 그가 그의 때에 드러나게 하려고 무엇이 저지하고 있는지 지금 아나니 불법의 신비가 이미 일하고 있으나 다만 지금 막고 있는 이가 길에서 옮겨지기까지 막으리라. 그 뒤에 저 사악한 자가 드러날 터인데 주께서 자신의 입의 영으로 그를 소멸시키시고 친히 오실 때의 광채로 그를 멸하시리라(살후2:6-8).   그런데 막고 있는 이가 길에서 옮겨지면 불법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될 것이고, 그 뒤에 저 사악한 자(that Wicked 대문자임)가 드러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지금 모든 믿는 자들 안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길에서 옮겨진다는 것은 신약 교회가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완성되면, 신약 교회는 휴거되고 교회 시대는 끝이 납니다. 그 이후로는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연결하는 성령님의 사역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이 이 땅을 떠나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그분의 사역의 방향이 이제는 교회를 세우고 자라게 하고 보호하는 사역에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인 유대인들을 향한 사역으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께서는 14만 4천 명의 봉인된 유대인들을 사용하여 왕국의 복음을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계7장).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교회가 휴거된 이후에 불법의 신비가 활약하고 저 사악한 자가 온 세상을 지배할 때, 그 모든 핍박을 피해서 숨고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서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서 구원을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진 환난과 핍박 속에서 적그리스도에게 붙잡혀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몸을 가지고 메시아 왕국(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많은 교회들은 여기서 ‘끝’을 ‘목숨을 다하는 끝’으로 해석하고는 죽도록 교회에 충성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여기의 ‘끝’은 6절의 ‘끝’과 14절의 ‘끝’처럼 7년 환난기의 끝을 말합니다. 목숨이 다하는 때가 결코 아닙니다.   [14]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되기 위해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14절에 ‘복음’이 나옵니다. 이 복음은 교회 시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은혜의 복음이 아닙니다(행20:24).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결코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 또한 내가 나의 생명도 내게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니 이것은 내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님께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기쁨으로 끝마치고자 함이라(행20:24).   14절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러 오신다는 것을 선포하는 ‘왕국의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봉인된 14만 4천 명의 유대인들을 통해서 온 땅에 선포될 것입니다(계7:4). 많은 선교 단체들은 “우리가 아직 땅 끝까지 복음을 못 전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 오시는데, 아프리카 산간오지 마을, 공산주의 국가, 이스라엘, 모슬렘 국가에까지 복음을 다 전하면 그제야 예수님이 오실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신약 시대의 은혜의 복음과 마지막 날들에 온 세상에 선포될 왕국의 복음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에 빠지는 것입니다. 저 역시 선교단체에 있을 때에는 정말 그런 줄로 알고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하자”, “열심히 전도하고 제자를 양성해서 세상을 변화시키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에 매진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을 바르게 나누지 못하고,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말씀을 신약 교회에 적용하고, 성경 말씀을 영적으로,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바람에 빚어진 결과입니다.   개역성경은 이것을 ‘천국 복음’이라고 또 오역하여 본문이 말하는 바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15] 그런즉 대언자 다니엘을 통해 말씀하신바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너희가 보거든 (누구든지 읽는 자는 깨달을지어다.)   15절에 나오는 대언자 다니엘은 신약 교회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왕국을 이 땅에 세우실 것을 대언했습니다(단2:44). 다니엘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임할 전 세계적인 환난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네 백성’)이 겪을 환난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대언하고 있습니다.   이 왕들의 시대에 [세상 끝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왕국을 세우실 터인데 그것은 결코 멸망하지 아니하리이다. 그 왕국은 다른 백성에게 남겨지지 아니하며 이 모든 왕국들을 산산조각 내어 소멸시키고 영원히 서리이다(단2:44).   그때에 [대환난기에] 네 백성의 자손들[유대인들]을 위하여 일어서는 큰 통치자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고난의 때가 있으리니 그것은 민족[이스라엘 민족]이 있은 이래로 그때까지 결코 없었던 고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유대인]이 구출을 받되 책에서 발견된바 기록된 모든 자가 구출을 받으리라(단12:1).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미리 해 주신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차 임할 통치자[적그리스도]의 백성이 그 도시[예루살렘]와 그 성소를 파괴하려니와 그것의 끝에는 홍수가 있을 것이며 또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폐하게 하는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많은 사람과 한 이레 동안 언약을 확정하리니 그가 그 이레의 한중간에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 하며 또 가증한 것들로 뒤덮기 위하여 심지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것을 황폐하게 할 것이요, 작정된 그것이 그 황폐한 곳에 쏟아지리라, 하니라(단9:26~27).   [16]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할지어다.   16절에 구체적으로 ‘유대’라는 지명까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국이나 한국에 있는 신약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유대 지방에 있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십니다.   개역성경은 여기의 ‘산들’을 역시 단수로 ‘산’으로 번역했고 그 결과 많은 목사들이 영해를 하면 여기의 ‘산’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에 충성/봉사해야 환난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서 그렇게 믿는 단순한 성도들이 매우 많습니다.   [17] 지붕에 있는 자는 자기 집에서 무엇을 취하려고 내려가지 말며   17절의 지붕은 한국의 초가지붕, 기와지붕, 아파트 옥상이나 유목민들의 천막 꼭대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집의 지붕은 평평하게 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쉬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 장소입니다.   그들이 밀려드는 무리로 인해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없으므로 그분께서 계신 곳의 지붕을 벗기고 부수어서 마비 병 환자가 누운 자리를 달아 내리거늘(막2:4)   이튿날 그들이 계속 길을 가다가 그 도시에 가까이 갔을 때에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여섯 시쯤에 지붕에 올라가니라(행10:9).   [19] 그 날들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영해에 빠진 목사들은 여기의 ‘아이 밴 자들’은 ‘아직 전도하지 못해서 열매가 없는 자들’이라고 말하며 ‘젖 먹이는 자들’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사실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의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은 실제로 아이 밴 유대인 여인들과 젖먹이를 둔 유대인 여인들을 말합니다. 아이들 때문에 적그리스도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 여인들이 큰 고통을 당할 것을 예수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20] 그러나 너희의 도피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너희는 기도하라.   20절에 ‘겨울’이라는 특정 계절이 언급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겨울이면 지구의 남반부는 여름이기 때문에 남반부 사람들은 추위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염려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초점을 두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도망가는 데 불편을 느낄 민족은 유대인들 밖에 없습니다. 이것 역시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물론의 여기의 ‘너희’도 유대인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영해하여 ‘겨울’은 ‘믿음이 식은 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기의 ‘겨울’은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유대의 겨울을 뜻합니다.   [21] 그때에 큰 환난이 있으리니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때까지 그런 환난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22] 그 날들이 짧아지지 아니하면 어떤 육체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로되 선택 받은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이 짧아지리라.[23]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이르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하거나, 저기 있다, 해도 그 말을 믿지 말라.[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대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들과 이적들을 보여 할 수만 있으면 바로 그 선택 받은 자들을 속이리라.   21절에 큰 환난(great tribulation)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Great Tribulation’이나 ‘Tribulation’이라는 표현이 없고, ‘tribulation’이나 ‘great tribulation’만 나옵니다. 그 환난이 지금까지 세상에 없었던 엄청나게 큰 환난이기 때문에 ‘great tribulation’이라고 하는 것이지, 고유명사로서 ‘Tribulation’이 따로 있고,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Great Tribulation’이라는 기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신앙적인 핍박이나 고난을 당하는 일이 있는데 그런 환난(tribulation)과 구별하기 위해서 편의상 ‘Tribulation’이라고 첫 자를 대문자로 표기해서 구별하는 것뿐입니다. 7년 환난과 후반부 3년 반의 대환난을 나누어서 전반기 3년 반은 가볍게 무시해도 좋을만한 사소한 환난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보면 전반기 3년 반의 환난도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여러 이민족들(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로부터 수많은 박해와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야곱(이스라엘)의 고난의 때’에는 지금까지 그들의 조상들이 겪었던 것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핍박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큰 환난’(great tribulation)이라고 하는 겁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전반기 3년 반 동안에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는 환난도 겪겠지만, 특별히 후반기 3년 반 동안은 그것에 덧붙여 적그리스도로부터 큰 핍박을 받게 되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큰 환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2절과 24절에는 ‘선택받은 자들’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진행되는 문맥을 볼 때 이들 역시 신약 교회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특별한 목적, 사역, 복을 위해서 사람이나 민족을 선택하십니다. 이것은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로 예정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선택받은 자들이란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말합니다(신7:7; 사44:1, 45:4). 거짓 메시아와 거짓 대언자들이 속이려고 하는 대상이 누구겠습니까?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사장 왕국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을 말합니다(출19:6). 다른 민족들은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언약을 받은 적도 없고, 메시아에 대한 소망도 없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친히 사랑하시고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다른 백성보다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모든 백성들 중에서 수가 가장 적으니라(신7:7).   그러나, 오 나의 종 야곱아,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사44:1)   내가 나의 종 야곱 곧 나의 선택한 자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노라(사45:4).   [27] 번개가 동쪽에서 나서 서쪽까지 번쩍이는 것 같이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30] 그때에 사람의 아들의 표적이 하늘에 나타나고 그때에 땅의 모든 지파가 애곡하며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가지고 하늘의 구름들 가운데서 오는 것을 보리라.   27절에는 예수님께서 번개가 번쩍이는 것처럼 누구나 볼 수 있게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의 성도들을 데려가시는 공중 강림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왕들의 왕, 주들의 주로서 큰 영광과 권능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은 지상 강림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공중 강림과 교회의 휴거는 여기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31]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자기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선택 받은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함께 모으리라.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집할 때 나팔을 사용했습니다.   너는 너를 위해 은 나팔 두 개를 만들되 한 덩어리에서 만들고 그것들을 사용하여 집회를 소집하며 진영을 이동하게 할지니라(민10:2).   마태복음 24장의 나팔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소집하는 나팔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심판의 나팔이 아닙니다. 그리고 살전4:16-17이나 고전15:51-52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팔, 마지막 나팔과도 다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와 고린도전서의 나팔 소리가 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의 부활과 살아있는 성도들의 몸이 변화되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마태복음 24장에는 부활(resurrection)과 몸의 변화(translation) 사건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모으는 나팔이지, 신약 교회 성도들의 부활과 휴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32] 이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것의 가지가 아직 연하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너희가 아나니   32절의 무화과나무는 글자 그대로 무화과나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가지와 잎사귀를 보고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자연 현상을 보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닥칠지 예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현상들을 볼 때, 그것을 통해 마지막 날들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또 [너희가]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리니 오늘은 날씨가 궂으리라, 하는도다. 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가 능히 하늘의 모습은 분별하거니와 시대의 표적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마16:3)   굳이 여기서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33절에서 ‘이 모든 일들을 볼 때에’ 그 때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했지, ‘무화과나무를 볼 때에’ 그 때가 가까이 온 줄로 알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0]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질 것이요,[41] 두 여자가 방앗간에서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지리라.   40-41절에 나오는 붙잡혀 가는 자, 남겨진 자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설명을 했습니다. 개역성경은 ‘붙잡혀 가고’를 ‘데려감을 당하고’라고 번역했고, ‘남겨지는 것’을 ‘버려지는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가는 것이 공중으로 휴거되는 것인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마24:40, 개역)   그러나 누가복음 17장 37절을 보면 그들이 붙잡혀 가는 곳은 독수리 떼들이 모이는 곳, 시체들이 있는 곳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붙잡혀서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붙잡혀 가는 자들은 적그리스도의 군대로 끌려가서 전쟁터에서 죽어 육식성 새들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계19:17-18). 이것은 신약 교회의 휴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로이니이까? 하니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디든지 시체가 있는 곳이면 독수리들이 거기로 함께 모여들리라, 하시니라(눅17:37).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 안에 서서 하늘 한가운데로 날아가는 모든 날짐승을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너희는 와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만찬에 함께 모여 왕들의 살과 대장들의 살과 용사들의 살과 말들의 살과 말 탄 자들의 살과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나 작은 자나 큰 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계19:17-18).   지구의 동쪽 절반이 낮이면 그 반대편은 밤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는 지구의 동반구와 서반구에서 일어날 일을 모두 다루기 때문에 낮에 일하다가 붙잡혀 가는 사람과 밤에 자다가 붙잡혀 가는 사람 이야기가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유대 지방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낮에 들에서 일하거나 맷돌을 가는 이야기는 나오지만, 누가복음에 기록된 밤중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함께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질 것이요(눅17:34)   [45] 그런즉 자기 주인으로부터 그의 집안사람들을 넘겨받아 다스리며 제 때에 그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줄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이 누구냐?[46] 그의 주인이 올 때에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도다.[47]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를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맡을 치리자로 삼으리라.[48] 그러나 그 악한 종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내 주인이 오는 것을 늦추시는구나, 하며[49] 자기 동료 종들을 때리고 술 취한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 시작하면[50] 그가 그를 기다리지 않는 날 그가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51] 그를 잘라 내고 위선자들과 함께할 그의 몫을 그에게 지정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이것을 비유나 상징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읽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굳이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믿음의 형제들에게 자기가 깨달은 말씀을 나누어주고 가르치는 것이라고 영적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으면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숭배하도록 강요하고, 짐승의 표를 받게 해서 모든 상거래를 통제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알고 그와 손을 잡겠지만, 3년 반이 지난 후에는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선포할 것입니다(살후2:4).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하나님으로 경배하도록 하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아닌 적그리스도에게 예배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그를 거부하고 숨어 지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짐승의 표를 받은 자 외에는 매매가 금지되기 때문에 그들은 숨어서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할 겁니다. 다른 생활용품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참을 수 있겠지만,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적은 양의 식량을 서로 나누어 먹고 살려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기초한 동족들에 대한 사랑이 필수적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자들은 자기가 맡은 사람들에게 신실하게 양식을 나누어 주겠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자들은 자기 배만 채우고 오히려 동족들을 핍박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기에는 예수님의 동족인 유대인 어린 아이에게 물 한 잔을 주는 것조차도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대단한 선행으로 간주될 것입니다(마10:42; 25:40). 사람들은 환난기에도 믿음으로 구원받지 선행으로 구원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그것이 선행이라는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환난기에 들어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그런 선행을 할 수가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때에 믿음에서 난 신실한 삶을 사는 종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 왕국을 세우러 이 땅에 다시 오셨을 때, 그들 중에서 믿음을 가지고 신실하게 행한 자들은 천년왕국에서 예수님의 재산을 맡을 치리자가 되겠지만(47절), 믿음이 없어서 악하게 행한 자들과 위선자들은 심판을 받아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51절). 이것을 보면 이 말씀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 신약 교회에 대한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보배로운 피로 죄의 삯을 대신 지불하셨기 때문에, 신약 교회 성도들은 죄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신약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상급에 대한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바울을 포함한 신약 성도들]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고후5:10).   그리스도의 심판석은 신약 성도 중 어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보상을 더 많이 받느냐 하는 것이 결정되는 자리이지 죄에 대해 형벌을 받는 심판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신실한 종, 악한 종에 대한 말씀을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 적용하여 열심히 선한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게으름 피우고 신앙생활을 불성실하게 하면 형벌을 받는다고 가르치면 안 됩니다. 이것은 환난기에 이 땅에 남아있게 될 유대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마태복음 24장을 살펴보면서 과연 이것이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이것이 마지막 날에 이 땅에 남아있을 유대인에 대한 말씀이라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유대인 제자들, 예루살렘 성전, 올리브 산, 유대 지방, 안식일, 택한 자들, 거짓 메시아, 민족들의 핍박, 왕국의 복음, 큰 환난, 소집 나팔, 동족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종 등…   여기에 기록된 말씀 중에서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이 있습니까? 교회의 휴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말씀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만약 마태복음 24장이 신약 교회의 휴거를 이야기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의 부활과 살아있는 성도들의 몸이 변화되는 사건도 함께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태복음 24장에서 그에 대한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마태복음 24장은 신약 교회를 향한 말씀이 아니라, 환난기에 이 땅에 남아있을 유대인들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장 말씀을 가지고, 부분 휴거설이나, 환난기 중간 휴거설이나 환난 후 휴거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 글은 마태복음 24장이 누구를 향한 말씀인가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각 구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했습니다. 자세히 다루지 못한 부분들은 정동수 목사님의 마태복음 강해를 보시기 바랍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는 그 말씀이 일차적으로 어느 시대, 누구를 향하여, 어떤 목적으로 하신 말씀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옆집 우편함에 꽂힌 합격 통지서를 꺼내 보고 자기가 수신자도 아니면서 혼자서 실실거리며 좋아하거나, 이웃집 우편함에 들어있는 법원 소환장을 뽑아들고 그것이 자기한테 온 것인 줄 알고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2013-07-23 14:54:23 | 관리자
목사도 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늘 도전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주에는 설교와 강해를 꼭 45분 안에 끝내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그래야 더 좋다고 하여 이번 주부터 실천하려고 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이를 지키기 위해 두 형제/자매님에게 꼭 디지털시계를 사서 뒤에 붙이라고 이야기도 했습니다.설교가 시작되면서 45, 44, 43하고 수자가 떨어지기 시작하면설교를 잘 정리해서 45분 안에 꼭 마치려고 합니다. 아마 후반부 5분 커트가 여러 형제/자매들에게 많은 변화 - 큰 기쁨- 를 줄 것입니다. ㅎㅎ 그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샬롬   패스터 동방의 독수리 기사를 읽어 보세요.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72
2013-07-23 14:44:13 | 관리자
교회의 리더가 되려면   교회가 조금 발전하다 보니 여러 교회에서 리더가 많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들어오곤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되려는 분들이 필요하고 또 좋은 역량을 갖춘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다음의 세 가지가 갖추어지면 자연히 리더(목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1.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에 대한 확신(믿음): 하나님께서 완전히 보존해 주신 성경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리더가 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성경 중에서 하나님이 보존해 주신 성경이 있는지 찾아보고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물론 저희는 이 성경이 킹제임스 성경이라고 믿습니다.   2. 성경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진리): 올바른 해석 체계를 가지고 신약과 구약의 모든 책들을 바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보는 해석 체계가 바르게 잡히지 않으면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는 일이 생기며 그런 식으로는 교회와 성도 개개인이 발전할 수 없습니다.   3. 성도들의 인정을 받는 것(은혜): 아무리 위의 것들을 잘 갖추었다 해도 성도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리더로서는 하나님의 소명(부르심)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부부가 은혜롭게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 눈에 드러나게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로 성도들이 끌려야 합니다.   위의 요점들은 원칙을 말한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제가 이런 점들에서 매우 부족한 사람임을 대부분 아실 것입니다. 노력하고는 있지만 힘에 부칠 때가 많고 실수도 많이 합니다. 주님의 긍휼을 간구하며 성도들의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주님께서 곳곳에서 바르게 믿음 생활 하려는 성도들을 굳게 세워주시고 좋은 리더들을 세워주시기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3-07-18 11:44:07 | 관리자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힘의 원천   놀랍게도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서 성공하느냐 여부는 오직 한 가지 요소에 달렸다. 엄청난 재력, 정치 권력,  복잡한 기술, 탁월한 조직,  뛰어난 설교,  대중을 동원하는 능력, 웅장한 건물,  창의적인 프로그램 따위가 아니라 신앙 공동체 구성원들끼리 서로 공유하는 사랑이 그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나누는 관계의 특성이야말로 교회가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해 주는 핵심 요소이다.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형성되면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3장34절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교회에게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세워서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를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뿐만 아니라 하늘 아버지가 그 내면에 품고 계신 사랑을 뭇사람들이 보고 경험할 수 있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제랄드 싯쳐의 <사랑의 짐>에서
2013-07-18 11:30:36 | 관리자
참고로 왜 조상들의 불법을 3-4대까지만 벌하시는가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과거 구약시대에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3-4대가 한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그는(아브라함은) 낯선 나라에 머무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머물렀고 자기와 함께 동일한 약속의 상속자가 된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들에 거하였으니(히11:9) 그러므로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가 자식들을 잘 가르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였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조상들에게 가정교육의 큰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결국 민족의 패망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조상들의 죄 가운데 한 사람의 죄는 유전되어 지금까지 온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모든 인류의 첫 조상 아담입니다. 그로 인해 육체적 죽음이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옥에 가는 일은 각 사람의 죄들로 인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계속해서 첫 아담과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만을 비교합니다. 롬5:15-19, 15그러나 거저 주시는 이 선물은 또한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이는 한 사람의 범죄를 통해 많은 사람이 죽었을진대 [하나님]의 은혜와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한 선물은 더욱더 많은 사람에게 넘쳤기 때문이니라. 16 또 이 선물은 죄 지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과 같지 아니하니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심판은 정죄에 이르렀으나 많은 범죄로 인한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은 칭의에 이르기 때문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한 사람을 통하여 군림하였을진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욱더 생명 안에서 군림하리라.)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생명의 칭의에 이르렀나니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 중간에 낀 다른 조상들은 우리의 죄들과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죄를 제거하셨습니다(요1;29). 다음 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하나님 편에서 그분은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계13:8).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다 그에게 경배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들만 걱정하면 됩니다. 이 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만 한 번에 영원토록 완전히 제거가 됩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죄들을 용서하셨지만 죄들을 제거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 속죄는 죄들을 덮어서 가려주는 것이었습니다(출34:7).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되 그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지는 아니하리라. 내가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 그러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습니다. 우리 각 사람의 죄들로 인해 각 사람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죄들이 다 용서됩니다. 아담과 우리 사이에 낀 우리 조상들은 죄들에 관한 한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샬롬
2013-07-10 15:35:22 | 관리자
근래 모 선교회의 여러 성도들이 합당한 이유로 교회탈퇴를 원하나 교회측에서 배도라는 딱지를 입힘으로서 운신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이 글이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도록 옮겨가겠습니다. 시의적절하게 좋은 선물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2013-07-10 14:02:24 | 최상기
지난 주 금요 모임이 끝난 뒤 한 젊은 형제가 잠깐 저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가족들 가운데 부산의 박O수 목사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어도 말을 듣지 않아 답답하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문제인지 물으니 박 목사는 조상들의 죄를 반드시 회개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그들을 보면 너무 불쌍한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박 목사가 인용하는 몇 가지 구절을 제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박 목사가 인용하는 개역성경 벧전1:18을 듣는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런 성경이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제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서 살펴보니 그 형제가 말한 대로 되어 있었습니다.   흠정역: 벧전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너희의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을 것들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개역성경: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개역개정: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KJB: Forasmuch as ye know that ye were not redeemed with corruptible things, [as] silver and gold, from your vain conversation [received] by tradition from your fathers;   NIV: For you know that it was not with perishable things such as silver or gold that you were redeemed from the empty way of life handed down to you from your forefathers,   개역성경, 개역개정, NIV를 보면 다 조상들의 망령된 행실이 유전됨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의 유전(遺傳)은 “1. 물려받아 내려옴. 또는 그렇게 전해짐. 2.<생물>어버이의 성격, 체질, 형상 따위의 형질이 자손에게 전해짐. 또는 그런 현상.”을 뜻합니다.   아니 조상들의 망령된 행실이 피를 타고 유전으로 전해 내려온다니 이런 해괴망측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문제를 보니 킹제임스 성경에 있는 중요한 단어가 현대역본들에서는 다 삭제되어 있었습니다. 즉 ‘전통으로'라는 단어가 빠지면서 이상하게 조상들의 망령된 행실이 피를 타고 유전된 것으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단들이 사실 성경을 유심히 봅니다. 부산의 박 목사는 이 구절을 유심히 보고는 조상들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교리를 만들어 신도들보고 그것들을 회개하라고 닦달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박 목사가 좋아하는 구절들은 ‘아버지들(혹은 조상들)의 불법을 하나님께서 자손들에게 벌하시겠다고 하신 구약의 몇 구절들입니다. 신약의 베드로전서 구절과 구약의 몇 구절을 가지고 박 목사는 이단 교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먼저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야 하므로 ‘아버지들(혹은 조상들)의 불법(혹은 불법들)’을 담고 있는 구절들을 다 찾아보았습니다. 밑에 보시면 그 구절들이 다 나와 았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아버지들(혹은 조상들)의 불법(혹은 불법들)’을 담고 있는 구절은 모두 구약에만 있습니다. 신약에는 한 구절도 없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신정국가로 태어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 국가의 헌법으로 주신 십계명에서 처음 나옵니다 (출20:4-5). 단순히 출20:5만 보지 말고 5절이 나오는 이유가 설명된 4절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4-5절의 핵심 내용이 우상숭배나 이교도들과의 혼합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들(혹은 조상들)의 불법(혹은 불법들)’을 담고 있는 다른 구절들도 보면 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를 하다가 포로가 되어 잡혀가거나 가기 전의 상황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신정 정치 하의 이스라엘에게는 명백한 우상숭배나 이교도들과의 혼합 문제가 곧 질투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왔습니다. 그 하나님은 배타적으로 그들에게서 100% 사랑을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심판은 거의 대부분 이스라엘 온 민족이 당하는 심판이었습니다. 밑에 있는 구절들을 문맥과 함께 보시면 금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들을 문맥에 상관없이 떼 내어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한 개인이 죽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다음과 같이 규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자녀들로 인하여 아버지들을 죽이지 말며 아버지들로 인하여 자녀들을 죽이지 말라. 각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신24:16).   보라, 모든 혼은 내 것이라. 아버지의 혼과 마찬가지로 아들의 혼도 내 것이니 죄를 짓는 혼, 그 혼은 죽을지니라(겔18:4).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거나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교리였으면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반드시 언급하고 가르쳤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쳐주는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구원은 개인의 죄들의 용서에 달려 있지 티끌만큼도 조상들의 죄와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사주팔자도 더 이상 성도들 안에서 작용하지 못합니다. 그런 일들은 과거에 우리가 마귀의 자녀였을 때 일정 부분 우리를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아들딸로 신분이 바뀌었으므로 세상의 신에게 속한 어떤 악한 영들도 우리의 신분과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골2;13-15, 13 또 너희의 죄들과 너희 육체의 무할례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며 14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규례들을 손으로 기록한 것을 지우시고 그것을 길에서 치우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으시며 15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   그러므로 다시는 이런 헛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의 속임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구약의 신정 정치 하에서 민족적인 심판의 상황을 개인에게 적용하면 안 됩니다. 또 개역성경 같은 허술한 성경을 의지하여 교리를 만들면 안 됩니다.   성경의 ‘몇 글자’가 이단을 만듭니다. 귀신들이 아니라 마귀들인데 성경이 귀신이라고 하니 베뢰아 귀신론이 만들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왕국의 신비들을 설명하시면서 듣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비유가 없이는’(without a parable)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13:34,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그런데 이것을 개역성경처럼 ‘비유가 아니면’으로 번역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비유가 되고 맙니다. 여기서 신천지의 비유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그들은 여기에 근거해서 성경이 다 비유이며 자기들의 교주만이 그것을 알려 줄 수 있다고 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입니다.   성경 문제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약과 구약을 잘 구분하는 것 역시 대단히 중요합니다.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과거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느라 평생을 속박 가운데 지내야 하는 이들을 보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다음의 자료들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귀에게 속아 넘어간 저들의 눈을 속히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2944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346   '아버지들(조상들)의 불법’이 나오는 구절들   출20:4-5, 4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곧 {주} 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34:7,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되 그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지는 아니하리라. 내가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   레26:39-42, 39 또 너희의 남은 자들이 너희 원수들의 땅에서 자기들의 불법 가운데서 쇠약해지며 또 자기 조상들의 불법 가운데서 그 조상들과 함께 쇠약해지리라. 40 그들이 만일 자기들의 불법과 자기 조상들의 불법과 자기들이 나를 대적하며 범한 그 범법을 자백하고 또 그들이 나를 대적하여 걸으므로 41 나도 그들을 대적하여 걸었으며 또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갔음을 자백하고 자기들의 할례 받지 않은 마음을 낮추어 자기들의 불법으로 인한 형벌을 수용하면 42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또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도 기억하며 그 땅을 기억하리라.   민14:18, {주}는 오래 참고 긍휼이 많아 불법과 범죄를 용서하나 결코 죄 있는 자들의 죄를 깨끗이 치우지 아니하며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느니라, 하셨나이다.   신5:9-10, 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주} 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   사14:21, 그들의 조상들의 불법으로 인하여 그의 자손들을 살육할 준비를 하고 그리하여 그들이 일어나거나 땅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며 또 도시들로 세상의 표면을 채우지도 못하게 하라.   렘14:19-20, 주께서 유다를 완전히 버리셨나이까? 주의 혼이 시온을 심히 싫어하셨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우리를 치시고 우리를 위해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랐으나 좋은 것이 없고 치료하시는 때를 바랐으나 고난을 보나이다! 20 오 {주}여, 우리가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우리의 사악함과 우리 조상들의 불법을 우리가 인정하나이다. 렘32:18, 주께서는 인자하심을 수천의 사람들에게 베푸시며 아버지들의 불법을 그들 뒤에 오는 그들의 자손들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신 이, 능하신 [하나님], 만군의 {주}가 그분의 이름이로소이다.   ‘조상들(아버지들)의 불법들’이 나오는 구절들   레26:39-42, 또 너희의 남은 자들이 너희 원수들의 땅에서 자기들의 불법 가운데서 쇠약해지며 또 자기 조상들의 불법들 가운데서 그 조상들과 함께 쇠약해지리라. 40 그들이 만일 자기들의 불법과 자기 조상들의 불법과 자기들이 나를 대적하며 범한 그 범법을 자백하고 또 그들이 나를 대적하여 걸으므로 41 나도 그들을 대적하여 걸었으며 또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갔음을 자백하고 자기들의 할례 받지 않은 마음을 낮추어 자기들의 불법으로 인한 형벌을 수용하면 42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또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도 기억하며 그 땅을 기억하리라.   느9:2, 이스라엘의 씨가 모든 타국인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일어서서 자기 죄들과 자기 조상들의 불법들을 자백하니라.   사65:7, 너희 불법들과 너희 조상들의 불법들을 함께 보응하리니 그들이 산들 위에서 분향하고 작은 산들 위에서 나를 모독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이전 행위를 헤아리되 그들의 품속까지 헤아리리라. {주}가 말하노라.   선조들의 불법들, 렘11:10그들이 내 말들 듣기를 거절한 자기 선조들의 불법들로 돌아가 다른 신들을 따르고 그들을 섬겼은즉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도다.   애5:7, 우리 조상들은 죄를 짓고 없어졌으며 우리가 그들의 불법들을 담당하였나이다.   단9:16, 오 [주]여, 간청하옵나니 주의 모든 의를 따라 주의 분노와 주의 격노를 돌이키사 주의 도시 예루살렘 곧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우리의 죄들과 우리 조상들의 불법들로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우리의 사방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치욕거리가 되었나이다.
2013-07-09 16:53:42 | 관리자
배도와 분리   현대 교회들이 많이 배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배도라는 말은 구원에 대한 교리와 대부분의 교리들이 올바른데 시간이 지나면서 구원 이외의 다른 교리들이 심각하게 타락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나 불교가 배도했다는 말은 의미가 없습니다. 또 신천지나 안상홍 파가 배도했다는 말도 의미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데에는 배도라는 말 자체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건전한 것으로 알았던 교회나 교단이나 학교가 타락하는 것을 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는 한 마디로 배도와 분리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는 보수적인 개혁 교회 목사들을 배출하기 위해 1812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10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배도의 길을 걷기 시작하자 여기서 나온 메이첸, 밴틸 박사 등이 1929년에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도 자유주의 성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의 밥 존스 대학의 설립자인 밥 존스는 감리교도(침례를 주는 감리교도)였습니다. 과거에 미국 감리교는 매우 근본적인 믿음을 소유하였지만 1900년대를 거치면서 1920년대의 자유주의 파동을 겪으면서 인본주의로 흘러서 지금은 미국 장로교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인본적인 교단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에 밥 존스는 감리교에서 분리하여 1926년에 근본주의 초교파 학교인 밥 존스 대학을 세웠고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가장 강력하게 근본주의와 킹제임스 성경을 옹호하는 학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손자 대에 이르러서는 킹제임스 성경을 버리고 천주교 세력과도 연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밥 존스 출신으로 호튼 박사는 1950년대에 펜사콜라에 내려가 펜사콜라 바이블 칼리지(www.pcci.edu)를 세웠습니다. 이것은 현재 학생 수가 5000명이 넘는 세상에서 가장 큰 독립침례교회 대학입니다. 대규모 대학으로는 공공연하게 킹제임스 성경을 옹호라는 학교입니다. (참고로 이 학교는 럭크맨의 펜사콜라 바이블 인스티튜트(펜사콜라 성경 학교)와 같은 도시에 있지만 다릅니다. 참고로 럭크맨도 밥 존스 대학 출신입니다.) 그런데 이 학교도 언제 타락할지 모릅니다. 그러면 또 거기서 다른 이들이 분리해서 진리를 수호하려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배도와 분리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분리(separation)를 통해 진리를 순수하게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나 사람은 변합니다. 그 변화가 진리를 배격하는 것이며 가차 없이 분리해서 진리를 순순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분리하려면 말씀에 대한 지식과 확신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이 나라에 분리를 알고 실천하는 형제/자매들이 넘쳐나기를 원합니다.   어떤 분의 말처럼 하나님은 큰 그릇, 금 그릇, 은그릇이 아니라 작고 보잘것없어도 깨끗한 그릇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명백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샬롬   레위기 10장 8-11 8 ¶ {주}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너나 혹은 너와 함께한 네 아들들이 회중의 성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니 그것은 너희 대대로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 10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아니한 것,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 사이에 구별을 두고 11 이로써 {주}가 모세의 손으로 말한 모든 법규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칠 수 있으리라. 에스겔 22 : 26 그녀의 제사장들이 내 율법을 범하고 내 거룩한 것들을 더럽히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전혀 구분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의 차이를 보이지 아니하며 자기 눈을 가려 내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가운데서 더럽혀졌느니라. 에스겔 44 : 23 또 그들은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의 차이를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분별하게 할지니라. 고린도후서 6장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더불어 공평하지 않게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느냐? 빛과 어둠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느냐?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일치하겠느냐? 혹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무슨 몫을 나누겠느냐?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찌 조화를 이루겠느냐?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니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거닐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17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받아들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딸이 되리라. [전능자] [주]가 말하노라, 하셨느니라.
2013-07-06 15:41:55 | 관리자
하나님 일을 미뤘을 때 찝찝함보단 힘들고 하기싫어도 성과없어 보여도, 하고 나서의 편안함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많이 맞게 걷든, 부족하게 걷든..살아가는 얘기를 진실하게 할 수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이, 사랑침례교회 분위기에....감사드립니다.
2013-06-27 23:38:23 | 목영주
사랑도 제가 사랑하는 방법으로는 어긋나는 것 같아 아예 포기(?)...이젠 제 마음이 평안해지기를 1차 기도 드린후 그다음, 나아지는 상황으로 변화되길 기도, 맡깁니다. - 일상생활에 대한 이런 단순한 헌신이 미래의 기초가 된다-- 어렵고 진전이 없어보여 피하고 싶은 것보다 하기싫어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작은 헌신도 방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사는 저에겐 자잘한 희생도 큰 가치가 있다는 말이 위로가 되네요.
2013-06-27 18:58:07 | 목영주
흠...이 글을 읽으며 우리가 교회를 시작하는 것을 좀 더 미루었다면...좀 더 성숙하고 안정이 있고 또 여건이 허락되기를 기다렸다면 ... 우리 부부의 장점이자 단점인 빠른 행동이 많은 부작용을 낳긴 했지만 시행착오를 통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요. 100프로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면서 우리 자신도 즐거운 그런 날은 하늘나라에서나 가능하겠지요..
2013-06-27 09:12:11 | 오혜미
이글에서 공감되고 감동되는 말들이 있네요. 그래서 책을 읽는 재미가 더 생기고 책을 찾게 되지요. 결혼의 실패는 하나님의 뜻 밖에 있는 배우자를 만났기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라는 말... 그리고 소명이란 ...그리고 능력이란 작은 일에도 숨겨져 있네요. 유능한 독자.비판적 사고.협력.충심. 공평성.... 아...적어도 우리 교회가 기초를 단단히 하며 나아가는데 필요한 상식과 교양을 목사로 하여금 좋은 책들을 선별하도록 지혜를 주시고 폭넓은 사고를 하도록 넓은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2013-06-27 09:02:00 | 오혜미
우리 독립교회가 빠지기 쉬운 맹점이라고 생각해요.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성경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것을 아주 좁은 길이라 인식하고 고립적이고 무모한 충성을 바칠 때가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폭넓은 자유보다는 끝도 없는 규칙아래 안주하며 이것이 주님이 원하는 삶이라고 믿지요. 우리도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지만 사람을 지배해서의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통제하지 못해서 생긴일이기에 오히려 후자가 다행이라 생각되네요.. 그러나 양극단으로 가지 않도록 균형있고 질서있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리더와 팔로워의 부단한 노력과 성숙이 필요한 거 같아요. 적어도 성경을 같이 공부하고 이러한 서적들을 공유하고 또 대화하며 지내는 일이 그 최선의 방법이지 않을까..생각해 봅니다.
2013-06-27 08:52:29 | 오혜미
다음은 <하나님의 뜻>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결혼과 소명에서 기초를 다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book&write_id=175   기초를 튼튼하게 미래가 아무리 오리무중이어도 우리는 언제나 현 순간에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 앞으로 어느 분야로 나갈지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지금 열심히 공부할 수 있다. 지금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면 그것이 준비가 되어 나중에 더 큰 문제들도 풀 수 있다. 지금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 현재로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봉사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을 돌보고, 훌륭한 청지기가 되는 길을 배우며, 성품과 기술을 개발하고, 가치 있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 대한 이런 단순한 헌신이 미래의 기초가 된다. 지금 부지런하고 충실할수록 장차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역량이 그만큼 커진다.   결혼을 생각해 보라. 결혼 여부나 배우자의 선택보다는 지속적인 우정을 가꾸기 위해 날마다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결혼을 생각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그렇다. 궁극적으로 결혼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매순간 사랑을 선택하는 삶이다. 사랑이야말로 결혼의 성공 조건이기 때문이다. 많은 부부가 결혼에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 밖에’ 있는 사람을 배우자로 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결혼이 관심사가 되기 이전부터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지 때문이다. 자신에게 물어야 할 기본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능력이 있는가?”   소명을 생각해 보라. 선택하는 소명의 분야보다는 자신을 준비하기 위해 날마다 하는 작은 일들이 더 중요하다. 세상은 언제나 근면한 일꾼, 유능한 독자, 세심한 작가, 비판적 사고와 훌륭한 문제해결 능력을 갖춘 자, 협력을 잘하는 직장 동료, 충실한 부하 직원, 공평한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2013-06-26 16:22:33 | 관리자
다음은 <하나님의 뜻>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청년들이 새겨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book&write_id=175  내일로 미루지 말라 대학생들은 대학 시절 ‘방종의 씨앗’을 뿌릴 권리를 주장하기로 유명하다. 어른이 되어 직업과 결혼과 자녀 양육이 있는 ‘진짜’ 세계에 들어서기만 하면 보다 진지하게 살줄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뒤로 미루는 태도는 나쁜 습관으로 굳어진다. 처음에는 첫 직장을 잡을 때까지 미룬다. 다음에는 결혼하여 아이들이 생길 때까지 두고 보기로 한다. 그 다음에는 안정된 중년에 이를 때까지 핑계를 댄다. 다시 말해 우리는 더 이상 남은 시간이 없을 때까지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계속 연기할 것이다. 늘 지금이 아니라 항상 나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할 시간은 지금이다. 한 번도 나중이 아니라 항상 지금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형제 간에 서로 사랑하기란 적어도 처음에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연습을 통해서만 쉬워질 수 있으니 지금 시작하는 것이 좋다.” 시작이 이를수록 좋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뜻대로 살도록 명하시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분은 신하들이 아첨으로 자아를 추켜세워야 하는 못난 독재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구하라고 명하시는 것은 우리가 삶에서 가장 깊이 갈망하고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불완전한 존재다.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미루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저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지음 받았다. 완전한 복종이 아니고는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
2013-06-26 16:20:57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