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상실을 겪은 후,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고 한층 차원 높은 심리적 상태를 이루게 된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에 틀림없지 않은가...결국은, 상실=위장된 은혜...아니겠는가...라는 의미에서 'a Grace Disguised', 즉 '위장된 은혜'라는 원제를 붙인 것 같습니다만...글쎄요...형제님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 의아하게 만들 만한 문제의(^^) 책 제목...아닌가 싶군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상실 안겨주신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욥의 경우를 보더라도, 자신이 겪었던 모든 고통들을 '위장된 은혜'로 생각하지는 않았고, 하나님 또한 그런 의미로 그토록 큰 고통들을 그에게 허용하신 것 아니지 않느냐...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 그러니까, '위장된 은혜' 라면서 '상실'의 고통을 안겨주시는 분...아닌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너무나도 큰 상실 겪은 사람이 상실 이후의 삶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실, 즉 고통 자체(하나님과는 무관함)를 하나님과 결부, 특히 은혜와 결부시키는 일...그런 일은 크리스천으로서의 경계할 일...아닐까...싶은 생각이 드는군요. 하나님 말씀 아는 지식 일천한 사람이 감~히 밝히는 지극히 짧은 생각입니다. ^^
'하나님 앞에서 울었다'...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제목 갖다붙인 번역자 분의 생각 또한 그런 것...아니었을까...라는 생각 듭니다만.
워낙 의미심장한 독후감 올려주셨다보니 책 제목부터 시작하여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는군요. 책 읽으시는 동안 형제님 머릿속을 맴돌았던 것들...에 담긴 깊은 뜻 또한 거듭 음미해 보게 되는군요. 성경은 확실히 인생 매뉴얼이다...그 말씀 멋지군요. ^^
올려주신 독후감 자~~~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
2022-10-01 22:44:56 | 최영오
아직 책을 읽어 보지 않았는데, 꼭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2-09-28 13:14:57 | 김세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09-27 11:44:35 | 이남규
일곱 아들이 주님을 믿는 믿음과 부활을 말하며 차례로 죽어가고 그 모든 것을 본 어머니도 주님을 바라며 순교한 얘기를 읽으면서 누구나 다 그렇게할 수 없다는 생각- - 큰 충격이었다면 , 상실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게도 있을 일들이기에 주님만을 내맘속에 가득 채워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어려움 겪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함께 해주는 것 밖에는 말은 힘이 없어요.
2022-09-27 11:06:28 | 이수영
『하나님 앞에서 울다』를 읽고
이 책의 원제는 a Grace Disguised다. 위장된 은혜다. 하나님이 은혜를 가장하여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는 의미라고 이해되는데,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맞는 말인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일단 책 속으로 들어갔다.
이 책은 상실이라는 비극적인 경험과 그 때문에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화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본인이 겪은 상실을 회고하면서 상실이라는 것이 비록 개인에게는 아주 특별한 사건이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경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서문에서 밝힌다.
책 초반에 상실의 내용이 나온다. 어느 날, 한 집회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맞은편에서 중앙선을 침범하여 오는 차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어머니, 아내, 딸 등 3대를 동시에 잃은 사건이 그 상실이다. 우리는 누구나 상실을 경험하고 그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상실을 경험한다는 것. 즉, 죽음으로 인해 배우자, 가족 그리고 지인들을 잃는 경험을 한다.
사고 당시의 처참한 모습, 사고를 수습하는 모습, 장례식을 치루는 과정, 수많은 사람의 위로와 격려 등을 소개하면서 약 3년 동안의 심경을 15개의 장(주제)으로 기술하고 있다. 저자는 상실이라는 경험은 우리가 최후로 경험하는 상실, 곧 죽음처럼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우리 삶을 주장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 않는다. 보다 결정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상실에 우리가 보이는 반응이다. 상실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그 수준과 방향과 영향력이 달라진다고 강조한다.
상실을 부인(상실을 피함)하거나 타협(조금 늦게 출발했더라면)하거나 몰입(틈만 나면 TV, 술, 폭식 등)하거나 분노(복수를 벼르는)를 하는 것은 영혼의 피폐만 가져 올 뿐이라는 것이다. 고통을 부인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고통으로부터 도망칠 방도도 없다. 부인과 타협과 몰입과 분노는 결국 우리를 덮쳐올 것을 억지로 막아보려는 헛된 시도에 불과하다. 고통은 언젠가는 현실로 나타난다. 상실이라는 자체가 부인할 수 없는 아주 끔찍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반응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더욱이 그런 반응이 회복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단계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진실이 아님을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고 한다.
저자는 고통을 선물이라고 한다. 고통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확실한 증표다. 죽은 사람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오랫동안 사랑과 선함과 슬픔을 거부하다가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숨이 붙어 있을지는 몰라도 죽은 사람이라고 보는 게 맞다. 고통이 선물인 이유는 그것이 신체적인 고통이든 아니면 마음의 고통이든, 우리가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는 걸 알려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고통 속에서 은혜를 말한다. 사고가 나기 훨씬 전부터 크리스천으로 살아왔지만, 그날 사고 이후로 하나님께서 정말로 살아계신 실체로 내게 다가오셨다고 고백한다. “나는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한다거나 하나님께 나 자신을 증명해보여야 한다는 부담에서 거의 벗어났다. 그러면서도 전심전력으로 그분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상실로 인한 고통을 여전히 느끼고 있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너그럽다. 은혜가 나를 변화시켰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다. 나는 내 마음을 열어 내 삶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 들였고, 그분이 다스리시는 영역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부활을 언급한다. 나는 과연 부활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이 부분에서 읽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의 괴로움이 우리만 겪는 게 아님을 스스로에게 깨우친다. 고통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짊어져야 하는 운명이다. 세상이 이곳에 끝나고 더 이상의 세상이 없다면, 죽음이야말로 최후의 승리이며 우리는 슬픈 운영을 타고난 존재들이다. 그러나 여러 세대에 걸쳐서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을 지났고, 앞으로도 다음 세대들이 또 이 길을 밟고 갈 것이다. 그들 모두 지금 우리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담고 있는 것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 모든 중심에 계신다. 그분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와 죽음을 이기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다시 한 번 밝은 빛이 동터올 것이다. 소망도 돌아올 것이다. 거기서 나는 다시 살아갈 이유와 믿음을 버리지 않을 용기를 얻는다. 다시 한 번 나의 영혼은 슬픔뿐 아니라 소망으로도 가득 찬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큰 믿음과 전에 가져보지 못한 기쁨을 얻는다. 여전히 내 안에 슬픔을 담고 있으면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이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저자처럼 감당할 수 있을까? 아래 내용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도는 것들이었다.
첫째, 상실을 예상하고 살아야 하겠다. ‘나는 아닐 것이다’ 보다는 상실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지만,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Plan B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둘째, 있을 때 잘 해야겠다. 관계를 잃어버린 경우라면 잘못된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도 그 관계 자체가 사려져버렸기 때문에 후회가 막급하다. 관계가 안 좋은 상태에서 상실을 겪을 경우 문제는 보다 심각하다. 집안에서 심하게 다투고 난 직후에 배우자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셋째, 상실을 당한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은 신중히 해야겠다. 저자는 어설픈 위로의 말보다는 그냥 옆에 있어만 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감기 환자가 암 환자에게 “별거 아니니 잘 견뎌 보세요.” 라고 말하는 것과 암 환자가 감기 환자에게 “별거 아니니 잘 견뎌 보세요.” 라고 말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위로가 될까?
넷째. 성경을 자주, 잘 읽어야 겠다. 저자는 욥과 요셉의 고난과 고통을 언급한다. 또 히브리서에 나오는 큰 구름같은 증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언급한다. 성경에서 힌트를 얻고 용기를 얻었다. 성경은 확실히 인생 매뉴얼이다.
Gerald L. Sittser, 그는 wounded healer!
2022-09-27 10:35:27 | 이규환
역시 놀라움 속에서 읽으셨군요.
그토록 놀라운 진리의 말씀 너무나도 늦게 접했...었음을 지금도 후회하곤 한답니다.
주님 은총 늘 함께하는 복된 날들 보내세요 ~ ^^
2022-09-26 20:37:42 | 최영오
약속을 얼마나 어겨가며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로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2022-09-26 20:28:37 | 최영오
저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책은 하나도 보질 못하다가 성경책을 보고 놀라고! 사람의 기원이 있는 것을 보고 또 놀라고!
성경을 얼마나 빠르게 읽어나갔는지요!
2022-09-25 06:23:22 | 이수영
"언제 우리 집에 와서 식사 합시다."
남편이 만나는 성도들에게 하는 말.
성도들과 헤어지고 오면서
"왜 내게 의논도 안하고 그렇게 말하느냐?"
고 말다툼 했었네요.
"그게 그냥 인사라고 , 상대도 그렇게 생각하지 손꼽아 기다리지 않는다"
고 변명해서 왜 빈껍데기 말을 하냐고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고
다툰 적이 있어요.
사회생활 하면서 다들 그런데 왜 별일도 아닌데 말꼬리 잡고 그러냐고...
결론은 맘에도 없는 말은 하지말라 로 마무리 지었었고 이후로
내가 듣는데서는 조심하는지 그 날 이후로는 그 일로 다툰 기억은 없어요^^
요즘은 밖에서 만나 식사하니 우리 집에서 식사하자는 말을 사용하지 않기도 하고...
작은 것 하나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면서 말하고 행동해야겠지요..
2022-09-25 06:13:27 | 이수영
인간은 약속을 지킬 능력이 있는가?
지금은 그러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결혼할 때는 아내될 사람에게 “나에게 시집오면 절대로 손에 물을 묻히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킨 사람은 거의 없다. 또 상대방과 헤어질 때, “조만간 식사 한번 합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조만간이 언제인지 소식이 없다. 인간은 과연 약속을 지킬 능력이 있는가? 성경은 무어라 하는지 보자.
창세기 21장에는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이 굳은 맹세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비멜렉이 그의 군대 총대장 비골을 데리고 아브라함을 찾아와 서로 거짓을 행하지 말자며 화친을 요구한다. 이때 아브라함은 화친의 조건으로 내가 판 우물에 더 이상 손대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런 즉 이제 너와 내 아들과 내 아들의 아들에게 거짓을 행하지 않겠다고 여기에서 하나님을 두고 네게 맹세하라. 오직 내가 네게 베푼 친절에 따라 너도 나와 네가 머물러 온 땅에 베풀 것이니라, 하니,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 하고, 아브라함이 양들과 소들을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그 두 사람이 언약을 맺으니라. 아브라함이 양 떼에서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따로 떼너 놓으니 네가 내 손에서 이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받을 것이요, 이로써 그것들이 내가 이 우물을 판 것에 대하여 내게 증거라 되리라. 하고 그 두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런 까닭에 그가 그곳을 브엘세바라 하였더라.(창세기 21장 23, 27, 28, 31절)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의 이 약속은 대대손손(아들의 아들까지) 유효한 것이었다. 그러나 창제기 26장에 오면 이삭이 등장하는데,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 시대에 아브라함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막고 흙으로 메웠다는 내용이 나온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너는 우리보다 훨씬 더 강력한즉 우리에게서 떠나가라.‘고 한다. 굳게 맹세한 약속을 한 세대를 못 넘기고 어기고 만다.
우리는 약속을 너무 쉽게 한다. 그리고 그 약속을 대수롭게 여기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묻지도 않았는데도 “내가 이 약속을 안 지키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고 강하게 말하기도 한다. 확인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확인하면 대한민국에 손가락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약속은 하지 않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약속은 내일 오전 11시에 만나자고 하는 그런 약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2022-09-22 12:45:09 | 이규환
말씀 묵상에 이어 시작(詩作)까지 하시는 모습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2022-09-21 22:08:47 | 최영오
철 들고나서부터 대략 50 년 세월 동안, 그러니까, 엄청나게 긴 세월 동안 교회 앞을 피해 다른 길로 돌아서 다니거나, 또는 부득이하게 교회 앞 지날 때면 십자가 안 보려 고개 돌리고 지나가는 반면, 보이지도 않는 불상들 쪽 바라보며 양손 모아 고개 숙인 다음 갈길 가곤 했던...참으로 가증한 죄인이었던 한 인간을 완전 180 도 돌려세워 버리신 하나님 말씀에 관한 글, 세상에 머물러 있는 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성경 구절들에 관한 글입니다.
그 하나는 홀로 세상을 주관하시는 전능자, 하나님께서 스스로 유일하신 참신이심을 선언하시는 말씀...에 관한 아래 구절들이었습니다.
이사야서 41 장 21 ~ 24 절 (요약)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우리에게 보이며 이전 일들이 어떠했는지 보일지니라
너희는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보여줌으로써 너희가 신들인 줄 우리가 알게 하라
보라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고 너희 일은 헛것이며 너희를 택하는 자는 가증한 자니라
보라
그들은 다 헛것이며 그들의 일들은 아무 것도 아니니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혼돈이니라
위 말씀 앞에서 우상 숭배로 점철된(?) 삶, 그 헛되고 가증한 제 삶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토록 위엄 있는 표현 담고 있는 경전이...성경 이외에는 결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군요. 세상 잡신들을 찍소리 못하도록 단숨에 제압해 버리시는 압도적 선언의 말씀 앞에...우상 숭배자는 그저 참담함 느낄 뿐이었답니다.
다른 하나는 홀로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분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직접 보여주심으로써 자신이야말로 유일하신 참신이심을 입증하시는 말씀...에 관한 아래 구절들이었습니다.
이사야서 45 장 1 ~ 13 절 (요약)
주께서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네게 어둠의 보화와 은밀한 곳의 감추어진 재물을 주어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 나, 곧 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곧 내가 선택한 자 이스라엘을 위해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노라
내가 의 안에서 그를 일으켜 세웠고 그의 모든 길을 지도하리니
그가 나의 도시를 건축하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보상도 없이 놓아주리라
군대들의 주가 말하노라
우상 숭배로 인한 유다의 멸망, 정확히 70 년 바빌론 포로생활, 그리고 고향 땅으로의 귀환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일들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대로, 그것도, 수십 년이나 앞당겨 미리 말씀으로 알려주신 그대로 이루어졌으니(렘 25:7~12) ... 게다가 ... 위 고레스의 경우,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그 이름을 불러 명령하고 계시다니...그저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확실히...소름끼치도록 확실히 보여주고 계시더군요. 솔까말...세상 잡신들이여, 보았느냐?!...라시는 호령 들리는 듯했습니다. 어느 분의 고백처럼...계셨었군요...!...라는 독백이 무겁게 흘러 나왔습니다.
참고로, 위 구절들은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는 성경 전체에 수~~~없이 기록된 예언 및 그 성취에 관한 말씀들 중 한 예에 불과하지만, 처음으로 성경 읽어 내려가던 제게는 무척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답니다.
결국...거의 인생 막바지에 이르도록 잡신, 즉 헛것을 구원자로 택하여 수많은 우상들에 머리 조아리며 살아가던 죄인...창조주로서의 지극히 높으신 분, 유일하신 참신,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살아가던 가증한 죄인은...무너져 내렸습니다. 눈물...또 눈물 흘리면서 말입니다. 그리고는...완전 180 도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서는 일단 여기서 끝내고...약간 다른 차원의 말씀을 덧붙여 봅니다. 위 구절들을 언급할 때면 꼭 함께 거론하고 싶은 내용이 하나 있...거든요. ^^
성경 구절들 중에서 가장 멋진 표현 하나를 들라면 저는 주저 없이 아래 구절을 들 것입니다.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 나
곧 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네가 알게 하리라
thou mayest know that
I, the LORD, which call thee by thy name
am the God of Israel
위 구절을 타이핑하는 지금 이 순간, 다시...지난 날의 그때처럼 전율이 느껴지는군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막강 확실한 절대적 권능과 신실하심이 짜릿하게 느껴지는 대~~~~~단한 표현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얼마나 멋진 시적 표현입니까.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 나...!...곧 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네가 알게 하리라...!...라는 말씀 말입니다.
자신의 출생보다 100 년 훨씬 앞서 기록된 말씀...두루마리(?)를 펼쳤더니(누구로부터 전달 받아서 보았든 어쨌든, 고레스가 보긴 보았을 것...아닌가...싶습니...다만)...!...네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 나,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노라...!...그 말씀을 접한 고레스...그는 얼마나 두려웠을까...?...를 생각하매, 역시 the HOLY BIBLE...!...정녕 거룩하신 말씀의 책...!..이라는 말이 저절로 흘러 나오더군요. 할렐루야!
2022-09-21 21:44:32 | 최영오
'표현하자'라는 말이 강하게 와 닿네요~
주님께도
사람들에게도...
2022-09-21 09:55:07 | 이수영
두분의 따뜻한 마음 감사합니다 ^^
2022-09-14 19:12:58 | 오영임
오늘은 요한복음 마지막 장을 묵상하고 다윗과 요나단이 부른 '요한의 아들 시몬아' 찬양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뒤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 베드로와 그 뒤 흘렸던 그의 비통한 눈물을 생각하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무너졌던 마음을 회복하고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한 베드로를 생각하니 시가 쓰고 싶었습니다.
<오늘 묵상 말씀>
요한복음 21장
17 세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분께서 자기에게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말씀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며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보며 <[주]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바라보시니 베드로가 [주]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고 나가서 비통하게 우니라. (눅22:61-62)>를 생각하고, 예수님의 용서와 베드로의 회복을 묵상하였습니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
오늘 말씀을 보면서 아주 오래 전 일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주님을 멀리했던 때에 다시 주님께로 돌아와서 식사 시간에 기도를 하려고 하니 아이들이 말하기를 속으로 기도하면 안되냐고 하더라구요.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므로 짧게 하겠다고 하고 그때부터 식사 시간에는 항상 공개적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아이들은 아멘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고개는 숙였습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어느 날부터 아멘~이라고 할 때는 정말 기뻤습니다.
아이 둘 다 결혼을 하고나니 같이 기도할 시간이 없어져서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처음으로 우리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작은 사위가 그러더군요. 식사시간에 같이 기도하고 먹기로 했다고...
그리고 얼마 전에는 작은 딸이 손님하고 만나는 공개 자리에서 고개숙여 기도하고 식사를 했다고 하더군요. 우리 교회 형제자매 부부와 우리 작은 딸 부부가 서로 왕래를 하며 교제를 나누고 있다고 했는데 주님의 은혜와 함께 그분들의 기도에 대한 간증이 도움이 된 것 같았습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저는 오늘 묵상한 요한복음 21장 말씀과 함게 기도에 대한 간증과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을 생각하면서 시를 썼습니다.
사랑의 표현 / 이정자
표현하자!
내가 주님 사랑함을
언제나
어디서나
용기내어 표현하자
그분께서 보고 계시니
표현하자!
내가 주님 사랑함을
세상 이긴
주님 말씀
붙잡고 또 붙잡아
담대하게 표현하자
그분께서 듣고 계시니
표현하자!
내가 주님 사랑함을
날마다날마다
그 이름만
찬양하고
목청높여 표현하자
그분께서 기뻐하시니
표현하자!
내가 주님 사랑함을
내 소망
내 감정
모두모두 그분 앞에
기도하여 표현하자
그분께서 받아주시니
https://youtu.be/Ss6gKGMnCxw
2022-09-12 11:10:49 | 이정자
설교코칭 현장의 면학 분위기를 한층 드높혀 주신 다크호스(목사님 표현에 따름 ^^) 분이시로군요.
큰 역할 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감사했습니다 ~ ^^
2022-09-09 18:52:05 | 최영오
맞아요. 공감되는 일들이에요.
우리의 행실을 보고 판단함에도 교회가 교회같지 않은 일이
비일비재하다보니...
2022-09-06 11:54:12 | 이수영
자매님 마음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2022-09-05 17:22:36 | 김경애
안녕하세요
제가 어제 설교코칭 청중으로서 느꼈던 좋았던 점을 게시했는데 글이 맘에 안들어 오늘 아침 삭제했습니다
교회와 바른 성경을 위해 인생을 다 쏟아부으신 목사님 내외분의 헌신과 함께 성실하게 자리를 지켜오신 형제자매님들의 희생과 열심을 생각해보는 어제였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내외분의 바른성경을 선포하고 지키려하는 일관된 거룩한 희생과 집중의 무게감에 숙연해져서인지 어제 쓴 제 개인적 짧은 감상글로 인해 아침에 불편하게 잠을 깼습니다. 편안하게 타인의 인고의 열매 맛을 본 후 쓴 것 같은 부끄러움인가? 가벼움인가? 그 불편함에 민폐같아 아침에 삭제했습니다.
태풍이 기세꺽여 조용히 지나가길 소망하며 형제자매님들 태풍으로부터 안전한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ps: 이 글 게시후 또 맘이 불편해지면 삭제버튼 누를게요
2022-09-05 08:08:37 | 오영임
전도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시군요
형제님, 화이팅! 입니다 ~ ^^
2022-09-02 18:31:12 | 최영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