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2일
● 강해노트는 성막 강해 01(강해 영상)에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강해노트 =>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30&cate_name=%EC%84%B1%EB%A7%89&page=2
http://youtu.be/xvFnh2ziX1U
2009-06-03 20:00:47 | 관리자
2009년 6월 2일
● 강해노트는 성막 강해 01(강해 영상)에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강해노트 =>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30&cate_name=%EC%84%B1%EB%A7%89&page=2
https://youtu.be/oFDTHVXBNhY
2009-06-03 19:59:56 | 관리자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샬롬!
2009-06-03 19:57:03 | 송재근
워낙에 유명하신 분이라 아시는 분들도 많으실테데요 우리의 믿음에 대한 경종을 울려주는 설교내용이라
아시는 내용이시겠지만 모를시는 분도 계실것 같아 올려봅니다.
미국의 어느 청소년 집회에 Paul Washer 목사님이 강사로 나섰습니다. 그동안에 박수와 찬양으로 뜨거워졌던열기가, 이분이 설교를 시작 하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식어 버렸습니다. Paul Washer목사님은 이 설교 이후에,각종 부흥집회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강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설교는 미국 교계에 작지 않은 파장을일으켰고, 그들을 깨우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좁은 길, 넓은 길
● 폴 워셔
오늘 오후 여러분과 함께하는 것은 저에게 큰 특권입니다.
먼저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주님에게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오후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과 여러분들이 이해를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죽어가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청소년에게 설교를 하는 것처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가 제 인생의 마지막 설교인것처럼 설교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들이 오해하게 될 말씀들을 선포할것입니다.
또 저는 여러분들에게 정말 화가나서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부인하는 것들을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저에게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라고 말할만한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에 대한 판단을 미리하기 전에 자신에게 한가지만 물어보십시오.
아시다시피 설교는 위험한 것입니다.
저에게도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거짓 선지자는 더 큰 정죄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죠.
만약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하는 말이 진실이 아니라면 저는 큰일 난거죠.
그리고 설교를 할 때 두려움과 떨림으로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나님 앞에 큰 죄인으로 서 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하는 말씀이 진실이라면 당신들이 두렵고 떨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오늘 말씀할 성경구절을 여러분에게 제대로 전한다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한 사람의 입을 통하여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여러분들의 문제는 저와 상관이 없고 하나님과 그 말씀에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자리에서 필요한 질문은 지금 제가 저짓 선지자인지 아니면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입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우리의 인생이 그 진리를 따라가는 것외에는 그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저는 너무 작습니다. 너무 불쌍합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오 주여, 오직 거짓 불들만이 주님의 제단에 올려진 것입니까?
하늘에서 불이 모든 잡소리와 군중들의 외침들과 행위들 가운데 내려올 수 있습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려올 수 있습니까? 이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습니까?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의 주권안에 기도하고 보좌앞에서 간청하오니
저희에게 은혜로 대하사 저희의 가슴과 마음을 열어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는 그들이 먼저 마음을 열기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절대 그럴수 없습니다. 그들의 가슴과 마음을 열어주사 성경적인 진리를 보게 해 주십시오.
생기를 불어 주시옵고 회개와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당신의 나라안으로 인도하시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주님의 위대한 이름을 위하여 이것들을 해 주시옵소서.
주님, 형제가 말했듯이 이렇게 하옵소서. 그래서 아무도 자기의 공로로 돌리지 못하게 하시고 그래서 그 아무도 하나님의 궤에 손을 못대게 하시고 만약 그것을 만지면 그를 쳐 죽이시옵소서.
주님 우리들에게 역사하여 주십시오. 제발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이 아이들은 그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주님이 역사하시는 길밖에는...아멘.
이제 마태복음 7장을 설교하겠습니다. 성경책 가지고 계시면 따라해 주십시오.
마태복음 7장 13-27절입니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거기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그것을 찾는 자가 적으니라.
15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이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니라.
16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썩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썩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나니
20 그러므로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는 자를 나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하리라.
25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그 집이 무너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그것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라.
26 나의 이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자는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으리라.
27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집이 무너져 그것의 무너짐이 심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저는 오늘 여러분의 자존감이나, 여러분이 자신을 사랑하는지, 여러분의 인생이 계획대로 잘 굴러가고 있는지, 여러분의 재정상태가 어떤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한가지 걱정이 나를 잠못들게 합니다.
아침나절도 그 한가지 걱정으로 지냅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백년 이내에 아마 여기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옥에 있을겁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조차도 지옥에서 영원히 보내게 될겁니다.
여러분은 "목사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라고 하겠죠.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미국내에서 사역을 하고 있지 않고 대부분을 남미나 아프리카 동유럽 등에서 사역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아셔야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기 보다는 무신론적인 문화에 오히려 더 의존하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고, 정말 많은 청소년들이 속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어른들도 속고 있습니다.
그들은 평생 한번 영접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천국을 간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그들처럼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도 자신처럼 세상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것을 비교하면서 전혀 걱정을 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은 생각하겠죠. '뭐 나만 그런게 아니라 다 그런데 뭘'.
모두들 TV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보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보고 웃고 즐기죠.
감각적인 옷들을 입죠. 세상사람들처럼 걷고, 세상의 음악을 사랑합니다.
세상것들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어떻게 아느냐구요?
우리 교회의 다른 사람들하고 나는 별로 다르지 않거든요.
내가 어떻게 크리스천이냐구요?
내 인생 언젠가에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기를 구하는 영접기도를 드렸었거든요."
전 여러분이 알기를 원합니다.
미국 개신교와 복음주의 교회의 가장 큰 이단 사상은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시기를 구하면,
예수님은 반드시 여러분에게 들어오신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그 어떤 침례교회 역사상 이것을 찾아 볼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구원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오직 믿음으로만 이뤄집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안에서의 믿음은 회개가 먼저 일어나고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돌아서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싫어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게 되고, 점점 거룩하게 되고 브리트니 스피어즈 같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세상처럼 되는 것을 거부하며 대부분의 미국 크리스천처럼 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려하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들이 박수치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여러분 얘기를 하고 있는겁니다.
아멘 소리 듣자고 오늘 여기 나온게 아닙니다.
박수 받으려고 여기 나온게 아니예요.
지금 여러분들 얘기를 하고 있는 거라구요.
많은 분들이 제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전 루마니아로 선교를 같이 가기 원합니다."
"전 우크라이나로 같이 가고 싶습니다."
"목사님, 페루 정글에서 교회를 세우시고 말씀 선포한 곳에 저도 가겠습니다"
전 말하죠. 그렇게 못할 거라고. 왜냐고요?
저처럼 선교하면 당신은 거기에 있는 교회들한테 파문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셔야 하는 것은 제가 여러분에게 그저 그냥 까다롭게 구는게 아닙니다.
5000명의 사람들 앞에서 미국의 기독교가 완전히 잘못되고 있다고 말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랑이 필요한 줄 아십니까?
제가 이 말을 하므로 다시는 초청받지 못할 대가를 알고 계십니까?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런데도 왜 하는지 아세요?
돈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성경말씀을 이제 볼 것인데 여러분들이 잘 보시기 바랍니다.
진실을 보길 원합니다. 그리고 자칭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하지 말고 성경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길 원합니다.
어떤 청소년이 목사님에게 다가와 "저는 제가 구원 받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물어보면
대게 목사님은 "언제가예수님에게 기도하며 자기 마음속으로 들어와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냐"고 물어 볼 것입니다.
"네, 그런것 같아요."
"진심이었나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아요."
"그러면, 사탄에게 더 이상 형제를 괴롭히지 말라고 선포하세요."
"성경책 뒤에 다 썼나요? 전도자들이 구원받은 날짜를 책뒷장에 쓰라고 한것처럼 그렇게 해서 의심이 갈 때마다 사탄에게 보여줬나요?"
우리 교단에 이런 미신이 뒤덥고 있습니다.
성경에 크리스천에게 뭘하라고 써 있는지 아세요.
자신을 돌아보고 시험하여 말씀의 빛에 비추어 자기가 믿음안에 있는지 네가 정말 크리스천인지 시험해 보라고 되어 있다구요.
여러분들에게 지금 나가서 이 도시에 있는 모든 사람의 집에 가서 문을 두드려라 하면 뭘 찾을지 아세요? 99%의 이 도시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사람이라고 믿는 거죠.
만약 여러분이 각자 자기 도시에 가서 문을 두드린다면
왜냐면 저도 구원받은 후에 제 고향에 가서 모든 사람의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죠.
제가 뭘 발견하는지 아세요? 그 사람들 모두가 크리스천이었어요.
그중에 85%는 교회도 안나가고 나머지 교회에 가는 사람들은
거룩함과 섬기는 것엔 관심이 없고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살려고 하지도 않죠.
또한 복음을 다른 나라에 전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구원받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답니다.
왜 그들이 구원받았냐고요? 그것은 복음을 덜 전하고 성경공부를 더 했어야하는 전도자들이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말해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전도자들은 그 사람들이 부흥회때 참석한 것을 자랑하려고 그렇게 한것입니다.
전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 이제 성경말씀을 보죠.
제가 여러분에게 생명안으로 들어가게끔 자극을 줬습니다.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거기엔 좁은 문이 있습니다.
제가 남침례교단인 이유는 남침례교단이 이것을 빨리 깨달았을 때 다른 교단들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죠. 남침례교단은 거기엔 한 문이 있고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시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셨고 그 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건 객관식 문제도 아니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지도 않습니다.
교단으로서 우리는 항상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신것처럼 말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이 구원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성경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하는 말씀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타락하고 하나님의 증오 가운데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하나님께로 나아가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김으로 하나님께 반역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냥 죄를 지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죄 밖에는 행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선지서에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최고의 의로움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같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할 것을 알고 있죠.
그건 바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여러분 중에선 "잠깐만요, 하나님은 그 어느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사랑이신걸요."
여러분 아닙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선지자도, 사도들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간 자들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당신들의 거역함과 죄때문에...
내가 대학들에서 강연할 때, 그들은 곧 지적하곤 합니다.
"아니오, 하나님은 미워할 수 없으세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요."
여러분,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미워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낙태를 미워합니다.
내가 거룩한 것을 사랑한다면, 거룩하지 못한 것들은 미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인들이 잊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많은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대개 청소년 부흥집회전에 준비기도를 많이 하죠.
하나님이 부흥집회에 역사해 주시라고.
그런데 그 기도 모음에 가기전에 여러분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TV프로그램을 즐기다가 갑니다.
그리고서는 기도회에 성령님이 왜 임재하지 않으시는지 의아해하고,
가짜 불과 가짜 흥분을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이 거기 함께 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것들은 가짜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존재이기 때문에 죄 많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오직 한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잘 들으세요. 오늘 여러분이 구원 받았다면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로마인과 유대인이 예수님을 박해해서도 아닙니다.
그의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았다면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그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에,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떨어져야 할 맹렬한 진노가 그의 독생자에게 떨어진 겁니다.
누군가는 죄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누군가는 죽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독생자를 죽이셔야만 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그를 상하게 하기를 원하였다"라 고 나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십자가는 우리의 값어치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상징해 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희생시켜야 할만큼 저희의 타락을 보여준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를 직접받으며 돌아가시고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시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음이라고 외칠수 있는 파워입니다!
자,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좁은문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어떻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때가 차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라고 하죠?
마가복음에 보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폴 목사님, 전 주님 영접기도를 해서 구원받았는데요"하고 물어보죠.
저도 여러분이 그렇게 하셨다고 믿어요. 하지만 당신은 어떤 마법의 법칙이나 누가 따라하라는 말을 따라 해서 구원 받은게 아니라 바로 죄를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받은 거예요. 그리고 예전에 한 번 그러는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금 말한 마가복음 구절을 제대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으니 때가 찾느니라 이제 너의 여생을 회개하며 믿으면서 살아라" 이겁니다. 한번 했다고 믿었다고 회개했다고 그게 끝이 아닙니다. [이것은 잘못 된 부분입니다. 회개는 인생에서 단 한 차례 일어나며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가 됩니다. 그 이후에는 성화의 삶이 있으므로 죄의 고백은 있으나 또 회개하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말에서 고백 대신에 회개하고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워셔 목사님의 Lordship salvation의 문제입니다. 다음에 이 부분을 자세히 논할 계기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워셔 목사님의 심정 즉 죄를 미워해야 한다는 심정만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DSJ]
문제는 계속 여러분이 지금도 죄의 회개를 하시냐는 겁니다.
여러분은 계속 믿고 계십니까?
왜냐하면 그분은 여러분에게 시작한 일을 끝내실 것입니다. 그분은 일을 끝내실 것입니다.
남침례교단인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이신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하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 잊은게 있습니다.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 그리고 부모님들도 잘 들으세요.
우리가 복음에서 정말 중요한 걸 잊어먹고 있는게 하나 있습니다.
성경말씀에 문만 좁은게 아니라 그 가는 길도 좁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영접기도시키고 주님께로 인도한 후 그들이 세상 사람처럼 살도록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만약 이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저는 통계자료를 가지고 와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설문조사나 통계를 봐도 미국에 사는 기독교인의 윤리와 도덕을 세상 사람의 기준과 비교하면 전혀 다른게 없다는 점입니다. 이건 통계입니다. 종교랑 상관없어요.
신학자와 철학자들그리고 사회학자들이 교회에 대한 책을 많이 씁니다.
도대체 기독교는 어디있냐고. 교회안에서 낙태도 교회밖에의 낙태처럼 많이 일어난다고요.
이혼도 그렇고 부도덕한것도 그렇고...
우리 모두 아는 것처럼, 어떤 청년들은 부도덕한 일을하고 있으면서도 오늘 예배에 참석해서 같은 호흡으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마약을 하면서 청년회에 계속 나오는 사람들도 있구요, 봐서는 안될 것을 보고, 해서는 안될 것들을 하면서도 청년회에 나오고, 자신들에 만족하고 자신들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는 그들을 보고 육적인 크리스천이라고 할뿐 그 아무도 이것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들은 진짜 크리스천인데 육적일뿐이라고.
바로 이게 몇십년 전부터 침례교단 신학교에 들어온 한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성경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적인 크리스천이란 건 없습니다.
"폴 목사님, 고전3장에 보면 바울이 육적 크리스천에 대해 말했잖아요"
아니죠. 그런뜻으로 말한게 아닙니다. 전체를 읽어야 합니다.
청소년들의 문제는 뭐냐면요 들어주세요.
우리의 기독교 정신은 기독교 티셔츠 뒤에 씌여진 흔한 말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독교 정신은 성경에서 오지 않고 찬양작곡자 같은데서 옵니다.
우리가 대게 진리라고 믿는 것은 성경에서 오는게 아니라 세상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어떤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천이면서 지속적인 악행과 육적인 삶을 계속 사는 것을 찾아볼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진정한 크리스천은 새로운 환경에 산다고 합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그들을 사랑하고 징계하며 지켜주시며 돌보아주시는 아버지가 있다는 겁니다.
제 마음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다 알고 있는거잖아요.
외식하지 말고 숨기지 말자고요.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을 알잖아요.
여러분 중에도 있고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람중에도 있잖아요.
그들도 다 청소년 모임도 오고 다 행하는 거 같은데 마음속으론 얼마나 부패했는지..빛이 없어요.
다른점도 없고요.
세상사람들이 하는 거 다 하면서 괜찮다고 하고..
친구들이여, 이건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들은 상급을 잃어버리는게 위험한게 아니라 지옥에 갈까 위험한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죠.
우린 뭘 가르치죠?
거기엔 좁은문만 있는게 아니라 가는 길도 좁다고 가르친게 도대체 언제였죠?
예수님은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좁은길을 걸어가라고 지시하셨죠.
미국에서의 진정한 크리스천의 증거는 뭔 줄 아십니까?
영접기도를 한 번 한것입니다. 놀랍지 않아요?
여러분이 자신의 구원에 확신이 없다고 하면 무어라고 합니까?
"영접기도 하셨나요?" 라고 묻지요.
성경에 보면 말씀을 통해 믿음안에 있는지 자신을 점검하고 시험하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하신다면 기독교는 달라질것입니다.
제가 지금 크리스천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얘기하고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요한일서에서 크리스천도 죄를 짓고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고, 빛 가운데로 걷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뭐가 다른 걸까요?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요?
제가 하려는 말은 만약 여러분이 진짜 다시 태어난(중생) 크리스천이라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의 삶의 방식이 의로움 가운데 살려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만약 의로움에서 벗어난다면 하나님 아버지가 오셔서 훈계하시고 다시 그 길 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좁은문을 통과했다고 하면서도, 대다수의 고등학생과 세상 사람들처럼 육적이고 악하며 편한 넓은 길로 살아간다면 성경은 여러분에게 심각하게 두려워해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구원 받았다고 평생 증거하는 분들이 두렵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했다면 저는 두렵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구원 받았다고 얘기하지 말고, 오직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말해야 합니다.
그들이 정말로 구원 받았는가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잊어버린게 있다면 구원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의 역사로 새롭게 태어난 크리스천은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성경말씀에 "누구든지 예수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다"
성경에 보면 좁은문과 좁은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5절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예전에 지혜로운 분이 저에게 이야기한 것을 여러분도 아셔야 합니다.
그분은 "폴, 너의 진정한 친구는 그대로 솔직히 말하는 사람이란다"했죠.
요즘 미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너무 눈치보느라 아무도 비난을 안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가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죠.
많은 목사님들과 리더들이 이 거짓에 속아넘어 갔습니다.
우리들은 상처주기를 원하지 않죠. 친구처럼 다가가길 원하죠.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겁니다.
만약 당신이 교회에서 누군가에게 친하게 대할 상대가 있다면 그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반응과 태도보다 하나님의 영광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또 하나 당신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에게 솔직하게 말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항상 여러분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하고 절대로 다된 밥상에 재를 뿌리지 않으며 당신이 박수치게 만들며 덩실 뛰게 하고 어지럽게하며, 즐겁게 해 줄것이며, 요즘 기독교를 이쁘게 포장해서 당신이 다니는 교회가 예수님보다 더 즐거운 롯데월드처럼 보이게 할 것입니다.
너무 여러분을 즐겁게 하느라 오늘처럼 이런 심각한 문제를 꺼내지 않겠죠.
바로 하나님이 내 삶에 계신지, 내가 거룩해지는지, 정말 다시 태어났는지 말입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만약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이 자신들이 구원받았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압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좁은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적다고 분명히 나와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구원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구원받았음으로 어떻게 확신합니까?
누군가 당신이 구원받았다고 말해줘서요? 영접기도를 했기 때문에?
믿기 때문에?
모두들 믿는다고 하는데 당신이 믿는지 어떻게 압니까?
당신이 그들과 다른걸 어떻게 압니까?
성경은 당신이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가르치는지 아세요?
50년전까지만 해도 침례교단에선 여러분의 구원 확신을 어떻게 확인했는지 아세요?
당신의 인생이 예전과 같지 않고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확인하죠.
그리고 당신의 삶이 하나님의 진리속에 걸어가는 걸 아는거죠.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길에서 벗어나듯이 그렇게 이탈하면 하나님이 오셔서 그길로 인도하십니다.
당신이 진정 다시 태어난 크리스천의 증거는 하나님이 여러분이 세속적으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 하고 세상처럼 감각적인 옷과 또 교회안에서 허락한 감각적인 옷차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거죠.
하나님은 당신이 세상처럼 행동하고 세상적인 냄새가 나고 세상처럼 말하고 세상에서 듣는 것을 허락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성경말씀 계속 읽어보면 16절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여기서는 거짓 선지자 말고도 평범한 사람들도 적용되는데요 그들이 진정한 크리스천인 줄 어떻게 아냐고요? 바로 그들의 열매로 입니다. 바로 그들의 열매로 입니다.
당신의 삶을 보세요.
당신이 걷는 걸 보세요.
당신이 어떻게 말하는지 보세요.
당신의 마음속의 열정을 보세요.
그속 어딘가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아니면 그는 그저 당신 삶속에 있는 하나의 악세사리입니까?
그분은 그저 수요일저녁과 주일에 한번 보는 분입니까?
아님 그저 머리속으로 인정하는 분입니까?
그가 악세사리입니까? 아니면 당신 삶 중심에 계시는 분입니까?
당신이 맺고 있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세상처럼 보이고 행동하나요? 세상에서 즐기는 그 기쁨을 여러분도 같이 즐기나요?
여러분은 죄를 사랑하며 즐기나요? 하나님을 거역하며 그것을 즐길 수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모르는 거예요.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하나님은 그들을 변화시킬 능력이있습니다.
잠깐 여기서 주님이 이 말을 전하고 여러분은 듣고 있는 중이라고 가장합시다.
예수님이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가시를 무화가나무에서 찾을 수 있느냐?"
여러분은 "에이, 주님 당연히 무화과나무에선 가시를 찾을 수 없죠"
"그럼 하나 더 물어보자."
"너희들은 좋은 열매를 가시나무에서 찾을수 있느냐?"
"당연히 못찾죠. 절대로 가시를 무화과나무에서 못찾고 좋은 열매를 가시나무에서 찾을 수 없죠. 만약 이런말을 하는 사람들은 다 거짓말하거나 미친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지금 내 제자라고 자칭하며 나쁜 열매를 맺는자들은 거짓말쟁이며 정신이 나갔다가고 말하는게 같은말이구나"
여러분 좀더 가장해 봅시다. 이 집회에 늦어서 헐레벌떡 강단으로 뛰어 올라온다고 칩시다.
그러면 모든 다른 목사님들이 화가나서 말씀하실테죠.
"폴 목사님, 이런 기회를 준걸 감사해야지 어떻게 늦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제가 말합니다. "목사님들,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무슨일이죠?"
"오는 도중에 고속도로에서 그만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타이어를 가는데 나사가 빠져 굴러가길래 나사를 주워서 일어나 보니까 내가 고속도로 한 가운데서 서 있고, 30톤짜리 통나무 트럭이 나를 향해서 170Km로 달려오더니, 나를 덮쳐 버린거예요. 그래서 늦었어요."
자, 두가지 경우밖에는 없습니다.
요새는 아무도 논리를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지만, 어쨌든 여기에는 두가지 논리적인 결론밖에는 없어요.
제가 거짓말쟁이이거나, 아니면 미친사람이거나.
목사님들은 "폴 목사님, 정말 말도 안되요. 그건 불가능해요. 통나무 트럭같이 거대한 물체와 부딪치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다구요?"
그럼 하나 물어봅시다. 뭐가 더 큰가요? 통나무 트럭이요? 아니면 하나님이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부딪쳤다고 하면서, 어떻게 완전히 변화되지 않을 수 있죠?
몇가지 생각해 봅시다.
내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거예요.
얼마나 여러번 여러분은 또 다시 헌신을 다짐합니까? 또하고 다시, 다시...
여러분들이 이런 집회를 갖고 불을 받고는 교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지속됩니까? 한 열흘쯤?
그리고 말하기를 "와! 정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어."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그게 지속되지 않는다면 그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예요.
그건 그냥 당신의 감정이었던 거예요.
다른 어떤건 될 수 있어도, 그건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 역사하셨나요?
그리고 지금도 계속 역사하고 계시나요?
그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19절 봅시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여길 주목합시다. 히브리인들의 문헌에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대게 우리는 어떠한 것을 강조하려고 할 때 흔히 목소리를 높이고 그에서 강조하고 싶으면 굵은 글체나 대문자로 쓰죠.
유대인들을 다릅니다. 그들은 무언가 강조하고 싶을때는 같은 말을 하고 또 합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악인은 땅에서 사라지고 악인은 멸망할 것이라는 것처럼 비유가 많습니다.
바로 여기서도 예수님이 계속 강조하고 또하는 것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그들의 가는 길로 그들을 알지니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그리고 주님은 누구든지 열매를 못맺는 자는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은 바로 어느날 세상에 임할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당신들에게 떨어질 수도 있는 심판의 날입니다.
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여러분의 마음 속을 알지 못합니다. 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고 속기 때문이죠. 그러나 절대로 속일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절대로 속일 수 없는 분. 그리고 그분은 요즘의 크리스
찬 문화에 속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모든 걸 아십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예수님은 21절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러분이 예전에 주님을 영접한 기도가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아세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래요, 지금 본문을 읽었죠? 생각해 보세요.
"나더러 주요 주여하는 자마다..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를 고백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그중에 한분입니까?
다시 히브리인들의 성경으로 돌아갑시다.
말씀을 보면 주라고 한번 부른게 아니라 주여 주여 하고 두번 불렀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은 갑자기 심판이 와서 예수님을 주라고 인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주라고 항상 외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걸어다니면서 외쳤고, 춤추면서도 주를 외쳤고, 찬양하며 주를 외쳤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라 하십니다.
여러분 .정말 사랑스럽고 친절한 분들 중 한분인 빌리 그레함 목사님을 아시죠?
그러나 빌리 그레함목사님은 교회를 다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전도집회 중에서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 중에 다만 5퍼센트라도 구원을 받는다면 자기는 행복하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작년에 나이지리아에 있을 때, 우리 교회 어떤 어머니의 아들의 장례식을 갔습니다.
무슬림에게 순교를 당했죠. 북나이지리아에서 누군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인정한다면 그건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알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백으로 죽을수도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미국에선...
대가를 아십니까? 생각하세요. 자신을 점검하세요. 성경말씀으로 점검하세요.
주님을 아십니까? 주님을 아시냐고요?
왜냐하면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보세요. 뭐라고 말하는지 잘보라고요.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어떤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에 대해서 다시 제대로 가르쳤으면 좋겠어요.
우리들의 신학은 뭘 하는거죠?
교리는 뭘하고 도대체 뭘 가르치는 겁니까?
그냥 날라가 버렸어요. 아무도 교리공부를 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저 ccm음악이나 듣고 티셔츠 뒤에 씌여진 ccm 가사나 읽으려고 하죠.
도대체 진리는 어디로 간거죠?
진리는 이겁니다.
당신이 만약에 다시 태어난 크리스천이라면,
삶의 스타일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며 사는 겁니다.
"오, 목사님은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군요"라고 여러분은 얘기하겠죠? 아니예요. 아닙니다.
나는 믿음의 증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고백은 여러분이 다시 태어난 크리스천이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인 거의 모두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바너설문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65-75퍼센트가 자신이 구원 받고 거듭난 크리스천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악한 짓을 하는 나라중 하난데 말이죠.
매일 4,000명의 아기를 죽이면서 75%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감사드리죠.
거듭난 크리스천이라구여?
여러분의 믿음이 가짜가 아닌 걸 어떻게 압니까?
바로 당신의 삶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을 따르지
않을 때는 성령님이 오셔서 말씀을 통해서 징계하시거나, 아니면 예수안의 형제자매를 통해서 여러분을
깨우치시고 다시 옳은길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여러분은 절대로 하나님에게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여러분의 목사님이라고 가정하고 여러분중에 14살짜리가 공원에서 불량청소년들과 놀고 있는걸 제가 새벽 한시에 집회 끝나고 오면서 본다면 저는 바로 차에 태워 그 아이의 아버지께로 데려 갈 것입니다. 그리고 전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화를 내며 "당신은 정말 무책임한 아버지군요. 이렇게 위험하게 애를 내버려두다니..."
여러분! 하나님은 무책임한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만약 당신이 죄의 안에서 놀며 세상과 세상의 것을 사랑하며 항상 세상 일에 얽혀있고 세상의 일을 하며 세상 사람들의 영웅이며, 그들처럼 보이고 그들처럼 행하고 그들이 행하는 것을 똑같이 행하면...
사랑하는 여러분, 저의 외침을 잘 들으세요.
만약 이런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고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결말로 갑시다. 21-23절을 보겠습니다.
22절에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 (마7:21~23)
여러분은 살면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여러분을 아시냐는 겁니다.
내가 조지 부시를 안다고 해서 내일 백악관에 가도 들여보내주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지 부시가 나와서 내가 Paul Washer 를 안다고 하면 저를 들여 보내 줄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안다고 고백할 수도 있죠.
그러나 당신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예수님이 당신을 진정 아십니까?
여기서 이 구원받지 못한자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봅시다.
"불법(anomia)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
그리스말로 anomia는 'a'는 부정사, 'nomos'는 법. 즉, 불법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말하겠습니다. 정확한 번역을 해 볼게요.
내가 내려가서 여러분을 껴안고 이 얘기를 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요. 잘 들으세요!!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내 제자라고 말하고 다니면서, 내가 너희에게 순종해야 할 법을 전혀 주지 않는 것처럼 사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입니다.
방금 제가 한 말은 북미 대다수의 크리스천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만약 누군가 율법에 대해 말하고 우리가 해야할 것과 하지말아야 할 것 그리고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 것과 어떻게 살지 말아야 할 것을 성경적인 원칙을 두고 말한다면 모두가 그를 율법주의자라고 난리를 칩니다. 율법주의자라고...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주께 순종해야할 법을 전혀 받지 않은 것처럼 사는 자들은 다 떠나가라고 했습니다.
요즘 미국 기독교는 그러죠.
"야호~ 문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만 괜찮아요. 그냥 육적인 크리스천
일 뿐이죠.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겠죠."
이런 잘못된 복음관 때문에 무슨일이 벌어지는 줄 아십니까?
여름성경학교에서 구원받은 수많은 아이들의 대부분이 15살이 되면 다시 세상속으로 들어가서 마귀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 중엔 아이 서른쯤에 다시 주께 헌신하며 돌아오는 사람도 있겠
죠. 어쩌면 겨우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구원은 주님을 인정하고 간증했다고해서 받는게 아닙니다.
사탄마저도 예수님을 주라고 인정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진정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말씀 후에 두 사람, 두 집의 기초에 대하여 또 이야기 하십니다.
이 비유가 요즘 기독교..이래서 신학을 공부하고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돌과 모래의 요즘 기독교의 해석은 이렇답니다.
만약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면 당신의 삶을 반석위에 세워야합니다.
만약 모래위에 세운다면 당신은 행복하지 못할거고 당신의 삶은 옳은 방향으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제겐 역사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된 적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아세요?
거기엔 두가지 길이 있습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
여러분은 어느 길에 서 있습니까?
그리고 두 종류의 나무가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어서 천국에 가는 좋은 나무가 있고, 나쁜 열매를 맺기 때문에 나쁜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는 잘리고 불에타서 지옥으로 갑니다. 그리고 사람중엔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있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지옥을 가는 이유는 행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부족함이 행함이 없는 걸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시죠.
이것은 두 개의 다른 기초에 집을 짓고 있는 두 명의 크리스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건 다시 말하듯이 한명은 구원받은 자고 한명은 구원받지 못한자의 비유입니다.
구원받지 못한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는 기울이지만 기초를 깔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집의 기초가 되는 걸 전혀 발견하지 못합니다.
만약 숫자에 상관없고 우리가 여태 한말에 상관없이 이 비유를 남부침례교인들에게 비교해서 이렇게 물어 본다고 가장합시다.
"당신의 결혼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둡니까?"
"당신의 아이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키우나요?"
"당신의 재정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관리하나요?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과 다르게 살고 계십니까?"
이런 질문들을 한다면 얼마나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나요?
그들은 "됐네. 난 고백했다구!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말이지. 내 주일학교 선생님이 가르쳐줬다"고 말하겠죠.
오, 여러분...제 아는 분중에 레이븐 힐씨는 제게 말했습니다.
"저도 예전에 이런 침례교회에서 설교한 적이 많이 있어요"라고.
저도 오늘 여기서 사탕발린 말만 사전에서 골라써서 여러분을 놀랍게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을 붕뜨게 만들어서 날아갈 것 같은 설교를 할 수도 있었죠.
또 여러분을 웃게 할 이야기도 할 수 있었고 할머니와 강아지 이야기를 해서 여러분을 울게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기에 전 여러분을 너무 사랑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인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구원을 못 받았다는 걸 압니다.
지금 여기서 여러분들 중 "나는 구원받았어. 우리 청년부 회원이랑 다른게 없는걸?"
여러분! 당신의 청소년 그룹도 안전하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여러분중 "난 우리 부모님같고 우리 교회 장년부 그리고 집사님과 목사님과 같은데요?"
도대체 이런게 무슨 상관이죠?
앞으로 주님이 오는 날에는 그들에게 심판받는게 아닌데요?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저의 자녀 같습니다.
그리고 이중엔 커서 목사가 되어 사람들 앞에 서서 "이제 이런건 그만! 성경말씀에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하는지 봅시다! 성스러운 성령의 불앞에 당신의 인생은 떳떳하게 설 수 있습니까?"라고 선포하는 아이들도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소녀여, 사랑하는 소년이여!
그 마지막 날에도 당신의 신앙 고백이 유효합니까? 유효합니까? 당신은 구원 받으셨나요?
저는 여러분중에 "아마도 내 생각에 난 구원받은 것 같아" 이런 걸 말하는게 아닙니다.
여러분 어떤길이 사람에게는 바르게 보일 수 있으나 죽음으로 몰고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전 제 마음 깊은데서 제가 구원받은 걸 느끼는데요"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선 마음이 부패해서 그 아무도 그 속길을 모른다고 한 걸 읽어보셨나요?
성경말씀에 나온 간증을 읽어 봐야
2009-06-03 15:14:04 | 김학준
자꾸 웃음이 나는 이유는...........ㅋ
2009-06-03 15:13:33 | 장영희
자매님의 글을 읽고 도전도 되고 가슴이 뜨거워졌어요..하나님의 말씀은 글자가 아닌 생명력을 가진 입김이니, 자매님의 마음이나 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큰 힘을 가진것 같아요..지금도, 힘들고 지칠때도, 함께 손잡고 한 마음으로 서로 위로하며 끌어주며 같이 가자구요^^
2009-06-03 13:03:11 | 정승은
도준이, 도이 입이 가장 크구나. 모두 하나님의 사랑 안에거 건강히 자라기를 기도한다.
2009-06-02 22:42:11 | 관리자
아이구 귀여워라. 좀 더 친구들이 많으면 좋겠지. 또 자주 놀러 가자.
2009-06-02 22:40:33 | 관리자
힘드신데도 끝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동을 통해 몸이 건강해지길 기도합니다.
2009-06-02 22:38:48 | 관리자
주의 만찬에 대하여
주의 만찬은 침례와 더불어 우리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규례(ordinance)입니다. 규례란 쉽게 이야기해서 법규입니다. 보통 소방 법규, 공공기관의 조례 등을 나타낼 때 'ordinance'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그분의 재림 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주의 만찬을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의 만찬에 대해 오해가 있으므로 이것을 성경적으로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간단히 글을 적습니다.
● 주의 만찬의 제정 시기
주의 만찬은 신약 성경의 첫 세 복음서 - 공관 복음서 -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26:26-30; 막14:22-26; 눅22:17-20). 이 규례는 우리 주님께서 배반당하시던 저녁에 친히 제정하신 것입니다. 고전11 장에서 사도 바울은 주의 만찬의 의미를 잘 설명해 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해 준 것은 또한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바로 그 밤에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나누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부서진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또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잔을 집으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셨느니라.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3-26).
천주교나 개신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을 행하면서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읽고 그것을 주의 만찬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은 주님께서 배반당하던 날 밤에 정하신 것이므로 그보다 훨씬 이전에 있던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 6장은 주의 만찬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천주교회에서는 요한복음 6장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화체설 교리 즉 빵과 포도즙이 사제의 축도로 예수님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한다는 거짓 교리를 주장하지만 이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은 단 한번도 요한복음 6장을 사용해서 주의 만찬을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조만간 출간될 「마틴 로이드 존스의 천주교 사상 평가」에서 아이언사이드는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서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관심 있는 독자들은 2003년 1월에 출간되는 그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주의 만찬의 배경
주의 만찬은 구약 시대의 유월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드신 음식은 다름 아닌 유월절 음식이었습니다. 유월절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미리 보여 주었고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5장에서 이 점을 요약해서 잘 보여 줍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뜨게 함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고전5:6-8).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만찬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을 크리스천들이 지켜야 할 규례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그것을 행하라고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들이 그것을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주(週)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나누려고 함께 나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행20:7).
형제들아, 너희가 모든 일에서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규례(規例)들을 전해 준 대로 그것들을 지키므로 이제 내가 너희를 칭찬하노라......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 26).
● 주의 만찬이라는 용어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주의 만찬이라는 성경 용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성만찬'이라는 천주교 용어를 사용합니다. 천주교에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행해야 하는 일곱 가지 성례 혹은 성사(sacraments)가 있으며 그 중 하나가 바로 성체 성사 즉 '성만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그 기원이 천주교의 성체 성사 제사인 미사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은 이런 천주교 용어를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의 만찬(Lord's supper)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 주의 만찬의 의미
주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곧 잊어버리므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뜻으로 주의 만찬이라는 시청각 교육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화체설이라는 마귀의 교리를 가지고 예수님의 단순한 복음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미사가 '피 없이 반복해서 드리는 제사'라고 분명히 말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단 한 번 영원한 속죄를 이루셔서 더 이상 죄로 인해 우리가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의 성직자들은 제사장(priest) 혹은 사제라 불리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아직도 구약의 제사장 체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제가 미사를 드릴 때 빵 조각(host)을 진짜 예수님의 몸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 빵 조각(성체)을 먹는 자는 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것이라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또한 그 빵 조각 안에 무슨 신비한 요소가 있으므로 그것을 먹지 않는 사람은 은혜에서 떨어져나간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개신교회 안에서도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그 빵을 먹이려고 예배 시간에 애들을 찾고 부산을 떱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주교인들은 교회와 사제의 권위 아래 묶어 두려는 마귀의 계략이며 성경은 그 빵 조각 안에 아무런 신비적인 요소도 들어 있지 않으며 단지 이 만찬을 통해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주의 만찬의 참석자격
이 규례의 이름이 "주의 만찬"이므로 누구든지 구원받은 사람은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구원받지도 못한 아이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먹이느라 애쓰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이것은 주의 만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천주교의 미사에서처럼 그 안에 무슨 신비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범하는 큰 실수인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의지를 가지고 선과 악을 구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에 이르기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회계보고할 의무가 없습니다. 즉 회계보고할 수 있는 나이에 다다라야만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론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지만 지역 교회의 특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대부분 주의 만찬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므로 지역 교회가 정한 내규에 따라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구원받았어도 지역 교회의 내규 - 예를 들자면 침례를 받은 자만이 참여한다는 것 - 를 지키지 못해서 참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결코 불평이나 시비의 요소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므로 각 교회의 필요에 따라 질서 있게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전 11장에 있는 문제들이 교회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 주의 만찬의 빈도
주님의 승천 이후의 첫 오순절이 지난 뒤에 예루살렘에서는 믿음을 고백하는 군중들을 위해 가정 예배나 모임이 있었으므로 매일 주의 만찬을 행했습니다.
또 날마다 한 마음이 되어 성전에 거하고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빵을 나누면서 단일(單一)한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들의 음식을 먹으며(행2:46).
주의 만찬은 보통 '빵을 나눈다'(breaking of bread)는 말로 표현되는데 사실 초대교회의 초반기에는 매일같이 빵을 나누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것을 굳이 '빵을 부순다'로 해야 한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관용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위의 성경 구절이 이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빵을 나누는 일'이 곧 '음식을 먹으며'로 해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서는 매일 모여 주의 만찬을 나누고 음식을 먹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44절에 있는 대로 그들이 모든 물건을 공통으로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100% 유대인이었으며 -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은 행10장의 고넬료 사건이 처음임 - 이들은 말라기 3장 말씀에 따라 언제라도 자신의 주님이 성전에 돌아오리라는 기대감에 차 있었으므로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성전에 모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스데반 사건을 통해 다른 곳으로 흩어버릴 때까지 성전에 머물렀으며 심지어 사도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성전에 머물렀습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使者)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주(主)가 갑자기 자신의 성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가 기뻐하는 언약의 사자라. 보라, 그가 임하리로다. 그러나 그가 임하는 날을 참고 기다리는 자가 누구리요? 그가 나타나는 때에 설 자가 누구리요? 이는 그가 정련(精鍊)하는 자의 불과 같고 세탁하는 자의 비누와 같기 때문이라(말3:1-2).
따라서 이런 구절을 들어 교회에 모든 것을 바치라고 주장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다른 시대에 속한 것을 이방인 교회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15-20년이 지나서는 매주 만찬을 행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주(週)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나누려고 함께 나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행20:7).
여기서도 그들이 단순히 주의 만찬만을 나눈 것이 아니고 음식을 먹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11절 참조).
그런데 그 이후에는 회수에 대한 언급이 없고 단지 고전 11:26에 마지막으로 만찬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6).
어떤 이들은 "이 빵을 먹을 때마다"(as often as ye eat this bread...)라는 표현에서 'often'이라는 단어가 '자주'를 의미하므로 이것을 가지고 '모일 때마다'로 해석하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as often as'가 단 두 번 나옵니다. 이곳 말고는 계11:6에 나옵니다.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자기들이 대언하는 날들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들을 피로 변하게 하며 언제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모든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계11:6).
These have power to shut heaven, that it rain not in the days of their prophecy: and have power over waters to turn them to blood, and to smite the earth with all plagues, as often as they will.
여기서 알 수 있듯이 'as often as'의 'often'은 일차적으로 '자주'라는 뜻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as often as'는 '매번 할 때마다'의 뜻입니다. 물론 고전 11장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도 주의 만찬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에 주의 만찬을 의미 있게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회수가 중요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룹에서는 주의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며 예배의 꽃이 주의 만찬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often'이라는 단어가 '자주'를 의미하므로 예배 때마다 주의 만찬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여기의 'often'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저희는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배(worship 혹은 service)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예배에는 찬양도 있고 말씀도 있고 기도도 있고 헌금을 드리는 것도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이 영혼 구령임을 감안할 때 예배에 참석한 자들 가운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위한 구령의 메시지와 성도들을 위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말씀 선포를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전담 사역자가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 많은 시간을 들여 선포할 말씀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물론 필요에 따라 시청각 교육을 위해 주의 만찬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찬 자체가 예배라는 주장은 성경에 없는 사람의 전통입니다.
그러면 이런 전통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것을 주장하는 ○○ 교회는 다비가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비는 성공회 교인이었으며 거듭난 뒤에 성경을 연구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크리스천입니다. 하지만 그는 천주교와 비슷한 성공회의 관습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천주교회나 성공회에서 하듯이 모일 때마다 미사를 드리는 것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장하며 모일 때마다 주의 만찬을 하게 했고 그 결과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미사가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천주교나 성공회의 주장과 동일한 것입니다. 물론 천주교회에서는 미사를 드릴 때 여자들이 너울을 써야 하므로 ○○ 교회에서도 같은 규례를 만들어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다비의 용기와 지혜와 명철을 존경하지만 성경에 어긋나는 가르침은 배격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종종 사람의 전통을 교리로 만드는 일을 했으며 다비 역시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인간 창시자가 있는 교단이나 교파는 어쩔 수 없이 그 창시자의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루터교, 감리교, 장로교 등은 인간 창시자가 있으므로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 침례교인들은 예수님 외에 다른 창시자가 없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오직 성경만을 따르므로 과감하게 '성경신자'(Bible believer)라 부르는 것입니다. 오직 감리교인, 장로교인 등은 성경에 없는 말입니다. 오직 침례성도 즉 'Baptist'라는 말만 성경에 14회 나옵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용어요, 자랑스런 용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가 주의 만찬의 회수를 정해서 성도들이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잊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성경적인 교회들이 평균 일년에 4-6 회 정도 주의 만찬을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주의 만찬의 요소
주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결코 자기의 진짜 살을 먹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주의 만찬의 요소들 즉 빵과 포도즙은 그분의 부서진 몸과 그분의 흘린 피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떡 같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빵을 사용하면서 그것을 떡이라고 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고쳐야 합니다.
(1) 누룩없는 빵
유대인들의 유월절 기간에는 반드시 일 주일 동안 모든 집에서 누룩을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요, 그 첫째 날에 너희 집에서 누룩을 제거할지니 이는 누구든지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누룩 있는 빵을 먹는 혼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임이라(출12:15).
이렇게 한 이유는 성경에서 대부분 누룩이 죄의 상징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고전5:7-8).
그러므로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많은 교회들이 카스테라나 누룩이 들은 일반 빵을 사서 주의 만찬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주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인 것입니다. 또 천주교회에서 쓰는 성병(성체)을 대량으로 사서 쓰는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우상 숭배용 빵 조각을 기독교인들이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의미만 알고 그분을 기억하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징물이 바른 것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 안의 의미를 알 수 없으며 알면서도 이렇게 행하면 위선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요즘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서 신자들을 앞으로 하나 하나 나오게 하고는 빵 조각을 친히 입에 넣어 주는 목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천주교 사제나 하는 일이지 기독교 목사가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증한 행위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2) 누룩없는 포도즙
빵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순수한 피를 상징하는 포도즙 역시 누룩이 들지 않은 순수 포도 주스여야 합니다. 포도주는 이미 누룩이 들어가서 포도즙이 발효된 것이므로 순수한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성경대로 믿는 무리들이 이런 이유로 포도주스를 사용합니다. 단지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프로테스탄트 교단들만이 전통을 따라 포도주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큰 실수입니다. 또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마지막 만찬에서 사용된 음료가 "포도 열매에서 난 것"이라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6:29; 막14:25; 눅22:1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함께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26:29).
천주교에서는 포도주를 쓰면서 신자들에게는 그것을 주지 않고 사제들이 다 마십니다. 이것이 어찌 바르게 주의 만찬을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몇몇 그룹에서는 한 잔에서 마셔야 한다는 주장 하에 큰 그릇이나 잔에 포도주를 담고는 남녀가 함께 마시면서 입 자국을 지우느라 분주합니다. 이렇게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D. L. 무디의 말대로 크리스천들은 상식의 침례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식 수준에서 질서를 지키며 의미 있게 주의 만찬 규례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 주의 만찬 시 주의사항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야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고전11:27-28).
어떤 사람들은 여기 나오는 "합당하게"라는 단어를 너무나 극단적으로 해석합니다. 사실 주의 만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크리스천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 나오는 표현은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죄 문제와 상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 앞서서 크리스천은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것들을 고백하고 버려야 합니다. 그 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주의 만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주의 만찬이 엄숙한 시간이기는 하지만 너무 딱딱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그 시간은 큰 기쁨의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의 만찬의 유효기간
주의 만찬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만 행하는 잠정적인 규례입니다. 그 이후에는 어린양의 혼인 만찬이 우리 믿는 성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9-06-02 18:09:14 | 관리자
사도신경
사도신경(Apostles creed)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a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sitteth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Ghos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life everlasting. Amen.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며,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사도신경은 대부분의 개신교회에서 주일마다 암송하는 신앙고백문입니다. 현재 국내에서도 사도신경은 개혁 교회와 근본주의 침례교회 등에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혹은 천주교 산물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의 주류 교회인 침례교회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전혀 암송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런 것들을 예배 시에 암송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시각이 있으므로 이 문제는 조금 신중히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사도신경은 주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시고 처녀 마리아에게서 성령님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심과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수난, 부활, 심판을 고백하는 것이므로 이것 자체가 무슨 문제가 된디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암송하는 사람도 주를 위해서 하고 암송하지 않는 사람도 중언부언으로 생각하여 하지 않음으로 역시 주를 위해서 안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가지고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사도신경의 몇몇 문제와 용어를 설명하려 합니다.
다음은 영어 사도신경과 카톨릭 사도신경, 개신교회의 사도신경을 비교해서 보여 줍니다.
(1) 동정녀에 대하여
영어 원문에 보면 동정녀가 'Virgin'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시면 알지만 신성을 나타내는 하나님(God), 그리스도(Christ), 성령님(Holy Ghost) 등만 해당 단어의 첫 글자가 대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마리아는 한 처녀(a virgin)이지 결코 하나님의 어머니인 평생 동정녀(the Virgin)이 아닙니다. 이 부분은 천주교회의 잘못된 믿음에서 나왔으므로 암송하더라도 뜻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2) 그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삭제됨
영어와 원어에는 `He descended into hell`이 있지만 개신교 사도신경에는 이 부분을 삭제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그분이 저승에 갔다고 버젓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원래 표현대로라면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된 사흘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소위 카톨릭주의에서 말하는 연옥설과 림보설 등과 연관되기 때문에 아마도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교회의 교리에 따라 해석하려고 해서 생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에 보면 주님은 요나와 같이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대해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27절에서 시편 16편 8-11절을 인용하며 "주께서 내 혼을(예수님의 혼) 지옥에 남겨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시리라"고 말하면서 우리 주님(엄밀하게는 그분의 혼)이 지옥에 갔다가 부활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우리말 성경은 이럽 부분의 지옥을 모두 음부라고 해서 뜻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의 강도에게 약속하신 대로 낙원에 즉 지하세계의 지옥 부분에 내려갔다가 올라오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에베소서 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k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9 (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으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10 내려가신 그분께서 또한 모든 하늘들보다 훨씬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3) Holy catholic church
영문에는"거룩한 카톨릭 교회" 혹은 "거룩한 우주적/보편적 교회"로 되어 있으나 한글번역에는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나 "거룩한 공회"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공회는 "공적인 일을 위한 모임"(assembly)이나 종교 회의의 의미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church" 의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이런 해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2세 교포 아이들(영어만 할 줄 아는 아이들)에게는 이것이 더 치명적입니다. 부모를 따라 장로교회에 가는데 주일마다 예배 때에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해야 하니 이 아이들의 영적 고통이 심각하지요. 그래서 똑똑한 아이들은 부모나 교회에게 묻습니다.
5세기의 [로마 교회 구 신조]에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거룩한 교회(the Holy Church)를 믿사오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8세기 개정 신조에는 거기에 "카톨릭을 첨가하여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사오며"로 표현했습니다. "카톨릭"(catholic) 의 뜻은 본래 "보편적" 혹은 "세계적"(universal) 이란 뜻이어서 일반적으로 쓸 경우에는 구태여 로마 카톨릭(Catholic) 교회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세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높히기 위해 인위적으로 삽입한 흔적이 보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공회"를 예수님의 지체되는 "거룩한 교회"로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교회가 거룩할까요?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고 말 그대로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이 과연 거룩할까요? 물론 재림 이후에 주님 앞에 설 때에는 거룩하겠지요.
(4)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성인의 통공)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성도들이 서로 영적으로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을 성도(聖徒.saints)라고 합니다(고전1:2).그러나 카톨릭교회에서는 죽은 카톨릭의 신앙적 영웅을 성인(saint)으로 만들어서 일반적인 의미의 성도(saint)를 신성시 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교제"를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성인숭배와 죽은 사람에게 기도하는 교리적 근거로 오용하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인은 죽은 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후에야 특별 심의를 거쳐서 서품(敍品)되는 비성경적인 개념이고 죽은 자와 교통하는 일은 사탄의 속임수로서 성경은 이것을 엄격히 금합니다. 천주교회에서는 이런 성인들이 공덕을 넘치도록 쌓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들의 통공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과 위의 Holy catholic church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진영이 동상이몽으로 해석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5) 저리로서
참고로 저는 중학교때에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서 `저리로서`가 무엇인지 몰라 선생님에게 질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지금도 사도신경을 매주 외우연서도 이 표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리로서`라는 말은 "그곳"이라는 옛 말에다가 조사 "-으로부터"에 해당되는 옛 표현입니다. 이 말은 바로 그 위의 구절 즉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것을 가리키며 바로 거기로부터 다시 땅에 재림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저리로서"를 "하늘로부터"로 바꾸어 이해하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잘 표현한 훌륭한 신앙고백서지만 몇몇 부분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고 특히 카톨릭주의가 많이 가미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신경을 외우는 사람들을 무조건 수준 낮은 사람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모르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뜻을 바로 알려주고 각자가 주님 앞에서 판단할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2009-06-02 18:05:54 | 관리자
주기도문
● 정동수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주일마다 예배 때에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또 소그룹 모임 등에서도 모임을 끝맺을 때에 거의 대부분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런데 침례교회가 주류인 미국에서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절대로 외우지 않습니다. 한국의 경우 이단을 감별(?)해 주는 연구소들이 몇 있는데 어떤 단체가 이단인가 아닌가를 감별하기 위해 이들이 내세우는 몇 가지 감별 방법 중의 하나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는가, 외우지 않는가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지몽매한 일로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하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국의 전통이 이단 판별의 기준이 된다면 주님의 말씀은 어디로 갔을까요? 한 번은 이런 단체의 소장이 미국에(호주에) 가서 이것을 주장하다가 그곳의 교민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고 잘못을 시인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민자들 가운데는 미국 사회의 영향으로 침례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도 최근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들만이 진리를 알므로 그것을 외우는 형제자매들을 불쌍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외우고 안 외우고가 교만의 문제로 비쳐지고 안 외우는 교회만이 참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주기도문의 유래와 특징 등을 살펴봅시다.
<개역성경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흠정역 성경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빵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흠정역).
1. 주기도문의 이름과 유래
주기도문은 실제로 주님이 기도하신 기도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에 대해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5 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보상을 받았느니라.
6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7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너희는 이교도들과 같이 되지 말라. 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
이 부분이 끝난 뒤에 너희는 이처럼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기도해야 할 샘플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제목은 ‘제자들의 기도’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항상 ‘하늘에 게신 내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2. 주기도문의 오용
근본적으로 이교도들은 8절 말씀에 있듯이 말을 많이 하면 신이 기도를 듣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중, 신부, 수녀 등이 묵주를 들고 똑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교도들의 특징이며 그 당시 유대인들도 이런 관행에 빠져 있었으므로 주님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이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모임에서든지 끝날 때에 반복적으로 이 기도를 외우는 것은 주님의 의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또 어려움을 겪을 때 주기도문을 많이 외우면 문제가 풀린다는 주장도 이교도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즉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목석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런 쓸데없는 반복 기도를 지겨워하십니다.
3. 미국의 침례교인들은 왜 주기도문을 하지 않는가?
이 기도에는 신약 시대 구원의 교리와 상반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엄밀한 의미에서 이 구절은 율법의 요약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면 그 대가로 주님이 무엇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1차적으로 율법 하에서 율법의 의무를 지닌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의미 없이 외우다가는 연약한 지체들이 구원의 은혜를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부분이 더러 나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시편 51편을 사랑하여 외운다고 합시다. 밧세바와 간음한 이후에 책망을 받은 다윗이 자신의 참회의 심경을 여기에 적었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이지만 다음 부분은 우리가 따를 수 없습니다. 11절에는 “나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역성경은 이것을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라고 기록합니다. 국내에는 이런 부분을 그대로 담은 복음성가가 유행하므로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통해 주님께서 성령을 거두어가는 일이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구약시대에나 가능하지 신약시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한 번 구원 받으면 신자 내에 성령님이 영원히 내주합니다. 이것은 마치 “한 번 해병대면 영원히 해병대다”라는 구호와 비슷합니다, 아마도 해병대가 성경에서 이런 구호를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한 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웝받습니다!’ 절대로 성령님이 신자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여전히 구약 시대에 사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도 이 경우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이후에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로 값없이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미국 침례성도들은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습니다.
4. 천주교 주기도문과 개신교 주기도문의 차이
천주교인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구절이 없는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 성경 번역의 본문인 바티칸 사본이 신약시대 다수 성도들이 사용한 본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의 마태복음 6장 13절에 보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은 고대 사본에 없는 구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각주 참조). 그 고대 사본이 바로 바티칸 사본입니다. 그러므로 카톨릭 신자들은 이 부분을 외우지 않습니다. 그들의 원본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이럴 수 도 없고 저럴 수도 없으므로 그냥 괄호를 쳐서 중간 지점에 머물고 있습니다.
5. 주기도문에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에서 <대개>는 무엇을 뜻합니까?
한국 기독교(개혁신교)에서는 과거에 <대개>를 넣기도 하고 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이 부분에서 어떤 사람은 <대개>를 붙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빼기도 합니다.
그럼 넣어야 맞을까요, 아니면 빼야 맞을까요? 이에 앞서서 더 큰 문제는 그 뜻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호티'라는 헬라어 접속사(영어로는 for)가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왜냐하면'입니다. 즉,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대개>로 번역을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말로 번역을 할 때(1930년대) '중국어 성경'을 참조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중국어 성서에서 <大槪, 大蓋>로 번역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대개는 "대체적으로" "대략적으로" 그런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중국의 성경도 <以, 또는 因爲>로 번역하여 바로 잡았습니다. 우리 한글 번역본에서 1936, 1933년 신약성경 번역본에 <대개>로 썼다가 그 뒤, 그 번역이 원문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대체로"라는 뜻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아예 생략하여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주기도문에는 아직도 "대개"가 들어가 있습니다.
6. 그냥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왕국이 임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일러 준 기도의 핵심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땅에 임하는 ‘하늘의 왕국’이 이 기도의 핵심 주제입니다. 이 하늘의 왕국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닙니다. 추후에 왕국이나 천년왕국 부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주기도문을 외우시는 분들이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바르게 행하면 좋겠습니다. 즉 의미 없이 예배나 모임의 끝에 붙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외우지 않는 분들도 외우지 않기 때문에 극도의 자만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라는 구절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또 마땅히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또 구원받은 성도로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라는 구절의 의미를 잘 이해하면 남을 배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 자체를 천년왕국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하며 용서와 긍휼을 베풀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알기 때문에 더 큰 정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알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행해야 합니다. 낮은 처지의 형제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2009-06-02 18:02:50 | 관리자
자기 성찰
● 정동수
청교도 목사들의 지침서 중 하나는 리처드 백스터의 참목자상(Reformed pastor)입니다. 목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고전입니다. 다음은 그 책의 일부입니다. 목사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글이므로 깊이 묵상하며 은혜를 받기 바랍니다.
참목자상(리처드 백스터, 최치남 옮김, 생명의 말씀사)
1. 자아 성찰의 내용
1) 구원의 은혜의 역사가 자신의 영혼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라.
가장 성결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일을 가장 충실히 배우는 사람이며, 성결한 사람만이 그 일을 온전히 배우고 익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위대하며, 그 안에 있는 즐거움을 아는 모든 사람은 이를 열심히 추구합니다. 그들의 추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만드신 창조주를 위해서입니다.
신학의 핵심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철학의 어리석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2)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에 만족하지 말고, 그 은혜가 활기차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보라.
무엇보다 그대는 은밀한 가운데 기도와 묵상에 힘쓰십시오. 하늘의 불을 받아 희생의 불꽃을 피우십시오.
3) 행동이 자신의 가르침과 배치되지 않는지 보라.
자신의 혀로 한 말을 그 생활로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은 자기가 말한 대로 행동합니다. 저들은 설교는 정확하게 하려고 애쓰면서 삶은 정확하게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강단 위에서만 목회의 목적을 찾으려 한다면, 강단을 떠나 있을 때는 목회자임을 포기하는 셈이 됩니다. 설교 잘하는 목회자 뿐만 아니라, 행동 잘하는 목회자가 됩시다.
첫째, 아무 흠 없이 행하여 그대의 순전함을 유지하십시오. 적어도 사람들의 편견을 없애는 일에 있어서는, 그대가 겸손과 온유와 자기 부인의 덕스러운 본을 보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대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몸을 낮추어 겸손히 대하십시오.
둘째, 자선 사업을 풍성히 하십시오. 미누키우스 펠릭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심이 없는 자가 주님께 기도합니다. 사람을 위험에서 건져내는 자가 풍성한 희생 제물을 제공합니다. 이들을 우리의 희생 제물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합니다. 이처럼 우리 가운데 가장 독실한 자는 자신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4) 다른 사람의 죄는 지적하면서 자신은 혹시 그런 죄에 빠져 있지 않는지 보라.
그대는 스스로 조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매일 그대가 경고하고 비난하는 죄에 자신이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말로는 죄를 굴복시키고 실제로는 죄를 굴복당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5) 자신의 사역에 필요한 자격 요건을 갖추기 꺼려하지는 않는지 보라.
그대는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신비로운 일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므로, 지식에 대해 어린 아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양들에게 부지런할 것들을 가르치듯이, 우리 역시 부지런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공부하고, 기도하고, 모여서 토의하고, 실천하십시오. 나태함으로 인해 연약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하십시오. 그대의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십시오.
2009-06-02 17:58:21 | 관리자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 서문
● 정동수
목사가 되어 가장 크게 도전을 받은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이다. 매일 묵상을 하고 죽을 때까지 묵상해도 좋은 크리스천 클래식이다. 물론 성도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은 그 책의 서문이다.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서문
호라티우스 보나 지음 / 안보헌 옮김(생명의 말씀사)
우선 기독교 사역의 보물급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소개할 수 있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 호라티우스 보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로, 1808년 12월 19일 에든버러에서 태어났으며, 1889년 7월 31일 이 세상을 하직했다. 이처럼 그는 지나간 세대에 속한 사람이지만, 그의 책은 시간을 초월하여 지금도 널리 애독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1866년 켈소 교구와 그 후의 에든버러의 필요에 적절했던 만큼 오늘날의 필요에도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설교자요 우리가 애송하는 찬송가도 몇 곡 작사한 사람이지만, 무엇보다도 전도자(winners of souls : '구령자'라고 번역함이 옳으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전도자'로 옮김-역자 주)였다. 그는 후에 자기 교단의 총회장이 된다.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방법에 대해 쓰여진 이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그가 지은 많은 찬송가 중에 특별히 세 곡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첫번째 곡은 "나 주의 음성을 들었네"라는 찬송가로, 그 자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기에 그런 가사로 시작되는 찬송가를 지을 수 있었다(한국 찬송가 467장, "내게로 와서 쉬어라 너 곤한 이들아 내 품에 와서 안기라 주 말씀하셨네").두번째 곡은 성찬식 때 부르는 "오 나의 주님 친히 뵈오니"라는 찬송가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통해 예수님께 인도되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새로운 헌신을 다짐했는지 모른다!
전도자들에게 주는 그의 충고는 아주 영적이요 신령하며 엄중할 뿐 아니라, 그 일이 몹시 시급함을 촉구하고 있다. 이 사실은 그의 세번째 곡 "가서 일하라, 온 힘을 다해"(Go Labor On, Spend and Be Spent, 한국 찬송가에는 수록되지 않음-역자 주)라는 찬송가에 잘 나타나 있다. 목사라면 누구나 다 이 찬송가의 3절을 표어로 만들어 책상에 붙여 놓아야 할 것이다.
어둔 밤 쉬 오리니
낮에 일하라
부지런히 일하고 놀지 말아라
놀면서 영혼을 구할 수는 없다.
이 책은 허송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나 주님의 게으른 종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전도자들을 위한 책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조사해 보게 만드는 책이요, 매일의 임무를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새로운 용기를 주는 책이다.
지금은 허송 세월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인생은 짧고 죄는 문 앞에 엎드려 있는데
우리의 연수(年數)는 한 잎의 낙엽이나
눈물 방울만큼 짧으니,
농이나 하며
허송 세월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마음을 가다듬어 주님에 대한 헌신을
재다짐해야 할 것이다.
그 짧은 인생이나마
여러 번 사는 것도 아니요
단 한번 살 뿐이다. 오직 한번.
그러니 얼마나 거룩하게 살아야 할까!
매순간 단축되고 있는 그 짧은 일생을
우리의 복된 수고로
가득 채워야 할 것이다!
2009-06-02 17:54:04 | 관리자
여전히 한 군데가 있다
● 정동수
교회로 인해 답답한 심정을 가진 채 몸부림치고 있는 지금,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보내온 글이 내 마음에 위로를 주기에 약간 다듬어서 올립니다. 아마도 저의 심정과 비슷한 심정을 가진 분들이 있다면 동감이 갈 것입니다. 2008년도에는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응답을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전히 한 군데가 있다.
나는 마음에 큰 부담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사실 부담이 너무 커서 어디부터 기도해야 할지 나도 잘 몰랐습니다.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나는 오늘 정말로 주님이 필요합니다. 부디 내가 갈 수 있는 교회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바른 것을 행하기 위해 권능을 가지고 굳게 서 있는 교회 말입니다. 율법적인 교리와 사람의 전통이 그리스도를 앞서지 않는 교회, 성경 말씀과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살펴서 고치고 바른 것을 추구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교회, 기도와 말씀이라는 펀더멘탈이 강한 교회, 한 마디로 그리스도는 흥하고 사람은 쇠하는 교회, 그런 교회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위해 굳게 서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님이 필요합니다. 말씀 선포에서 열정이 느껴지고 인간을 인해하려고 애쓰는 인간적인 목사님 말입니다.
또한 인생 여정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내게 격려와 위로를 줄 수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는 교회를 원합니다. 육신의 형제자매보다 더 친근하게 내 것을 허물없이 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랑의 동기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인간이 된 사람들, 로봇이 아니라 살아서 숨 쉬는 평범한 인간들로 구성된 교회 말입니다.
주님, 지금까지 여기 저기 가까운데 먼데 다 찾아보았으나 아직까지 그런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런 교회를 찾기가 이렇게 어려운가요?
내 요구가 너무나 큰 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잠시 기도를 멈추고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평안과 위로가 임하면서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지금까지 마음고생하며 많이 기다렸지만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 곳을 찾기가 쉽지는 않지만 여전히 한 군데가 있단다.
자유의 영으로 마음 놓고 그리스도를 추구할 수 있는 곳 말이다.
혼을 다해 나를 의식하려고 애쓰는 목사와 성도들이 있는 교회 말이다.
영과 진리로 내게 경배할 수 있는 곳 말이다. 내가 준비해 놓았다.
2009-06-02 17:50:59 | 관리자
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기대를 갖고 교회의 공적 예배에 갑니까? 예배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 무슨 유익을 얻습니까?
예배가 무엇인지 교회가 보여 주지 못하고 가르치지 아니하므로 공적 예배가 무너지고 있으며 다음 세대에까지 교회가 제대로 존속될지 의문이 듭니다. 성도와 목사의 수준 이상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두 주님께 바르게 예배드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지금의 세태를 잘 반영한 글입니다. 회개합시다. 저는 김목사님을 뵌 적이 없으나 그분의 글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청교도 신앙에 대해 눈을 열어 준 분입니다. 읽어 보기 바랍니다. "장로교 목사의 글을 왜 읽어?"라고 반문하는 고고한 분들도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장로교 안에도 구원받아 예수님의 교회의 지체가 된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교회는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교회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청교도들의 신앙에서 배울 것은 많이 배워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그분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합니다. 김 목사님의 책들을 많이 읽어 보기 바랍니다.
요금 내고 집에 가
주일날 아침 어느 한 가족이 바쁜 걸음으로 교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가까이 다가왔을 때 양쪽에 엄마 아빠 손을 잡은 어린아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 오늘은 예배시간에 졸지 마. 나 창피하단 말이야. 알았지?”
또렷한 목소리로 호소하듯이 말하는 어린아이에게 깜짝 놀란 듯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엄마는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윽박지르듯 아이에게 눈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의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두 부부에게는 그날도 지난 주일과 다름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잰 걸음으로 교회에 도착한 것은 이미 성가대의 송영이 끝나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윗몸을 숙이고 빈자리를 찾아 간신히 자리를 잡았을 때에는 벌써 예배가 시작된 지 오분 이상 지난 후였습니다. 그날도 주일예배는 지난주와 다름없이 저해진 순서를 따라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주보에 적힌 별 모양의 표시를 따라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예배순서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교독문을 따라 읽고 오늘따라 길게만 느껴지는 장로님의 대표기도에 이어 성경봉독과 성가대의 찬양도 경청했습니다. 이윽고 설교시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 설교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날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설교를 한쪽 귀로 들으며 눈으로는 주보를 군데 군데 훑어보았습니다. 교회소식을 낱낱이 읽고 주보의 오자를 잡아내며 교정까지 끝냈지만, 설교는 그때까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설교가 시작된 지 십오 분쯤 지났을 때 두 부부의 몸이 좌우로 약간씩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주간의 피로가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무거운 몸으로 간간이 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설교자의 어조가 상승할 때에는 졸음에 겨운 눈을 치켜뜨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눈꺼풀에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잠시 눈을 떴다가는 다시 이전보다 더 큰 무게를 느끼며 눈을 감았습니다. 졸음을 쫓기 위해 가끔 고개를 흔들어보고 졸다가 떨어뜨린 성경책이나 주보를 다시 주워보기도 하지만 설교를 듣는다기보다는 졸음과의 싸움이 힘겹게만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린아이는 지루한지 이따금 몸을 좌우로 흔들며 심하게 조는 엄마의 옆구리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툭 쳐보기도 하고 주보로 비행기를 접어보기도 하지만, 두 부부는 지긋이 고개를 숙인 채 묵상에 잠긴 듯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 이 어린아이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칭얼대며 부모에게 졸랐습니다.
“엄마, 아빠. 졸지 말고 빨리 요금 내고 집에 가자.”
아마 이 아이는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을 요금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2009-06-02 17:46:36 | 관리자
"어는 곳에는 부모의 책임을 명시한 법이 있었다.
형법의 일부로 자녀가 적절하게 보호받도록 제정된 법이다 .
부모가 이 법을 위반하면 자녀를 빼앗길 수도 있다.
심지어 위반 정도가 심하면 감옥에 갈 수도 있다.
우리는 자녀를 키우는 동안 그 조항을 읽고자 법정에 가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법전에 기록된 부모의 책임은 아마 수 백가지가 될 것이다.
우리는 단 한가지 조항도 모른다 .
자칫 이 법을 위반했다가 자녀를 빼앗 길 까봐 걱정한 적은 없다.
그 법을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모든 조항을 충실히 이행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사실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아이들을 돌봤다.
왜 그런지 아는가?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이 조항이 필요없다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은혜가 다스리는 삶을 살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된다는 점을 발견한다.
2009-06-02 17:15:07 | 관리자
종교규정을 지킨다고 모두 다 구원을 받는 게 아님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누군가를 전도할 때면 전략을 수시로 바꾼다.
"예수님이 당신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돼요 그게 전부예요."
"뭐라고요?나쁜 습관을 버리겠다고요?"
"그게 아니예요. 아직 이해를 못하셨군요..."
"구원받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을 전혀없어요..."
"그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영접하세요..."
"당신이 뭔가 해야하는 일은 없어요 "
"이미 그분이 하고 계세요,"
"그리스도인이 되는 건 오직 그분한테 달렸어요! 그분을 신뢰하세요."
"그냥 믿으세요.믿음으로만 되는 일이예요."
"구원은 뭔가를 해서 받는 게 아니예요."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예요."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영접한다.
"축복해요!"
"당신이 그리스도를 신뢰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궁금할 거예요,"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사항을 몇가지 알려드릴께요."
"우선 주일 예배에 참석해서 목사님께 당신이 주님을 영접한 사실을 알리세요."
"그리고 교회에 등록하고 침례를 받으세요,"
"주일 저녁예배와 수요저녁예배까지 빠집없이 참석하세요."
"남선교회에도 들어가셔야해요."
"아,노래를 잘 하시면 성가대로도 섬기세요."
"성경공부모임에 참석하는 일은 절대 잊지 마시고요."
"참 받드시 해야할 일은 성경을 읽으셔야해요,"
"하루에 구약은 세장 신약은 두장을 읽으면 일년에 일독을 할 수 있어요."
"기도도 하셔야해요."
"아침에는 적어도 30분씩 기도하세요."
"아..그리고 십일조 얘기도 했던가요?"
어떤가?
가까스로 주님을 영접한 그는 아무도 안보이는 사이에 뒷문으로
교회를 빠져나갈 것 같지 않은 가?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은혜의 삶이라 하면서 막상 새신자를 훈련할 때는
노골적으로 율법주의를 드러내어 그들의 숨통을 막는다 ...
그리하여 어떤이는 영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종료단추를 누르고는 종적을 감추었다...
어떤이는 교회에 남긴 했으나 율법주의 전두엽백질절제술(1935년에 포르투칼 신경학자 E.모니스가 창시한 것으로
정신 분열증 치료에 널리 사용되었으나 인격변화같은 부작용이 나타나면서 시술이 중지됨)을 받은 환자처럼 행동했다.
이들은 비록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긴 하지만 그 어떤 활기도 보이지 않는다...
2009-06-02 17:03:49 | 관리자
화덕피자 먹으러 가요^^ 우리회사로 ㅋㅋㅋ
2009-06-02 16:26:55 | 송재근
그럼 전 저팔계인가요? ㅋㅋㅋ
2009-06-02 16:17:33 | 송재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