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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면 되생각하곤 하는데 같은 생각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언제 불러 주실지 모르지만 우리 성도들은 오늘을 살아내야지요.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찬양하며, 자연을 통해 주님을 기뻐하며.  
2020-11-16 12:55:50 | 이수영
낙엽이 쉼없이 떨어져 쌓여가고 마침내 앙상한 가지만 남아도 나무는 생명을 잠재하고 있듯이, 모든 사람들도 언젠가는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의 시처럼 낙엽과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을, 녹화해 둔 영상처럼 일시정지를 시킬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바람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은 거침없이 앞으로만 달려갑니다. 그 달음질하는 시간에 따라 순간순간 우리의 위치는 계속 변하며 바뀌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현재라고 인식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현재는 있을까요? 문자적 현재 말고 실질적 현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언어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우리가 영(spirit)을 가진 영적 존재로 태어났듯이, 오직 영원 속에 계신 그분의 숨(breath)이, 우리 스스로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창조물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의 의미는 항상 우리 신앙의 순간마다 기초가 됩니다.    히 11:1.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위에서 잠깐 언급드렸다시피 현재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진행되며 영원 속에 포함된 실체와 증거는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나타난 행위,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듯이 하늘에 영원히 정착되어 있습니다(시 119:89).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으로~ 라는 의미를 함께 깊이 묵상해 보며 우리들 신앙에 적용하면 좋을거 같습니다.   현재라는 그리스어 ‘에니스테미(가까이 두다)‘는 ’엔(위치)‘이라는 기본전치사와 ’히스테미(서다, 멈추게 하다)‘라는 기본 동사에서 유래된 단어로 과거와 미래 속에서 순간순간 멈추어 서 있는 위치를 말합니다. 과거와 미래속에서 내 위치와 가까이 있는 것이 현재라는 말이 되지요. 그럼 과거와 미래는 어디에 속했습니까? 모두 알고 계시듯이 영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주제의 일부입니다.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셨던 동일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영원(eternity)에 대한 확신과,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가지고 있는 평안은, 곧 다가올 육체의 죽음을 초월하며 두려움에 떨게 만드려는 마귀의 거짓된 계략을 무력화시킵니다. 또한 우리의 형제자매님들이 소천 되신 이후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이, 위안 삼을 수 있는 큰 도피처가 되기도 합니다.    영원은, ’현재를 포함한 과거와 미래‘에 같이 사용되며, '계속되는 기간'을 의미하는 ’아에이‘, 그리고 '시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아이온’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마 1:1.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generation)에 대한 책이라.   시대는 ‘역사적으로 어떤 표준에 의하여 구분한 일정한 기간’을 말하고 있지만, 위 구절을 통해서 보듯이 우리가 예수님의 한 세대에 속한다면, 시대 또한 한 시대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영원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따라 ‘항상 계속되는 시대의 한 세대’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성도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살던 그 시대나 지금이나 주님 안에서는 한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이 그 시대에 살지 않았고, 앞으로 태어날 어떤 사람들과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교리적 지식을 쌓을 땐 시대를 구분해서 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에서는 첫 사람 아담까지 모두가 영원히 살아있으며, 성경에 기록된 모든 시대를 한 시대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낮과 밤과 날을 주시며 시간으로 경계(境界)를 두신 것처럼, 모든 창조물에도 경계를 두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면 비로소 시간의 경계를 벗고 모두 영원으로 들어가겠지만, 시간이 남아있는 아직까지는, 우리는 모두 육신의 경계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육신의 경계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두 가지 불변하시는(히 6:18) 하나님의 ‘계획’과 그분의 ‘약속’에 따라, 지금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 안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요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요일 2:25. 그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이 땅에 주신 말씀들을 통해, 또 우리가 항상 실감하고 있는 우리의 속사람을 통해, 영원에 계신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럴진대 지금의 이 순간들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습니까?   지금 이 세상은 거짓과 위선. 불법이 더욱더 자라나 마귀의 계략에 부합하며, 시간이 멈추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같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점점 더 무질서의 끝을 향해 가고 있고, 가나안 땅의 불법이 충만해졌었던 그 시대의 정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치관을 가진 성도로서 거짓과 불법들에 타협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항거(抗拒)는 당연히 있어야겠지만, 주님의 계획 속에는 이 세상이 가야 할 길을 가고 있다고 봐야 성경적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는 없겠죠. 옳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저들과 마찬가지로 거짓과 위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다름이 없을테니까요. 그래서 성도의 신분은, 옳은 것을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자들보다 더 고난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클수록 그날에 받는 영광은 더 빛난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저나 읽고 계시는 여러분이나, 우리는 현재가 없는 영원 속에 계속 진행하고 있는 순간순간을 살고 있습니다. 단지 육신의 옷을 벗고 있느냐 입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 사나 죽으나 주님과 항상 함께 있다고 인지(認知)한다면 이 육신의 옷을 벗는 그 날이 설렘으로 기다려지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그 아름다움의 거룩함 속으로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믿음. 그 하나의 특권으로 누리는 이 은혜의 시대가 이제 종점(終點)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는 요즘입니다.    이런 즈음에, 시간의 끝을 바라보는 성도의 시각이, 육신의 경계를 벗어나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거룩함의 아름다움 속에 계신 그분의 영광에 나침판처럼 고정되어 있다면, 세상에 보이는 악한 것들로 인해 슬픔이 있을지라도 항상 기뻐하는 자요, 또한 그분을 보고 싶어 하는 애절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순간들을 이기는 자로 살 거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므로, 포기하고 싶도록 낙담이 되거나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도래할지라도 모두 이겨 내시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며 마침내 도달할 그곳을 항상 사모하며 힘을 얻기를 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말로 할 수 없는 존귀에 이르도록 긍휼을 베푸신 우리 주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해 감사를 드립니다.    엡 5:16 시간을 되찾으라. 날들이 악하니라.   
2020-11-14 17:06:43 | 이명석
사도 바울은 왜 자신을 비참한 사람이라고 했을까? 그에 답은 로마서 7장에서 찾을 수 있다. 로마서 7장 14절부터 25절까지를 보면, ‘내가’ 라는 단어가 24회 나온다. 나의 경험으로는 처음 읽을 때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지나갔고, 두 번째 읽을 때는 혼란스러웠고, 세 번째 밑줄 그어가면서 정독을 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선은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아니하는 악을 곧 그것을 내가 행하기 때문이라.”(7장 19절)는 구절에 보듯이, ‘내가’라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번갈아 나온다.   사울 바울은 7장 24절에서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라고 하는데, 이 비참한 사람이 육신에 속한 옛 사람이다. 18절에 ‘내 육신 안에’ 있는 나가 바로 비참한 사람인 것이다.   옛 사람과 새 사람에 대해서 잘 정리된 책이 『두 본성』이다. 지난 주, 교회에서 『두 본성』이라는 책을 구입해서 읽어 보고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는 성도의 두 본성을 이해하고, 또 두 본성과 관련해서 혼란스럽지 않으려면 성도의 신분과 상태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두 본성과 성도의 신분과 상태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두 본성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에게 두 본성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자연적 출생으로 받은 전적으로 악한 본성과 새로운 출생으로 받게 된 새로운 본성 즉 전적으로 선하고 올바른 본성이 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첫째 본성은 흔히 ‘옛 사람’으로 불린다. 옛 사람은 모태로부터 태어났을 때, 자연적 출생으로 받게 된 본성이다. 옛 본성을 예레미야는 인간의 극도로 사악한 마음이라고 한다. 옛 본성은 모든 사람들이 악을 행하려는 내재적인 경향이다. 옛 사람은 본성에 속한 사람으로 어떤 면에서도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아주 악하고 나쁜 것이다. 첫째 본성의 이름은 옛 사람, 겉 사람, 육신, 비참한 사람으로 불린다. 옛 사람의 원수는 새 사람이다. 서로가 끊임없이 다투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은 둘째 본성은 ‘새 사람’으로 불린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신뢰할 때 이 본성이 주어진다. 새 사람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본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다시 태어날 때, 값없는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둘째 본성의 이름은 새 사람, 성령, 마음에 숨겨진 사람, 속사람,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본성으로 불린다. 새 사람의 원수는 옛 사람이다. 서로가 끊임없이 다투기 때문이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은 원수 관계이다. 끊임없이 싸운다. 새 사람은 옛 사람을 매우 싫어하고, 옛 사람은 새 사람을 멸시한다. 성경은 구원 받은 성도가 옛 사람과 그 죄에 대해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처방으로 1)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라. 2)자신을 하나님께 내 드리라. 3)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 4)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한다. 옛 사람을 굶어 죽게 만들라고 한다.   2. 성도의 신분과 상태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그리스도 안에 위치한 것,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를 하나님은 어떻게 보고 계신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구원받은 성도들은 ‘죄의 용서를 받았고, 의롭다 칭함을 받았고, 거룩해졌고, 하나님의 의로 옷을 입은 절대적으로 완벽한 지위에 있는 것이다.      반면, 그리스도인의 상태는 주어진 시간 속에서 실제적인 영적 상태를 말한다. 성도의 행함과 살고 행동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완전하지 못하고, 더 나아질 수도 있고,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아래 그림은 위에서 말한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구원을 받으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동시에 존재한다. 둘은 끊임없이 다투며 함께 간다. 태어나서 오른쪽 상단으로 성장해 과정이 성화이다.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오른쪽 상단) 도달하면 옛 사람은 없고 새 사람만 있게 된다.     믿는 자의 신분과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성경의 어떤 구절은 매우 혼란스럽고 또 심지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성도의 상태는 무시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분만을 강조하는 경우, 죄를 지어도 회개를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양심이 무감각해질 수 있다. 또 신분을 무시하고, 상태만을 강조하는 경우, 구원에 확신이 없고, 비참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빠져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8장으로 옮기라고 강조한다.
2020-11-09 14:38:29 | 이규환
얼마나 많은시간이 흘러야 가슴에서 먼저가신 분의 그리움을 지울 수 있을까요. 살면서 그 고통이 아물수있도록 우리하나님께서 망각이라는 지혜도 주셨으니 마음의 상처 어루만져주시며 치유해 주실것을 믿습니다.  예쁜 자녀들과 힘내세요 형제님.
2020-10-21 03:44:23 | 이청원
힘든시간을 보내시고 다시 교회에서 뵈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가족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어떻게 위로해야 모르지만,이 세상 살아갈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지체가 되길 바랍니다. 아이들도 믿음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힘내세요.
2020-10-20 08:44:15 | 김세라
자매님, 시 잘 읽었습니다. 아침에 자매님의 시를 읽으며 부활과 휴거의 소망으로 읽는 내내 가슴이 설렜습니다. 시 구절처럼 온 우주가 덩실덩실 춤추는 그날을 소망하며, 오늘 하루도 감사함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2020-10-20 08:23:30 | 심경아
저는 최정래 자매님을 데리고 가신 하나님의 뜻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최정래 자매님께서 고통스럽고 남루했던 육신의 장막을 벗고 지금은 하나님 곁에서 안식하고 있으리란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고통이지만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평강이 함께 하길 소망합니다.
2020-10-20 08:09:21 | 심경아
형제님! 그간에 얼마나 마음이 애탔을까 생각해 봅니다.저도 사랑하는 가족을 암으로 주님께 먼저 떠나보낸 일이 있기에. 또 암 투병이 환자에게나 그걸 지켜봐야  하는 가족에게나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도. 그러나 그 때 눈에  고이는 눈물은 피할 수 없었지만  주님이 주신  깊은 위로가 있었기에 다시 만날 소망은 얼마나 현실적이었던지요!  아마도 동일한  주님의 위로가 형제님에게도 임하셨으라 믿습니다. 다만 어린 아이들이 걱정이 되시겠지만(제가 거두는 손주 이름도 윤서라서)  형제님의 기도와 저를 비롯한 우리 지체들의 끊임없는 기도가  합쳐져서 훗날에  선한 열매가 니타나리라  확신합니다. 주님의  헤아릴 수 없는 평강이 형제님과 아이들에게 항상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힘내세요, 형제님!  
2020-10-19 19:25:30 | 박혜영
  안녕하세요? 3주 전 먼저 천국 백성된 최정래 자매의 남편 최재원 형제입니다.    1년간 아내가 건강해지는 것만을 목적으로 살다가, 정작 아내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장례 기간 동안에 한 영과 한 생각으로 사랑이 넘치는 사랑침례교회 지체로부터 교회 안팎으로 큰 사랑과 위로를 받고,    새로운 힘과 방향으로 낙담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기쁨과 열정을 다시 회복해 가고 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새로운 힘과 방향은 제 가정과 교회에서 '서로 사랑하라'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지금까지 사랑침례교회에서 해 왔듯이, 교회 문화와 철학 속에 빠져서, 저의 생각과 가치관의 축을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로 옮겨지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교회의 문화와 철학의 끝은 한 영과 한 생각으로 하나님 사랑과 가족 사랑과 지체 사랑인 것 같습니다. ^^    이 과정을 통해서, 사랑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영과 한 생각이 되면 저절로 흘러가는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큰 위로와 사랑에 진심으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2020-10-19 14:05:43 | 최재원
주님이 오시는 길목에서   오늘도 나는 기다립니다 님처럼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왕의 귀환을 고대하는 충성스런 신하처럼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 아들처럼 그렇게 주님을 기다립니다 마을 어귀에 서서 먼 길 바라보며 그렇게 간절히 기다립니다   오늘같이 흐린 날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낀 날에도 그 너머 확실한 길로 성큼성큼 오시는 님을  나는 기다립니다 나처럼  주님께서도 가슴 벅찬 재회를 꿈꾸며 달려오시겠지요 아무도 우리의 길 막을 순 없지요 땅과 하늘이 만나고 온 우주가 덩실덩실 춤추는 그 기쁨의 만남을 그 누가 막으리오   오랫동안 죄에 삼키웠던 인생들이 죽고 죽여야 사는 이그러져 버린 이 피조의 세계 마법이 풀리듯 그렇게 깨어나  탄식과 슬픔이 저 멀리 달아나고 온 땅과 하늘이 얼싸안는 날 그날이 오겠지요   우리의 그립던 이들도 다 함께 다 함께 얼굴을 부비며 기쁨의 탄성을 지르겠지요 님이여 오소서  속히 오소서 하늘과 땅이 고대하는 우리 님이여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이여 자신의 몸을 미약한 아기로 맡기신 이여 누울 자리 없어 구유에 누우신 이여 작은 안식조차 빼앗긴 채 그 험난한 사막을 흔들리며 건너신 이여 가진 것 없는 이름 없는 무지렁이의 아들로 사신 이여 어머니를 위해 동생들을 위해 당신의 땀을 쏟으신 이여 우리의 삶을 사신 이여   오 사람의 삶을 사신 님이여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맛보시려 내 곁에 머무신 이여 우리의 눈물의 빵과 고난의 잔을 다 마시신 이여   사람의 아들로 오신 이여 고통으로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신 이여 이 티끌 같은 지구 위에 먼지보다 못한 인간 위해 님은 어찌 그 먼 길 달려오셨는지요 끝없이 끝없이 궤도를 벗어나  밑 모르는 심연으로 추락해 가는 인생을 위해 어찌 님은 그리하셨는지요   사랑 하나로 오신 이여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님의 마음에 님의 몸에 채우신 이여   서른 살 젊은이의 대언자로 세상을 보시고 꾸짖으신 이여 위선자의 면전에서 두려움 없이 그들을 나무라신 이여 마음이 가난한 이들과 외면당한 이들의 친구 되신 이여 병 들어 아프고 지친 이들의 소망 되신 이여 거친 보리빵과 보잘것없는 생선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신 이여 당신께 청하는 어느 누구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주셨던 이여   끊임없는 적의와 반대에 맞닥뜨리면서도 혼미한 심령에 참 빛을 던지셨던 이여 인간의 무지와 오만에 둘러싸여 몰이해를 당하신 이여 죽음의 위협이 넘실대는 이 땅을 우리와 함께 걷고 또 걸으셨던 이여 서른 살 젊은이의 희망과 삶의 욕망을 스스로 접으셨던 이여 제발 제발 부르짖으며 우릴 위해 자신을 내려놓으신 이여 우리의 삶을 사신 님이여   십자가 위에서  내리누르는 인간의 죄의 짐과 인간의 무지와 오만의 조롱의 무게를 견디시고 그토록 사랑하신 당신의 거룩하신 아버지의 외면을 어찌 다 담당하셨는지요 우리의 고통 속에 우리의 심판을 당하신 이여 우리로 인해 눌리고 눌린 고통의 님이여 평생 두려움에 매여 죽음의 종노릇 하던 인간을 위해 당신이 흘리신 그 순결한 피와 찢으신 그 몸이 우리 새 생명의 근원이 되신 이여   주님이시여   영원히 천지간에 사랑받아 마땅할 님이여 십자가의 심판을 이기시며 다시 사신 이여 우리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우리 님이여 높이 오르사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신 이여 하늘과 땅과 온 우주에서 찬양받으실 홀로 하나이신 이여 말로 할 수 없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건지신 이여 내가 부르고 부르다 만날 그 이름이여 곧 오실 나의 님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
2020-10-17 12:23:32 | 박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