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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둥이라고 해서 조그만 아이를 데리고 성경공부를 하시나...했죠..하하하. 성경공부 하는 것 . 재미있죠? 저도 작년부터인가해서 인터넷으로 엄~청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교회 성경공부에도 참석하고요. 이제껏 우리 교회에서 배운 공부를 복습을 해야하는 마음의 부담을 안고 있지요. 이번 여름엔 복습을 해야, 가을부터 하는 공부를 다시 따라가는데...말입니다. 참 ,어느 자매님이신지 모르겠지만, 잘 성장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2009-06-01 17:57:51 | 백화자
요즘 목사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설교를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한 주일을 보내면서 지금까지 평생을 설교하면서 일생을 보낸 목사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내하며 목사의 길을 가는 많은 형제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최근에 한 성도가 적은 한국 교회의 칠거지악이란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물론 그분은 잘못된 목사에 대해 지적을 많이 했습니다만 나는 거기서 중간에 있는 한 부분에 눈이 고정되었습니다. 그런 목사가 되기를 갈구하면서 전체의 글을 올립니다. 오늘도 양들에게 바른 꼴을 주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목사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목사의 타락   영적 지도자로서의 고결한 신앙 인격이 말씀과 함께 외쳐질 때 목회자로서의 진정한 권위가 저절로 드러날 터임에도 “더러운 이를 취하며(벧전5:2)”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며(딤전6:5)” “군림(주장)하는 자세(벧전5:3)”가 되어 버렸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후4:1,2)”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의 자신의 고귀한 직분을 밝혔다. 이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혼잡케 한다”는 말인데, 이 말은 마치 포도주에 물을 타서 포도주를 변질시킨다는 의미를 뜻한다. 또한 그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지 말고 곧 순전함을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거듭하고 있다.   여기서 혼잡이란 뜻은 값싼 물품이나 위조품 등을 교묘한 꾀와 속임수로 진짜처럼 팔러 다니는 엉터리 잡상인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면서 자신의 이권을 취하기 위해 진리의 복음과 인간의 영혼을 담보 잡아 사사로운 잇속과 명예를 챙기는 불의한자들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신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절망하나 순종의 걸음을 통해서는 소망의 출구를 향해 힘차게 걸어 나갈 수 있음을 성도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목사는 골방에서 하나님과의 외로운 씨름을 하며 그분의 말씀과 대면하며 처절해져야 한다. 그래야 목사는 강단에서 산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듯한 고독과의 싸움이 싫어질수록 강대상에서는 분칠한 설교가 나오게 마련이며 사람들의 구미에나 맞추는 백화점 식 설교가 나올 수밖에 없다.   사람 만나기를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일(행6:4)보다 더 선호할 때 타락은 저절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무엇 때문에 바빠야 하는지, 바빠야 할 이유와 순위가 문제다. 잃어버린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강조하는 만큼 그 영혼에 대한 사랑을 근사한 식당에서 대접받는 것이나 심방 가서 만나주는 것으로 표현하려 해서는 안된다.   예수님도 “마음이 가난한 것”을 강조하셨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나 마음과 물질 모두로부터의 가난과 그 가난을 기쁨으로 감내하겠다는 실천의지는 너무나 약하다.   목사는 인간적이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전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지도록 격려하는 일에 더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것보다 더 고상한 일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부득이한 (벧전5:2) 의무로 변질시켜 버릴 위험성도 다분히 있다는 것도 직시해야 한다. 고귀한 의무감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의무감이 먼저 떠오를 때 목사는 타락의 길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목사의 영적 타락이 윤리적 타락보다 더 심각하며 영적 책무의 망각이 자신뿐 아니라 교회 전체의 기반을 흔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상준 교수 (Concordia University)
2009-06-01 17:56:50 | 관리자
교회는 목사만 문제가 없으면 문제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는 교회의 리더입니다. 리더가 제대로 이끌지 못하면 어떤 단체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에는 평촌에 있는 어느 유명한 교회를 가서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담임 목사님은 아프셔서 못 나오시고 부목사가 대신 설교를 했습니다. 부목사는 마치 TV에 나오는 젊은 코미디언처럼 설교를 했습니다. 적어도 500명은 거기 앉아 있었는데 1시간 설교를 했으니 500시간을 빼앗은 것입니다. 목사의 수준이 저 정도니 성도들은 어떨까, 담임 목사가 그렇게 유명한데 그 밑의 부목사 수준이 어째 저 정도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왔습니다.  목사가 잘 해야 교회가 부흥합니다. 다른 이론이 필요없습니다. 청중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허공 대고 이야기하는 목사나 아무 열정이 없이 설교하는 목사를 보면 우리의 현실이 암담합니다. 목사가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만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만 듭니다.  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이 글을 통해 설교자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목사들이 조금이라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성도들이 고통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좋은 목사들을 한국 교회에게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설교자의 소명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매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매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에게 매였기 때문에 교회에 매인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부르심 때문에 성도들과 만난 사람입니다.   예배 중에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사랑을 알고 그 부르심에 붙잡힌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가 예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전하도록 거역할 수 없는 소명에 붙잡힌 사람, 의와 공평을 따라 살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설교자입니다.   이러한 소명 때문에 설교하는 사람, 그가 바로 설교자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요구를 전하기 위하여 사람들과의 관계를 등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고난은 바로 이러한 호명에 충실한 생애를 살다가 겪은 고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의와 공평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지 않을 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러한 뜻을 전하였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 때문에 그들은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설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신령한 예배에 관한 다른 모든 논의는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보람을 느낄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양떼들이 그렇게 살아서 주님께 영광 돌릴 날들을 꿈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러한 직무를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해서 이루시고 오늘날에는 설교자들을 통해서 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목사의 가장 중요한 직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실로 엄청나게 많은 직무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기도, 상담, 심방, 교육, 구제, 선교, 행정, 교회정치, 사회봉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일들에 종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은 설교와 기도입니다. 기도는 개인적인 사역이고 설교는 공적인 사역입니다. 목사,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보이고 기도를 통해서 성도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고하는 일이야 말로 목사의 우선적인 직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잘하면 그는 거의 모든 것을 잘하는 것이고 이것으로 섬기는 일이 만족스럽지 아니하면 그는 모든 것을 행해도 거의 소명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예배 가운데서 자신이 선포하는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일입니다. 따라서 강력한 말씀에 사로잡힌 설교자가 없는 교회가 다른 요인들로써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게 된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제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배다운 예배를 위하여 아름다운 예배당보다 신령한 설교자가 더욱 필요합니다.
2009-06-01 17:47:46 | 관리자
다음은 어느 독자가 보내 준 송인규 교수님의 글입니다. 우리들 교회의 현실을 보여 주고 있지요. 읽고 많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질문을 할 수 없다고요(송인규 교수의 한국교회 신앙진단).   질문이란 단순히 어떤 사안에 대한 궁금증이나 호기심을 푸는 수단 정도가 아닙니다. 질문은 질문하는 당사자의 생각과 입장을 확실히 정리하도록 돕는가 하면, 또 자신의 질문 내용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바를 투명하게 볼 수 있게 자극하고, 때로 질문자의 숨은 의도를 여지없이 보이기도 합니다.   질문은 이렇게 당사자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질문은 그 대상인 답변자에게 궁극적인 자극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질문으로 자신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고, 나의 의견이 상대방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점검할 수 있습니다. 또 앞으로 전개해 나갈 논의의 타당성과 적실성을 빠르게 타진하게 되며 만약 질문자와 답변자가 함께 청중들을 대하고 있는 경우라면, 청중들도 그와 같은 효과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질문’이 어려운 교회   이토록 질문의 유익이 많음에도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질문’은 그다지 친근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 이유를 기독교 안팎에서 찾아보면, 우선, 교회 외적으로 한국 특유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한국의 교육 분위기는 질문(및 답변)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학습 태도가 아닌 것으로 말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수직 구조에서 수행되는 강의, 필기, 암기의 반복일 뿐 교사와 학생, 또는 학생 간 상호 교류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바람직한 교육이라면 마땅히 질의와 응답이라는 교육적 수단을 포함해야 함에도 시간과 공간의 문제, 과밀한 학생 수, 그에 비해 열악한 교사 수 등의 현실과 타협했던 것입니다.   둘째, 학습장을 감싸고 있는 심리적 압박이 질문과 대답을 편안하게 유도하기 못합니다. 많은 교사들은(특히 나이가 든 옛 세대일수록) 학생들의 질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학생이 질문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는 그것을 상급자에 대한 도전이나 공격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자에 대해서도 다른 학생 편에서 “짜식! 혼자 되게 잘난 척하네.”라고 반응하곤 합니다. 물론 질문자중에는 예의조차 갖추지 않고 시건방진 태도로 질문하는 이도 있고, 자기 과시를 위해 질문하는 경우도 적잖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교육 환경은 질문과 대답이라는 학습 수단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교회 내적 요인 또한 자유로운 질문의 풍토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신앙의 강조점 믿음에의 독려와 권면은 자연히 질문을 경시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가 믿음을 강조하면 할수록 자연히 질문(및 답변)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각을 형성하게 됩니다. 의문점의 제기는 곧 불신, 불순종, 반역 등과 동일시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 나라의 교회 모임은 질의 및 응답이라는 교육 방식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소그룹 활성화가 목회와 연관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정도일까......그 전까지는 모든 모임이 주로 예배와 같은 대그룹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예배나 기도회에서는―그것이 크든 작든―성경의 가르침이나 설교 내용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가 주도하는 소그룹 제자 모임도 아직은 모든 교회에 보편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질문과 응답의 학습 방식이 공동체의 삶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질의와 응답에 대한 성경의 예시   성경은 질문(및 답변)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질문과 관련하여 무슨 명령을 내린다든지(“너희는 궁금할 때마다 질문을 하라.”), 아니면 무슨 약속을 제시한다든지(“질문을 하면 주께서 깨닫게 하시리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구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전례와 모범은 질문(및 답변)의 중요성을 말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깨우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다름 아닌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에 대해서건(창 3: 9, 11), 하와에 대해서건(창 3: 13), 아니면 가인에 대해서건(창 4: 6, 7, 9, 10)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들도 종종 질문의 형태를 빌려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곤 했습니다. 이 점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지혜를 전할 때든지(사 40: 12~14), 예레미야를 통해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을 경고할 때든지(렘 23: 33~34), 에스겔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돌이켜 회개하기를 호소할 때든지(겔 18: 2, 10-13, 19, 24, 25, 29, 31) 한결같이 나타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역시 많은 경우 질의와 응답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12세에 지혜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에 바로 질의와 답변을 사용하였습니다(눅 2: 46~47). 공생애 내내 질문의 형식을 통해서 제자들이나 듣는 이들을 가르치셨습니다(마 16: 15; 막 10: 9; 눅 10: 36; 요 8: 46). 또 사람들의 수많은 질문들에 일일이 대답하심으로 그들을 깨우쳤습니다(마 11: 2~6; 19: 16~22; 21: 23~27; 22: 15~22; 23~33; 막 2: 16~28; 8: 27~38; 9: 10~13; 10: 1~12; 13: 3~37; 눅 10: 25~36; 12: 41~48; 요 3: 4~15; 4: 10~15; 6: 28~65; 8: 1~11; 9: 1~7; 13: 36~14: 7). 사도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도 질의와 응답의 형식으로 사명―복음 전도, 변증, 양육, 교육 등―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비신자에 대한 책임과 관련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벧전 3: 15)고 권면했습니다. 그는 과거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받을 때 이런 식의 답변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행 4: 7~12).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도 재판 과정 중 자신이 기소 당한 이유를 답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행 22: 1; 26: 1). 특히 로마서를 통한 이신칭의의 진리는 수없이 많은 질문과 답변의 형식으로 전달되었습니다(롬 2: 4~5, 21~23, 26~27; 3: 1, 3, 5, 6, 7~8, 9; 6: 1, 2, 3, 15, 16, 21; 8: 24, 31, 32, 33, 34, 35; 11: 34, 35).   질문 풍토 개선의 길   이처럼 중요한 ‘질문(및 답변)’이 한국 교회 내에 굳건히 자리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먼저 열린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먼저 질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우들을 깨우칠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질문을 던지고 교우들로부터 답변을 유도해야 합니다. 신앙의 교육과 훈련 과정 중에 질의와 응답의 방식을 적절히 사용해야 합니다. 교우들이 신앙의 주제와 관련하여 질문을 하거나 의문을 품을 때 정죄하거나 냉소로 반응하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고(때로 질문자의 태도나 내용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정성껏 답해야 합니다. 질문이 어려워 당장 답변하기 힘들 때에는 그렇다고 시인해야 하며, 후에 답변을 해 주겠다고 약속한 뒤 꼭 지켜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다시 살피고 관련 서적을 읽으며 해당 주제를 끊임없이 연구해야 합니다.   둘째, 질문과 답변이 필요하고 가능한 형태의 모임들은 공동체에서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미 각종 리더 모임과 제자 훈련을 위한 소그룹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충분히 활용하십시오. 일방적인 강의만 하지 말고, 질의․응답 시간을 의도적으로 두십시오. 또 질의․응답을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모임들―세미나, 강좌 등―을 만들어 내십시오. 이런 모임들을 활성화시켜 질의와 응답이라는 학습 수단을 그리스도인 각자와 공동체에 귀중한 자원으로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체질 개선의 의지가 깨어난다면 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2009-06-01 17:44:41 | 관리자
예배에서 내가 감격하면 좋은 예배를 드린 것일까요? 요즘 교제 중심의 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듣고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감격하고 모인 사람들이 교제를 통해 은혜를 받으면 그 예배가 바른 예배일까요? 예배는 worship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이것은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내 자신을 낮추어 그분의 뜻대로 따른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예배에서 죄에 대한 자각과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람의 무능함,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통한 회복이 없으면 그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제 중심의 예배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이 무겁습니다. 헛다리를 집고 있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예배에 대한 세미나를 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성도들이 알아야 이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회개합시다.   가정 같은 교회?   제가 아는 어느 목회자가 마음이 맞는 교우들과 힘을 합쳐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보기로 하고 열심히 목회하였습니다. 비록 수는 적지만 전 교우들이 헌신적으로 힘을 합쳐서 예배 처소까지 분양을 받았습니다. 그는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개척해서 6년간 목회하는 동안 날마다 교회 오는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개척교회를 세울 뜻이 없는 제 친구들이 저를 보고 개척을 시작할 정도였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교인들과 별 갈등 없이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교회를 돌보며 지냈습니다. 주일이면 온 교인이 교회당에서 보냈습니다. 오전에는 열심히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테니스를 치고 볼링도 하고 배드민턴 치고 배구도 하다가 저녁때는 씻고 같이 모여서 저녁 먹고 예배도 드리는, 가정 같은(?) 교회를 꾸려가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꿈꾸시는 교회라고 자부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련을 ‘불꽃시리즈’를 읽으면서 이 목회자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깊이 각성하게 되면서 상상할 수도 없는 확신이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불행히도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목회자가 변화를 받으면서 설교다운 설교를 하기 시작하자 그 돈독했던 교우들과의 인간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변화된 모습으로 기도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는 제가 이렇게 술회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있지만, 알고 보니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교회생활, 재미있는 교회프로그램, 심지어는 친구, 친척, 동기생들과의 인간관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모이고 있었지만 예배 중심에 회심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목회현장이나 예배 속에서 느끼는 만족이라는 것이 반드시 옳다는 보증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만족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드리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나라 같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이 일을 위하여 설교해야 합니다.
2009-06-01 17:33:21 | 관리자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 2:16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고심한 적이 없다. 단지 그 분의 뜻을 행했다. 자신의 생각이 곧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살아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롬 12:1   "너희 안에서 일하사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빌2:13   온전히 우리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일은 그 분의 책임이다   기대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다른 계획이 있다는 뜻이다   당신은 그 분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단지 그분의 뜻이 당신의 기대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건 하나님의 뜻일리가 없어요! 완전히 틀렸다고요 ! 라고 주장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믿음으로 행했다가 사자 굴에 갇힌 다니엘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라   로마제국의 심장부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그곳에 가기로 결심했는데 그만 배가 좌초되어 말타섬에 머물다가 독사에게 물린 바울에게도 그렇게 말하지 마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신실하게 행했다가 밧모섬에 유배되고 말았다   이러한 예는 우리가 하나님 뜻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일 때 조차  실은 하나님의 뜻안에 있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믿음으로 행했다면 하나님의 뜻을 절대로 의심하지 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기 "은혜가 다스리는 삶" - 책 중에서  
2009-06-01 15:36:32 | 정혜미
어제 처음으로 주일학교 아이들이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작은 시작이지만 이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 주님의 대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수고해 주신 교육 목사님 부부와 성도님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2009-06-01 15:25:32 | 관리자
    뱃살과의 전쟁을 선포한 후 가끔 즐겨 먹던 피자도 아예 먹지 않기로 다짐했다 . 피자의 열량이 얼마나 높은지 아는가?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다.   그래서 난 피자금식에 들어갔다. 절대로 안돼, 단 한 조각도 안돼!   그러나 결심을 지키는 데는 한가지 장애가 있었다.   우리 집 아이 중 세명이 피자가게에서 일했던 것이다  보통 피자가 아니라 화덕 피자가게에서말이다.   화덕 피자는 정말 맛있다.아들은 이 가게에서 주방장으로 일했기 때문에  주문만 하면 특별한 피자를 먹을 수 있었다   아들은 피자위에 치즈를 깔고 페퍼로니를 듬뿍 친다음 빵 가장자리가 도톰하게 올라오도록 굽는다 (생각만 해도 당장 먹고 싶다)   이제는 피자를 먹지 않을거야! 난 한달에 보통 두어번 먹었지만 더는 먹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갑자기 화덕 피자를 먹고 싶은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올라왔다. 매일 생각났다 다음 끼니를 고민할 때마다 마음 속으로 피자! 하고 절규했다   피자와 조금이라도 닮은 물건을 볼 때면 피자가 더 그리웠다.   하루는 아이오와주에 있는 농경지를 따라 운전을 하고 있는데 피자 냄새가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지나갔던 곳은 돼지 농장이었다   나는 오히려 피자를 먹지 않겠다는 율법때문에 피자를 먹고 싶은 욕구가 불같이 일어났다   율법이 우리의 영적생활에 미치는 영향도 이와같다.
2009-06-01 14:59:53 | 정혜미
특별한 행사가 없는 한 6월 5일(금)부터 저녁 8시에 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갖습니다.   찬송하고 성경 읽고 기도 제목 나누고 형제들과 자매들이 다른 방으로 가서 기도하려고 합니다.   공동 기도가 끝나면 각자 기도해도 되고 모여서 교제해도 됩니다.   신약교회의 특징은 가르침과 교제와 기도에 있었다고 사도행전 2장은 기록합니다.   우리는 그냥 성경의 약속에 따라 기도하러 모입니다. 나머지는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주말에 일 끝내고 지친 몸이지만 오실 수 있으면 오셔서 우리의 사정을 주님께 아뢰고 지체들의 필요를 위해 기도합시다.   감사합니다. DSJ
2009-06-01 14:42:14 | 관리자
저희 남편은 언제부턴가 항상 이시간에 길위를 뛰고 또 뜁니다. 넘치는 책임감과 생활력이 간혹 저를 불안케 하기도 하지요...^^ 혼자 있는시간 항상 조용히 엿보기만 하다가 오늘은 처음 용기내 글을 올려 봅니다.남편과 전 주위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어린시절 호기심에...또 교회에서 주는 사탕과 초코파이가 좋아 교회의 첫 문턱을 넘게 된것도 비슷했고....   구원받지못한 가족들속에서 어린 소년과 소녀가 갖는 작은 고뇌속에 무릎을 꿇었던것도....세상이란게 교회안에서 보고 겪었던 형제 자매들 만큼만은 관대하고 그래도 겁내지않고 당차게 내딛어 볼만한 곳이라 착각했던것 또한 우리 두사람의 공통점중 하나라고 생각되네요..만만하게 보던 세상속에서의 시련과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각자 주님앞에 다시 무릎을 꿇게하는 겸손이 아니라 오히려 더큰 반항으로 주님을 외면케하는 교만이었습니다.   남편을 처음 만나서 교제를 하는동안 남편과 대화를 하다보면 항상 우리 두사람이 똑같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이 하나있다는걸 깨달았더랬죠. 그건 이미 쓴맛을 본 세상속 패배에대한 제기와 어리석은 세상속 욕심에 눈이 멀어 가장 중요한걸 잊고 있었다는거죠. 하지만 누구보다 간절히 그분의 품을 그곳의 소망을 서로가 맘속 깊히 그리워 하고 있다는 것두요....   짧고도 긴시간 왜 이토록 우리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을 그리도 귀히 여기지 못하고 힘든 길을 걸어왔는지...왜 그토록 그시간 그렇게 울고만 싶었는지...날이갈수록 제 머리와 맘속에 감사하게도 깨달음을 주셨지요... 처음 저희 두사람이 함께 두손을 꼭잡고 각자 십여녀만에 교회를 찾아 예배를 보던날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하지만 방황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요...예전 그뜨겁고 벅차던 그사랑을 회복하기가 참 더디고 어색했습니다.남편을 통해 사랑침례교회를 처음 찾아가 예배를 드리며 장로교를 다녔던저는 예배순서나 방식에 좀 어색함을 느꼈죠.   근데......아~~~ 우리 정동수목사님의 설교말씀을 들으며 오랜시간 성경을 두려워하고 멀리했던 저에게 도전이 되었답니다. 어떻게 다시금 시작을 해야할지 또 가까이 가는법을 몰라 답답한 제맘에 지난날 그토록 쉬히 주님을 등지고 쉽게 쓰러진 이유...그리고 정말 무엇부터 내가 바로 알고 깨어야 할지 길이 좀 보이기 시작했죠.........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길 어찌나 벅차고 기쁘던지....아직 너무 어린 아이같은 저의 믿음이 아직은 잘 모르지만 걷기 위해선 손부터 짚고 일어서야 한다는걸 조금씩 배우고 방법을 찾은듯 해서 큰희망이 생겼답니다.   또한 사랑침례교회를 알고 제자신이 얼마나 성경말씀에 무관심하고 말씀보기에 나태했는지 또한 먼저는 말씀의양식이 나에게 부족하니 제가 그리도 연약했구나...하는 깨달음도 주셨죠...^^ 사실...설교 말씀을 듣다가 또 지인들의 성경에관한 이야기를 들을때 낯선 말들과 기억이 가물가물한 탓에 당황도 하고 참 제자신이 부끄럽기도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한구절 한구절 설교본문위주로 말씀을 봐았던 터라 정말 성경이 진심으로 궁금해지고 보고싶어졌습니다. 그래서요즘은 창세기부터 말씀을 보는데 성경이 이렇게 재밌었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은 신명기를 읽고 있는데 늦둥이인 저로선 참 신기하고 놀라웠답니다. 베스트셀러중 베스트아닐까 싶네요..ㅋ 성경에 무지한 저에겐 신기한게 참 많았답니다. 그중 한가지 말씀을 드리면....어느날 남편이 피곤에 지쳐 잠들기전 옆에서 말씀을 보는 저에게 어디읽는거야? 하고 묻더군요. 그러면서 이런저런 성경에 관해 남편에게 성경이야기를 하는데 ....제스스로 순간 의아한게 있었죠...그래서 제가 남편에게 " 여보~ 근데 구약에선 어머니의 형제의 딸과 또 아버지쪽 친족과 결혼하고 같은 친족끼리 결혼해~! 이건뭐지 이래도 되나?" 하고 물었답니다..^^ 이렇게 혼자 궁금해하며 또 혼자 생각하고 ...알아가고 깨닫고...와~ 하나님 무섭다~ 아~ 정말 냉철하시네~ ^^ 안식일에 나무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 하시던 말씀을 볼땐 "이건 너무 하셨다.......''ㅋㅋㅋ혼자서 이렇게 잠시 하나님의 두려움을 잊고 인간적인 동정심이 유발하기도 했다가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기를 반복하며 두려움을 배우고... 순종을 배우고 ...누구보다 가장 크신분을 의지함으로 얻은 마음의 큰 평안을 느끼고 ....또한 무엇보다 자유함에 큰 행복을 즐거히 배움에 감사하고 있답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해서 교제하는법도 또 신앙안에서 지혜롭게 가정을 이루는것도 미숙하고 어리기만 합니다.아직은 아내로서의 자세나 믿음의 가정에서 갖추어야 할 올바른 모습등 모르는게 너무 많답니다. 믿음의 늦둥이인 저희 부부가 정말 주님안에서 아름답게 서로 존중하며 큰 소망을 바라보며 승리할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릴께요. 떨리고 부끄럽지만.... 게시판의 글들을 보고 저도 함 용기를 내본다는게.....주저리주저리 너무 말이 많아졌는데....창피해서 포기하려다가 이미 작성한 글이 넘 아까워서 ㅋ 그냥 올려야 할듯해요.. ^^이분들이라면 솔직하게 나의 부족함도 드러낼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힘을 얻고자 횡설수설 올렸습니다.남편이 좀전에 들어와 엿보려해서 제가 안보여줬더니...토라진듯 혼자 먼저 잠들었네요..ㅋㅋㅋㅋ용서해주겠죠?^__________^*    오 혜미: 그리고 우리가 다들 멀리 있으니 이렇게라도 교제하면 더욱 정겨운 교회가 되겠지요...  
2009-06-01 14:35:30 | 관리자
자매님? 형제님? 아마 자매님으로 추정이 되어서, 자매님으로 부르겠습니다. 호주가 머나먼 나라인데, 자매님의 글을 접하니, 먼 나라같지가 않네요. 서로의 마음이 같아서인가봐요. 게시판에 호주 소식 전해주세요. 호주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지 궁금하네요.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같은지..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어도 사는 환경이 다르면 조금 다르게 신앙생활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요. 우리보다 더 나은 점이 있으면 배우고 싶네요. 자매님. 반갑고요.. 다시 게시판에서 만나기를 바랍니다. 저도 자매님 위해서 기도할께요.샬롬..
2009-05-31 00:05:22 | 백화자
요즘 KeepBible.com에 글들이 올라갑니다. 교회와 그곳에 모두 넣을 수 없어서 거기에만 넣습니다. 믿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대한 의문 사항이 있으면 KeepBible.com의 자유 게시판에 올려주세요.   감사합니다.
2009-05-30 16:41:49 | 관리자
반갑습니다...^^ 미약한 교회에 이렇게 멀리서 글로써 힘과 위로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아내인데 남편이랑 조용히 가정생활만 하고 싶을 때가 많지만 한 두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하나님을 만나신다면 저의 아픔과 고독은 훗날 기억되겠지요.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 나서서 하는 일들이라 정말 사랑과 이해가 필요합니다.언니되시는 분도 진실해서 금방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모두가 만나는 날이 있길 바라며...
2009-05-30 11:25:19 | 정혜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