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론(deism)이냐 공리주의(utilitarianism)냐 -안녕하세요?지난번엔 세속적(무신론적)실존주의에 대해 간략히알아봤고 이번엔 말씀드린대로 종교적(유신론적)실존주의에 관해나눠보고자 합니다.먼저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쇠얀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
에 대해 지면을 잠시 할애하자면 그의 이름은 덴마크 말로 '공동묘지'를 뜻합니다.그는 1813년 7남매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습니다.쇠얀의 부친 미카엘 키르케고르는 코펜하겐의 성공한 상인이었으므로 쇠얀은 유복한 환경에서 나고 자랐습니다.그러나 그의 집안분위기는 엄격하고 음울했습니다.자신의 아버지는 엄격하고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으나 두 가지의 과오로 인해 평생을 죄책에 시달렸습니다. 하나는 쇠얀의 어머니와 결혼한 일입니다. 당시 교회법은 재혼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이 결혼은 아버지에게는 두 번째였습니다.그는 첫째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병으로 죽자, 자기 집 어린 하녀와 재혼했습니다. 그 하녀가 바로 쇠얀의 어머니였는데, 그녀는 아버지와 결혼한 뒤 두 달 만에 첫아이를 낳았습니다.교회법을 어기면서까지 결혼했던 상황, 그리고 두 달 만에 낳은 아기(혼전임신)는 쇠얀의 아버지에게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남겼습니다.다른 하나는, 어린 시절 목동을 할 때 추위와 배고픔에 못 이겨 하늘에다 대고 하나님을 저주했던 일입니다. 그는 이 사건이 자신의 삶을 재앙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다고 굳게 믿었습니다.그는 무려 82세까지 살았는데 그는 긴 생애 동안 두 명의 부인이 죽고 8남매 중 6명이 죽는 것을 차례로 바라보며 괴로워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코펜하겐 대학 신학과 학생이던 스물두 살의 쇠얀 키르케고르는 아버지의 비밀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경멸하면서 방탕과 절망의 길로 빠져 들었습니다.쇠얀은 이 일을 '대지진'이라고 회상했습니다.쇠얀도 자신의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가 자신의 집안과 삶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의 이런 환경과 경험들이 그의 사상과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훗날 그는 국가 기구가 된 기성교회와 관리가 된 사제들을 이를 갈며 미워했고, 고난 속의 생활과 신앙을 지지하고 순수했던 초대 기독교와 교회를 갈망했고 평생에 걸쳐 '가능성'을 찾아 사색하고, 이윽고 20세기의 사상과 신학에 큰불을 지핀 거대한 폭탄이 된 사람, 맏형을 제외한 다섯 형과 누이들이 서른네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것을 목격하며 자신도 아주 젊어서 죽으리라는 예감 속에서 살다가 이윽고 마흔 두살에 요절한 인물입니다.그럼 쇠얀이 전개한 그의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알아보자면그는 그의 저서 [Fear and Trembling]에서 실존에는 세 범주가 있다고 했습니다.첫째로 심미적 실존인데 여기서 직접적 심미주의는 감각적 쾌락,관능,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합니다.선천적으로 타고난 외모,매너,매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돈 후안)이 여기에 속한다고 합니다.또 하나는 반성적 심미주의로서타고난 매력은 없지만 노력으로 극복하려는 부류(요하네스)입니다.둘째로 윤리적 실존인데 이것은 심미적 실존보다 한차원 높은 실존입니다.윤리적이며 법을 잘 준수하고 사회적 명망이 있는 부류(빌헬름 판사)가 여기에 속합니다.셋째는 종교적 실존으로서 가장 고차원의 실존입니다.윤리적 실존보다 더 상위에 속한 자들로서 종교가 가르치는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입니다.법이 종교적 이념을 실행하기 위한 현실적 수단이듯이 말이죠.쇠얀은"신앙은 주관적인 것이며 주관적인 신념,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믿는것"이라고 정의합니다."믿음이란 곧 개별자가 보편적인 것보다도 높은 곳에 있다는 역설이며,이는 개별자가 처음에 보편적인 것 안에 있다가 이후에는 보편적인 것보다 높은 곳에 있는 개별자로 고립된다고 하는 역설.믿음이란 곧 개별자가 개별자로서 보편적인 것보다 높고, 보편적인 것에 거스를 권리가 부여되어 있고, 그 밑에 종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군림한다는 역설(윤리적인 것, 보편적인 것을 능가하는 개별자). 개별자가 개별자로서 절대자에 대하여 절대적인 관계에 선다는 역설이다(신 앞에 선 단독자)."...여기서 쇠얀이 말한 "신앙은 주관적인 것이며 주관적인 신념,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믿는것"이 맞다고 생각하시나요?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계기는 각각 개별적으로 다 다를수 있습니다만 '구원'을 받는 방법은 단 한가지 뿐입니다.예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이시며 성육신 하셔서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으며 다시 오실 유일하신 나의 구원자 라는것을 믿는 것입니다."신앙은 객관적(특별계시-성경)이며 성경적인 신념, 성경적인 판단에 따라 믿는것"이라 해야 맞는 말입니다.물론 쇠얀이 살던 시대 덴마크는 국가 교회(state church)가 지배했었고 어김없이 계급화된 사제들의 부패상이 만연했습니다.그의 저서 및 사상은 이것을 비난하고 반박하는것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것이 사실입니다.그가 위에서 말한 '보편적인 것'이란 타락한 국가교회를 지칭한것으로 보입니다.소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실존주의 철학의 사탕발림에 현혹되는 이유가 현재 우리나라 교회의 실태가 칼빈주의를 내세우는 교단신학과 성경의 권위를 넘보는 교회와 목사의 행태가 로만 카톨릭의 그것과 유사한 형태로 변질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고찰해 볼 사항입니다.글이 너무 길어지는 양상을 띄기에 속도를 내보겠습니다.쇠얀의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몇몇 부분에선 정통 기독교 신앙과 유사한 점도 존재합니다만,그의 저서 [Fear and Trembling]을 보면 그가 말하는 신앙이 명백히 비성경적 이란것을 알 수 있습니다.쉐퍼는 신앙에 두가지 개념이 있다고 말합니다.하나는 성경이 명령하고 요구하는 즉 정당하고 적절한 이유에 근거를 두고서 그것을 따르는것. 즉 성경에 근거한 신앙, 성경적 신앙에 의한 순종이며,또 하나는 어둠 속에서 뛰어오르는 맹목적 도약 즉,이성 없이(혹은 충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믿는 것이 신앙의 도약(a blind leap of faith) 입니다.결국 쇠얀의 신앙은 '맹목적 도약'이며 목적은 '공리주의'의 실현입니다.쇠얀이 [Fear and Trembling]에서 말하는 결론이자 신앙의 목적은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번거롭지만 쇠얀의 저서 [Fear and Trembling]를 대충이나마 살펴보고 그것에 대한 반박을 해보고자 합니다.-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행위는 우리가 가진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다. 그가 가진것이라곤 오로지 자기 혼자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명령뿐이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비밀스럽게 모리아 산으로 데려갔고,칼을 들어 결박 당한 이삭을 죽이려 할 때 비로소 자신의 비밀을 폭로했다. 아브라함을 신 앞에 선 단독자로 만든 것은 바로 그의 신앙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은 결코 체계화 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중략) 그가 그렇게 두려운 일을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시간적인 삶 전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희망과 정체성을 영원에 두었기 때문이다.이것이 바로 그가 이삭을, 이삭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집착을 버릴수 있었던 핵심동기다.(...중략) 아브라함은 그 이전까지 이삭은 하나님이 약속한 아들이라는 희망, 이삭을 통해 자신이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살아왔다.하지만 하나님이 그 이삭을 죽이라고 명하시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사랑이시자 자신이 따라야 할 분이라고 그는 믿는다.이러한 기사는 진정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한다고 할 수 있다.(...중략) 개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만, 하나님에게 온전히 자신을 바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놓여야 할 자리에 대신 세웠던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체계들을 폐기(윤리적인것의 목적론적 정지)할 것이다.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동했을 때 그는, 홀로, 하나님만 보았다(신앞에 선 단독자).쇠얀은 아브라함이 살인미수죄를 모면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그것은 윤리적 의무를 무한히 체념하고(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하나님과의 절대적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모순을 극복하는 방식)이라 주장한다.아브라함의 이러한 영웅적인 도약은 너무나 드높은 경지여서 이 도약앞에서 뭇 사람들은 한없는 두려움으로 전율한다.인간이 자신 안에 하나님을 잃고 혹은 잊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영혼의 죽음>이자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이다 ......혹시 쇠얀의 말에 수긍하는분 계십니까?저는 쇠얀의 의견에 전혀 동의 하지 않습니다.그 이유는 아브라함 당시에는 지금처럼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였습니다만,그러나 창세기 대홍수 사건, 바벨탑 사건 같은 전 지구적인 사건을 겪거나 혹은 겪은 직후 세대들이 데라와 아브라함이 살았을 당시에 여전히 생존(노아,셈,아르박삿,에벨,살라)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얼 뜻하느냐?이 당시에 아브라함이 우리처럼 완전한 성경 말씀을 지니고 있진 않았지만 그에 필적하는 '산 증인'들의 신뢰할만한 '증언'을 전해듣기에 충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이 '증인'들의 수명을 길게 보전하신 것은 온 땅에 편만한 우상숭배(다신론,범신론)로 부터 인류를 지켜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일부라고도 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창세기 대홍수와 바벨탑 사건을 겪은 세대들인 노아(950세),노아의 아들인 셈(600세),셈의 아들인 아르박삿(438세),아르박삿의 아들인 에벨(464세),살라(433세) 이후 자손들의 수명이 급격히 줄어드는것을 보면 말이죠.다시 말하면 그는 창세기 12장 1절의 하나님과의 동행 이전부터조직신학의 신론(theism)의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에 대해 충분히 인지했음이 분명합니다.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은 쉐퍼가 말한 첫번째에 속하는 체계화 된 신앙입니다.하나님의 은혜로 백세에 얻은 이삭을 모리아 땅의 산에서 번제헌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것도 그의 신앙의 맹목적 도약때문이 아니었습니다.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떠나왔던 우르땅의 우상신들과 달리유일하고 전지전능하시며 공의롭고 좋으신분 이란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고 또한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자신과 함께 하던 청년들과 모리아 땅에 동행한것입니다. 쇠얀의 말처럼 의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닌 맹목적 신양의 도약을 한 아브라함이라는 주객이 전도된 경우가 절대 아니었습니다.이것은 창 22장 5절 ; 8절을 보면 확연히 알수 있습니다.의인 욥의 고백(욥 1:21)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만하면 쇠얀 키르케고르와 그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의에 대해 간략히 알아봄과 동시에 왜 그것이 비성경적이고 반기독교적인지 나눠본것 같습니다.이어서 제임스 사이어가 요약한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왜 이신론(deism)으로 향할 수 밖에 없는지 간단히 적어보고 마치겠습니다.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유신론의 명제를 다소 받아들인다.유신론적 실존주의에서 가장 특징적 요소는 우주와 하나님의 본질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및 우주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다.1.인간은 인격적 존재이며 완전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 때 소외된 우주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는 이성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해결되는 난제다.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이 처음으로 자기 의식을 가졌을 때 자신을 발견하는 그 위치를 강조함.자기 자신의 존재, 자기 자신의 의식, 자기 자신의 자기 결정력 등에 대한 각 개인의 확신을 출발점으로 삼음.2.인격적인 것은 가치 있다.세속적(무신론적) 실존주의 처럼 유신론적 실존주의도 주관 세계와객관 세계의 구분을 강조함.인격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강조함. 유대인 실존주의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실재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관계를 구분하기 위해 '나-너(I-Thou), '나-그것(I-It)이란 용어를 사용함. '나-그것'의 관계에서 인간은 객체가 되게 하는 자(the objectifier)다."세계 안에 머물러 있으면 신을 발견할 수 없다. 세계 밖으로 나가도 신을 발견하지 못한다. 온 존재를 기울여 자신의 너를 만나기 위해 나아가고 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를 자신의 너에게 가져가는 사람만이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물론 신은 '완전한 타자'다.그러나 그는 또한 완전한 자기 동일자이며 완전한 현존자이다.확실히 그는 나타나서 압도하는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다. 그러나 그는 또한 나의 나(my I)보다도 나에게 가까이 있는 자명한 신비이기도 하다."3. 지식은 주관적이다. 완전한 진리는 종종 역설적이다.1835년 키르케고르는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가 아니라- 아는 일이 모든 행동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마음속으로 파악하는 일이다. 중요한 일은 내가 무엇을 하도록 예정되어 있는가, 또 신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요점은 나를 위한 진리를 찾는 것, 내가 그것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 살아야 할 이상을 찾는 것이다. 비록 내가 철학자들의 체계를 애써 파고들려 하고, 필요하다면 그 체계를 검토할 수 있게 된다 할지라도, 소위 말하는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란 말인가?"4. 사건의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불확실하고 중요하지 않다.그러나 현재화되고 생활화 될 모델 유형, 신화 등으로서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전통적 기독유신론에서 두 단계 퇴보 했다.첫 단계는 기록된 역사의 정확성을 불신하기 시작한 것.19세기 중반의 스트라우스(D.F. Strauss), 어니스트 르낭(Ernest Renan) 같은 고등 비평가들은 기적과 다른 기록들을 포함하여 성경의 모든 기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적은 일어날 수 없다는 자연주의의 전제 위에서 이론을 세워 나갔다.기적에 대한 기록은 원시적 사고 형태를 지닌 미신적 인간들이 주장한 것이고 따라서 거짓이 틀림이 없다고 주장했다.이러한 주장은 성경 기사의 권위를, 심지어 기적을 언급하지 않은 부분까지도 손상시킴.율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으로 대표되는 일단의 고등 비평가들은 모세가 오경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수세기에 걸쳐 여러명의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주장 했다.이것은 성경의 자중을 손상시켰으며 모든 성경 내용의 진실성에 의심을 품게 했다.이로 인해 기독교 신앙을 송두리째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대신 둘째 단계로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사실은 중요하지 않으며선한 생활에 대한 성경의 모범들과 도덕에 대한 강조점이 중요하다고 왜곡 했다.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속죄와 육체의 부활은 헌신적인 인간애으로서의 모범과 영적 교훈을 위한 신화로 격하 되었다.둘째 단계는 사실성에 대한 관심을 잃은 대신 종교적 뜻이나 의미를 강조한 것.성경의 권위와 성경에 기록된 기적과 역사적 사실성을 부인한 대표적인 신학자이자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로서 신정통주의를 주창한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 1976),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 - 1965)
등이 있다.
혹시나 많이 부족하고 엉성한 이 글을 다 읽으신 분이 있다면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아는 것에 있어서 아주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우리가 이런 현대사상들에 대해 공부하고 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이런것들이 '칼빈주의'에 경도되고 또 교단이 대형화 됨에 따라 국가 교회적인 권위주의 양상을 띄는 우리나라에서 거기 속한 구성원들한테 복음적인것 마냥 자칫 매혹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모쪼록 부족한 글 읽어주시느라 고생많으셨고 다들 무더위에 늘 주 안에서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딤후 4:2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이 글을 작성하며 부산대 철학과 정진우 교수의 영상과 프랜시스 쉐퍼, 제임스 사이어의 책을 참조하고 인용하였습니다.
2023-08-02 22:47:36 | 박세원
안녕하세요? 늘 주 안에서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2023-07-25 17:31:17 | 박세원
실존주의를 잘 이해시켜주셔서 고맙습니다~^^ 인간의 존재목적,창조주를 빼고서는 그 어떤 관점,철학도 불완전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뉴스에 나오는 모든 사회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성경말씀으로 다 설명되어지는 것만으로도 하나님 계심이 느껴져요. 능력없고 겁많은 제가 순종하나로 (예수님을 드러낼수 있을 정도의)아이들 세워놓고 맘편히 하나님아버지께 갈 그날을 고대하며 하루 시작하겠습니다~
2023-07-25 09:15:23 | 목영주
근본주의 성도들이 반지성주의자들 이라구요?-7(절망에서 절망으로)-세속적(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정의와 개요-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현재 우리에게 실존주의는 배워서 아는것이아니라 이미 우리 삶의 풍토로 자리 잡은 철학인 실존주의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이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파악하는것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실존주의의 반대는 본질주의이며,서양 철학의 역사는 본질을 탐구하려는 역사였고,형이상학이란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고 본질은 모든 존재하는것들의 원인과 목적을 탐구하는것 존재론 입니다.이것이 철학의 원래 목적이기도 합니다.
• 실존주의란 무엇인가?첫째, 실존주의(extentialism)는 개인의 자유,책임, 주체성(subjectivity)를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문학적 흐름이다.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 개인은 단순히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자기 삶의 주체다. 실존주의 사상은 공통적으로'실존은 본질에 선행(先行)한다'는 것, 인간은 자기 삶을 통해 "주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둘째, '실존(Existence)'은 본질(Essence)과 대비되는 개념이다.'실존'은 이념적 본질 밖에 빠져 나와 있는 현실적 존재를 의미한다.사물에 있어서는 본질이 실존에 선행한다. 하지만 인간에 있어서는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로운 존재다(Entwurf:기획투사).진정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삶에서 탈출하는 것이다.셋째, 타인은 지옥이다.희곡 '출구 없는 방(1944)의 대사를 통해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라고 처음 말한 사르트르는 "이 말이 늘 오해되어 왔다"고 했다."타인과의 관계는 언제나 해가 되고 지옥처럼 된다는 뜻이라고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내가 말하고자 한건 좀 다르다"고 했다.이 연극에 대한 1965년 강연에서 그가 한 말이다."우리는 타인들이 우리를 판단하는 잣대로 우리 자신을 판단한다.(...중략)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타인들의 판단과 평가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넷째, 실존의 본질은 자유, 자유가 없는 삶은 '불완전한 삶'이다.실존에 의해 그 본질을 결정해 가는 존재는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실존의 본질은 자유라고 할 수 있다.실존철학은 모든 교리의 절대화에 반항하고 인간실존의 진실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현대의 휴머니즘 철학으로 인정받고 있다."신은 인간을 개성을 지닌 존재로 만들었는데, 획일적으로 살아가면그것이 타락이다." 자기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존재는 온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불완전한 삶'이다.그러한 의미에서 실존주의는 온전한 삶을 위한 결단을 강조하는 철학이다."산에는 길이 없다.당신이 가는 곳이 길이다."- M.하이데거,<이정표>중에서.
세속적(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세 흐름프랑스의 사르트르(J.P Sartre, 1905-1980),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첫째로, 사르트르에 의하면 "우주는 합리적으로 볼 때 부조리(absurd)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의지(will)의 행동으로 자신을 자신답게 함(=실존적 체험)으로써 가능한데어려운 문제는 자신을 자신답게 하는 데는 아무런 합리적 혹은 논리적인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이와 같이 절망적인 상태에 처한 현대인을 위하여 울 수 밖에 없다."라고 했습니다.또 카뮈는 1950년에 발표한 어느 기고문에서 "절망의 문학(a literature of despair)이란 말은 용어상 모순이 된다.···허무주의라는 매우 어둡고 깊은 현대의 구렁텅이 속에서 나는 오로지 그것을 초월할 방법만을 추구해 왔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둘째로, 독일의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본래 심리학자로 "한계 체험(final experience)"을 말했습니다.이 한계 체험은 어떤 체험이 너무 절실하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확실성과 존재의의를 파악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줍니다.하지만 합리적으로는 인간이 이러한 희망을 도저히 가질 수 없으며,이 "한계 체험"이 내포하는 문제점은 이 체험이 합리적인 것과는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체험의 내용을 어느 누구에게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전달할 길이 없다는 점이 없다는 겁니다.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운전 중 교통사고가 났고 가까스로 참사를 모면했는데 마침내 그는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그런데 이런 극단적인 체험을 되풀이 하지 않는 한, 자신에게조차 전달을 할 수 없는 체험을 의지하여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절망적인가요.한계 체험을 스스로 얻는 길은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찾아올 뿐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독일의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가 말하는 소위 불안(Angst)을 가지고 있습니다.불안이 바로 두려움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어떤 대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불안은 막연한 두려움의 감정, 즉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나옴직한 흉가에 들어설 때 느끼는, 그와 같은 불편한 느낌입니다.하이데거는 만사를 이러한 류의 근본적인 불안에 결부시켰고 이러한 사상은 결국 도약에 근거하고 있는것입니다.과학이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가져다 줄것이라는 과학 낙관주의라는 환상은 양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대량 살상무기 개발과 확산, 참혹한 인명 살상으로 인해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이것은 자연주의는 허무주의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는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양차 세계대전을 겪은 인류는 인생은 부조리하고 인간은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내려버렸습니다.이러한 좌절과 문화적 불만의 토양속에서 세속적 실존주의는 문화적 뿌리를 내렸고 1950년에 이르러서는 주요 철학으로 만개했습니다.세속적 실존주의는 유물론 곧 무신론이라는 자연주의의 주요 명제를 긍정합니다.제임스 사이어는 세속적 실존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1. 우주는 단지 물질로만 구성됨. 그러나 인간에게는 실재가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가지 형태로 발현됨.2. 단지 인간만이 그 존재가 본질을 선행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현재 상태로 빚어낼 수 있음.3. 인간은 자신의 본성과 운명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로움.4. 매우 정교하고 빈틈없이 조직된 객관 세계는 인간과 대립 관계에 놓여있으며 인간에게는 부조리하게 보임.5. 객관 세계의 부조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대해 반대하는 진정한 인간이 반기를 들고 가치를 창출함.
실존주의는 허무주의의 심연에 빠진 현대인들이 붙잡도록 만들어진 썩은 동앗줄이라고 하면 좀 더 와닿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현대사회는 불확실성과 위기로 점철 되어있습니다.
다음 두 사례를 한번 보겠습니다.
ex 1)중견기업을 다니는 김부장(48)은 회사 경영실적의 악화로 인해 얼마전 회사로부터 권고사직을 통보 받았다.
안타깝게도 그에겐 주택담보대출 원리금 상환이 십년이상 남아있고 슬하에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는 자녀들이 둘이 나 있다. 그는 누구 못지 않게 성실하게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해왔고 회사에 자신의 젊음을 오롯이 바친 그였다.그러나 이 막막한 현실앞에서 그는 모든것이 무너져 내리는것 같았고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ex 2)최군(19)은 어려서부터 전문직에 종사하시는 부모님의 성화로 명문대 진학을 강요 받았다.
초등학교부터 대입수능을 위해 현재까지 많은시간과 거액을 들여 사교육을 받았지만 시험결과는 야속하기만 했다.유년기를 거쳐 청소년기를 온전히 입시에 바친 최군에게 대입수능실패는 곧 자기자신의 존재이유와 가치를 허물어 뜨렸으며그는 이 모든일에 염증과 허무를 느꼈다...
위 두 사례는 실존주의 철학으로 인해 위로받았다고 하는 실사례를 각색한 것입니다.
세속적 실존주의는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허무주의를 극복하고자 시도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각 개인을 초월하는 도덕적 기준을 제공하는데는 실패했으며 인간 가치의 근거를 주관에 둠으로써 실재와 유리된 영역에 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도약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결과인 '죽음'을 극복할 순 없었고 '죽음'과 함께 그 모든 의미들은 퇴색되고 종식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백번 양보해서 '도약' 한다손 치더라도 과연 현재 자신이 처한 위기와 문제들이 그들의 바램처럼 해결 될까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도피와 외면은 할수 있을지언정 말이죠.
또 한가지 재밌는점은 어떤 사람들이 이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옹호할때 대표적으로 무법적이고 퇴폐적인 히피문화의 발생 및
확산과 연관짓지 말라고 당부하는데 지금 우리나라를 예를 들면 OECD 국가중 자살율 1위라는 것은 허무주의 탓으로 돌린다 쳐도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한 도덕의 붕괴와 무법적이고 무질서적인 행태, 퇴폐적이고 변태적인 성적 문란, 마약을 비롯 향정신성 약물의 광범위한 중독과 남용을 바라보면 구차한 변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지금처럼 사람들이 혼돈과 절망에서 도무지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일 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는것을 알릴 호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마 18:12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에게 양 백마리가 있는데 그것들 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그가 아흔 아홉 마리를 남겨 두고 산으로 들어가 길 잃은 그 양을 찾지 아니하느냐?마 18:13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만일 그것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양으로 인하여 더 기뻐하리라.※ 이 글을 작성하며 부산대 철학과 정진우 교수의 영상과 프랜시스 쉐퍼,제임스 사이어의 책을 참조하고 인용하였습니다.
2023-07-23 03:06:18 | 박세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3-07-18 21:47:27 | 김삼호
샬롬 ~~
전철역 입구에서 ‘신천지’ 홍보지 나눠 주시는 할머니에게
목사님 설교(특히 요한계시록)를 알려 드리고 싶어서 정동수 목사님 강해 목록을 작성하였습니다.
다른 교회 섬기시는 분들께 출력 또는 파일로 전달하시면 좋겠다는 생각에 공유합니다.
강해 동영상 수 기준은 유튜브에 등록된 기준을 따랐습니다.
교회 홈피에 등록된 강해 수와 유튜브에 등록된 강해 수가 일치 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그중에 일부는 의도적으로 설교 후 유튜브에서 삭제한 것도 있고
일부는 유튜브에 동영상이 있는데, 유튜브 재생 목록에 미등록 된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등록 된 것과, 재생 목록 구성이 필요한 것을 표시하였습니다.
교회 홈페이지 [강해 시리즈]에는 없는데,
최근 ‘킹제임스 성경 전래’ 강연하신 김재근 목사님의 강연 내용이 좋아서 추가했고,
홍승대 형제님 특강하신 내용이 저에게 신선한 강의로 인식되어 [작성자 추천]이란 항목으로 추가하였습니다.
2023-07-17 15:15:48 | 박충영
잘 설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세상사람들은 사리분별하기가 더 애매모호해지고 가해자의 편에 서는 의견을 접해도 이젠 놀랍지도 않을정도로 사회가 혼탁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리!하나만 쫒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살아가기는 힘들어도 오히려 세상가치관과 확연히 달라 (내 생각 표현만 해도)쉽게 예수님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에 위로가 되요..
2023-07-17 07:55:20 | 목영주
- 서구 문명 몰락의 신호탄 , 포스트모더니즘 -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포스트 모더니즘이란 용어를 처음 쓴 학자중 하나는 위대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 입니다.
1940년대 토인비는 세계 문명의 흥망성쇠에 대한 연구에 몰두 했습니다.고대 로마~ 제국주의 중국, 바빌론~아즈텍 문명까지 포괄하는, 21권의 세계 문명에 대한 그의 연구에 기초하면 무너지고 있는 사회들은 일종의 "영혼의 붕괴"를 겪는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헬라스 사회 이외의 어느 사회를 조사해 보아도, 문명 쇠퇴의 원인은외적이 한 일은 기껏해야 막 숨을 거두려는 자살자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일이었습니다.인간은 도덕성을 더 이상 믿지 않고, 자신들의 창의성을 버리며 스스로의 충동에 굴복합니다.그들은 또한 나태, 즉 현실도피 심리에 굴복하여 자신들만의 향락과 오락의 세계로 도망해 들어감으로써 문제의 회피를 꾀하였습니다. 자신들은 표류하는 존재라는 느낌을 가지면서 무의미한 결정론에 굴복하고, 마치 자기의 노력은 중요치 않고, 어차피 자기들 인생에 대한 아무 조절 능력도 없다는 듯이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도덕을 포기함으로써 나타나는 자기혐오의 자포자기식 죄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행하는 혼음을 토인비는 성적 감각이라기보다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고 초점도 없이 타협하고, 무비판적으로 관용하는 의미로 보았습니다.토인비는 이러한 혼음을 "예절이나 관습 뿐만 아니라, 종교,문학,언어,예술을 뒤섞어 넣고 녹이는 용광로 속에, 자포자기로 끌려 들어가는대중심리의 승리"라고 했습니다.토인비는 자기가 살던 시대,2차 세계대전, 냉전의 시초에 대해 눈을 돌렸을 때, 토인비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을 예견하면서 그 용어를 사용했을뿐만 아니라 그것이 갖게 될 의미까지도 묘사를 해뒀습니다.패트리시아 워프(patricia waugh)는 그의 예측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토인비에게는 포스트모던 시대가 넷째 단계가 될 것이며 이는 서구역사의 최후 국면이고, 고뇌와 불합리, 망연자실에 싸인 국면이 될것이다. 그러한 세계 속에서, 인간 의식은 표류하게 될 것이며, 지난 날 모더니즘적인 이상들이 세워졌었던 것과 같은 정의, 진리, 이성의 어떤 보편적 기반 위에도 다가설 수 없게 될 것이다.의식자체가 중심을 잃게 되고, 이미 더이상 세계속의 행동의 대변자가 되지 못할 것이며, 비인간적인 힘들이 서로 통하며 교차하는 기능의 역할만 하게 될 뿐이다. 예술은 인간 정신의 표출이 아닌, 또 다른종류의 상품이 될 뿐이다. 따라서 지식이 행하는 비평의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하고, 예술은 그 기능만 지니게 될 것이다.더구나, 우리는 포스트모던의 상황 속에 있고, 그 문화속에서 모든 지식은 설교를 통해서 형성될 것이며, 우리는 초월성에 대해 더이상 추구할 수 없을 것이다. 문화를 바라 볼 수 있는 객관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관념으로 이겨서 얻기를 애쓰는 대상 범주 속에는 이미 개념적 공간이라는 알맹이가 빠져 버렸다. 즉 칸트가 말하는 " 신의 관점"은 아예 없어져 버린 것이다. 오직 내면으로부터의 붕괴, 즉 소인정치, 언어 유희들, 장난 같은 싸움들, 이율배반, 분열 등만이 존재 할 수 있을것이다"우리는 이 "의식의 표류"가 많은 동시대 이론가들의 주장대로 "해방"인지 아니면 토인비의 주장대로 " 서구 문명 몰락의 신호탄"인지 살펴 보겠습니다.찰스 젱스(Charles Jencks)에 따르면, 모더니즘이 끝나고 포스트 모더니즘이 시작된 기점이 1972년 7월 15일 오후 3시 32분 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모더니즘 최첨단 건축술의 표본이었던 '프루이트-아이고(Pruitt-Igoe 는 도시 재생 프로그램의 일환으로이전 빈민가 자리에 연방 기금으로 건설되고 사회 공학적 의도가 가미된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공공주택 단지 개발 중 하나였다)가 폭파 및 철거된 일을 말합니다.
※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시면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archicube01&logNo=222174245824&targetKeyword=pruitt-igoe&targetRecommendationCode=1&keywordSearchType=TEXT포스트 모더니즘이란 용어는 본래 건축학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건축가들이 콘크리트, 유리, 강철로 된 비인격적이고 꾸밈없는상자 모양의 건축물을 더 이상 짓지 않고, 과거로부터 여러 특색을 끌어오되 그 본래의 목적이나 기능과 상관없이 복잡한 모양과 형태를 꾸며내는 방향으로 전환된데서 유래 했다고 합니다.여기서 살펴 볼 수 있는것은 모더니즘이 추구했던- (하나님을 제외하고서) 오직 자신의 이성에 기초하여 합리주의적 입장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점차로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것을 기계로 결론 지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사람은 물론이요 다른 동·식물들의 기관이 조화를 이루며 그 기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게 그 형태를 만드시되 또한 각자의 개성과 아름다움이 빛 바래지 않게 배려하신 우리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그 분의 선하고 아름다운 성품과 완벽하고 섬세한 예술감각을 보고 있자면 내 혼과 내 입이 온 마음을 다해 그 분을 찬양합니다.각설하고 프랑스 사회학자 장 프랑수와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가 포스트모던이란 용어를 문화적 정당화 방식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면서 문화 분석에서 핵심 단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을 서구 문화를 하나로 묶어 주는 단 하나의 "거대담론들(meta-narratives)"에 대한 불신으로 정의 했습니다.또 월터 트루엣 앤더슨은 자신의 저서에서 사상 변동을 형성하는3가지 과정을 인용했는데,
(1) 믿음의 파괴 :오늘날엔 '옳은 것'에 대한 지구적(地球的)동의 사항이 없다. 우리는 "모든 신념체계의 방식이 대중 소비를 위해 주어지는 원칙 없는 현실이라는 시장에 와 있다"고 말했습니다.
(2) 지구적 문화의 탄생 : " 모든 신념 체계는 다른 신념 체계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있다." 고 말하고 , 그 결과로 그들 중에서 어느 것을 절대 참된 것으로 받아 들이기가 어렵게 된다고 합니다.(3) 새로운 극단화 :사회적 진리의 본질에 관한 투쟁들로 사회는 분열될 것이며 우리는 "문화 전쟁들" , 특히 교육과 도덕 지도에 관한 문제들을 놓고 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합니다.그리고 과거의 위대한 지적 체계들은 늘 뚜렷한 근본을 가지고 있는 것들인데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든 객관적 기반을 파괴해버리고 아무 근본도 남겨두지 않는 것입니다.또한 지식이 곧 진리의 반영이라고 주장하며 하나님과 역사 및 이성으로부터 안정된 근본을 찾을 수 있다는 사상으로 정의된 "근본주의"를 배제 합니다.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역사도 분해하려 합니다.그들은 역사를 사실들의 객관적 기록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지어놓은언어라는것과 맞물려 돌아가는 은유의 연속으로 간주 합니다.결국 우리는 사실과 소설을 구분 할수 없습니다.기독교 사상가 제임스 사이어가 정리한바에 의하면1. 포스트모더니즘이 다루는 첫째 질문은 무엇이 존재하느냐 혹은 그 존재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언어가 어떻게 의미를 구성하느냐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일차적인 문제'가 존재에서 인식을 거쳐 의미 구성으로 변천된 것이다.2. 실재 자체에 관한 진리는 영원히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 우리가 할수 있는것이라곤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뿐이다.3. 이야기는 공동체에 결속력을 제공한다.4. 모든 이야기들은 권력 놀음을 위장한다. 어떤 이야기든 일단 거대담론이 되면 억압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5. 실체적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에 관해 묘사하는 그 언어에 의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존재다.6. 윤리는 지식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구성물이다. 한 사회가 선(善)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사회적 선이 될수 있다.7. 포스트모더니즘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이 정도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와 지향점에 대해 기본적인 서술은 되었다고 보여집니다.저는 개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그 정체성과 실체에 있어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혼돈 그 자체인 사상이기에 실존주의와 마찬가지로 대중 문화나 예술로 살펴보는것이 되려 이해가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피카소 작,"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현대 미술의 탄생을 의미함.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Nude Descending a Staircase No.2)
마르셀 뒤샹의 "기성품(ready-made)" 또는 "자전거 바퀴" 로 불림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의 액션 페인팅...모든것이 우연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신중하게 그림을 그림.
음악을 현대 사상의 운반 수단으로 만든 "12음계"를 발명한 쇤베르크
쇤베르크의 제자로서 우주가 우연의 우주라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우연적으로 음악(날카로운 소음)을 만든 존 케이지(John cage).그러나 케이지는 사람이 그러한 기반에서는 살 수 없고, 우연적 우주 개념은 현재의 우주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줌. 그리고 그는 버섯 연구 전문가로서 " 내가 만일 우연한 동작이라는 생각으로 버섯에 다가가면,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주정뱅이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시인 T.S 엘리엇의 "황무지" 5번째(마지막)부분의 마지막황량한 탑속에 갇힌 아퀴텐 공작.이 단편들로 나는 내 폐허를 지탱해 왔다.분부대로 합죠.히에로니모는 다시 미쳤다.다타. 다야드밤. 다미야타.산티 산티 산티.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은 심히 주관적이며 혼란스럽고 모순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사상으로 가득 차 있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저도 이 글 쓰면서 도대체 내가 무얼 하고 있는가 하는 자괴감이 얼핏 들기도 했습니다.사실 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가장 큰 병폐는 사람들이 진지하기를기피한다는 점입니다.과거에는 자신의 사상과 가치관의 변호를 위해 두꺼운 책 읽기를 마다 않는 노력과 진지함이 있었는데 지금은 책은 커녕 동영상도 분량이 길면 기피하는 시대 입니다.이런 시대를 도래하게 만든 거대한 사회공학의 조작에서 그리스도인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확고한 진리의 반석위에 서 있는 은혜를 누리고 있기에 사람들의 의식구조와 그 문화속에 교묘히심겨져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그것들을 분별하고 철저히 대적하며단 하나의 혼이라도 더 '길이요,진리요,생명'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인도하는게 우리의 책무라는 생각이 듭니다.그러기 위해선 그들이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그들의 언어를 사용해야 할 필요성이 존재하기에 성경과 비교하여 무가치하고 불결한 이런 반기독교적인 현대사상에 대한 공부도 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렘 5:31 대언자들은 거짓으로 대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방법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것을 사랑하니
그것의 마지막에는 너희가 무엇을 하려느냐?
다음엔 포스트모더니즘과 현대신학과 불가분의 관계인 실존주의에 대해 같이 나눠보고자 합니다.아무쪼록 변덕스러운 날씨에 늘 주 안에서 평안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이 글을 쓰며 에드워드 베이스, 제임스 사이어, 프랜시스 쉐퍼의 저서를 참조 및 인용하였습니다.
2023-07-16 00:21:57 | 박세원
천사들 찬양의 박수소리 함께하는 예배 분위기 너무 좋았던 것 같습니다. ^^ 감사합니다. 주님 은총 넘쳐나는 주말 보내세요 ~ ^^
2023-07-15 20:42:55 | 최영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걸 제대로-확실히-알면 알수록(교리,하나님의 뜻) 사람들의 전통을 따를 수가 없을텐데..싶어요. 그분이 진리로 엄청나신데 거기다 (사람들의 전통에 위로받는) 내 생각을 조금 갖다붙이는 노력?까지 하며 살기엔 지금 이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악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2023-07-11 19:15:58 | 목영주
하나님의 파워가 느껴져 천둥소리를 좋아해서 그런지 하나님말씀 들으며 중간중간 빗소리 크게 듣는게 새롭고 좋았어요~
2023-07-11 19:10:54 | 목영주
특별한 찬양
교회 지붕은
여하튼 철판으로 덮을 것이라
장맛비 억수같이 퍼붓는 날
예배당에 앉아보면
그 까닭 알게 되리
한 장 철판 너머 하늘 우러러
주 찬양할 때면
더욱더 잘 알게 되리라
죄인들의 찬송가 소리
그리고
온 세상 삼켜 버릴 듯한
천천 만만 천사들의 박수 소리
거룩함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노아의 그날 떠올렸음은
지은 죄들 때문이던가
목자의 말씀 선포에 때맞춰
천사들 찬양의 박수 잦아드니
신비 아니면 무엇이랴
내가 듣고 있노라
그 음성 들리는 듯 하더라
주 향한 그리움에 물기 어린 눈
눈
눈들
**********************************************************
그저께
그 주일 날의 그 찬양을 아마도 영원히 못 잊을 것 같습니다
우리교회...사랑침례교회
참...지붕까지도 끝내주더군요
찬양 분위기 완전 짱!
^^
2023-07-11 13:19:59 | 최영오
-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학문-안녕하세요?다들 평안한 주일되셨는지요?
지난 글에서 포스트 모더니즘과 실존주의에 대해 같이 나눌거라고 말씀드렸는데 실존주의는 사실 지난 글 말미에 버트런드 러셀이 말한"완전환 확실성 없이 활력을 갖고 행위하도록 사람들을 북돋우는 것"싱겁지만 바로 이것이 실존주의의 핵심입니다.일단 포스트 모더니즘과 실존주의를 다루기 전에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에 대해 나눠보고 철학의 질문에 성경은 무어라고 대답하는지 병행하여 적어보겠습니다.전통적 의미에서 철학이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며 모든 대상들의 본질을 탐구하는 활동입니다.philosophy: philos(사랑하다) + sophia(지혜)그럼 지혜란 무엇일까요?지혜는 현상을 통해 그 이면(현상 너머)의 본질을 이해하는 통찰력(insight)입니다.또 지혜는 현상하는 세계 속에서 그 세계의 본질을 바라보는 능력을 의미 합니다.다시 말하면 외면적인 것을 통해 내면적인 것을 통찰하는 능력입니다.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다는 솔로몬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것이 지혜의 시작(잠 9:10)이라고 했습니다.자 그럼 본질은 무엇일까요?본질이란 만유의 원인이자 목적입니다.만유의 원인: ~때문에,시작,알파,처음성경에 기록된 만유의 원인(창1,2장/사44:6;48:12/요1:1; 1:2;1:3; 1:10/계1:8;1:11; 1:17; 2:8 ; 22:13)만유의 목적:~을 위하여,끝 오메가,마침성경에 기록된 만유의 목적(사 44:6 ; 48:12/요 17:22/계 1:8 ; 1:11 ; 1:17; 2:8; 4:11 ; 5:13 ; 22:13)철학은 본질을 "진리"라고 부릅니다.-성경에서 말하는 진리(요 14:6; 17:17/요일 5:6)본질이란 모든 현상들,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자 목적을 의미합니다."모든 것이 그것으로부터 나와서 모든 것이 그것으로 되돌아가는것"-성경이 말하는 본질 계 1:8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마침이라."존재 이유와 존재 목적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본질에 대한 탐구는 곧 존재론을 말합니다.철학=형이상학=존재론philosophy: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을 통찰meta-physics: 현상세계의 너머를 탐구하는 학문(형이상학)ontology:본질 탐구는 존재 이유/목적에 대한 탐구(존재론)철학에서는 "진리"를 나타내는 다양한 표현들이 있습니다.본질:essence,wesen근원:origin,arche실체:substance,substanz일자:The One,Das Eins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를 탐구한다는 점에서철학은 곧 형이상학(meta-physics),물리학의 세계 너머를 탐구"철학은 모든 존재자들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이고,본질을 탐구하는 형이상학이란 곧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 이유와 존재목적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이다."철학은 형이상학이고 형이상학은 곧 존재론 입니다.-형이상학에 대한 성경의 위대한 답변(롬 1:20/ 고후 4:18 /골 1:15,16/ 딤전 1:17 / 히 11:1 ; 11:27)어떤가요?제목에 적어놨듯이 철학은 신학의 발받침이라고 말한것이결코 과언 또는 허언이 아니었음을 여러분도 납득하셨을 겁니다.위대한 철학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걸고 고민하던 질문들에 대한 답이성경에 이렇게 완전 무결하게 기록되어 있을 줄 저도 사실 몰랐습니다.진리 그 자체인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잠시 뒤로하고 6월 25일 고성국 박사님에 대한 강의에서 몇가지 짚어 보고자 합니다.여러분이 보셨듯 세상 학문중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철학은 신학(성경)앞에서 빌 2:10-11의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지난 6월 25일자 고성국 박사님의 강의 14분 58초 무렵 "절대적인 고독속에서 외로운 개인(단독자)이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기독교 신앙"으로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이것은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르케고르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1894년)'에 나오는 대목입니다(다음에 설명 드리겠지만 키르케고르가 주장하는 신앙은 정통 기독교 신앙과는 거리가 멉니다).저는 이부분을 보며 너무나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기독교의 교리를 신학자가 아닌 철학자를 통해 들어야만 하다니...키르케고르의 인생이 망가지고 그가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주창했던이유도 당시 덴마크는 국가 교회(state church)-루터교를 지향하며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으로 통치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또 고박사님은 칼빈의 '예정설'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믿고싶어도 이미 칼빈주의의 이중예정에 의하면 천국갈 자, 지옥갈 자가 정해져 있어서 죽고 난뒤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서야 비로소 자신의 구원의 여부를 알 수 있기에 평생동안 불안에 떨면서 살바엔 신앙갖기를 체념한걸로 저는 생각되었습니다.여러분...저는 솔직히 칼빈이 천국에 갔는지 확신이 안 섭니다.이 칼빈주의는요 이렇듯 그 얼토당토 않는 비성경적인 교리로 인해유신론적 실존주의가 더 기독교 신앙에 가깝다는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칼빈주의는 기독교(복음)라는 진리를 종교 또는 철학으로 격하 시켜 버렸습니다.이 칼빈주의를 신봉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할 필요도 없으셨고 하물며 그분의 대신속죄를 왜 믿어야 하는지 퀘스천 마크 입니다.믿든지 아니하든지 이미 다 정해놓으셨는데 말이죠.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성경적 구원의 확신과 영생에 대한 소망으로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견뎌내야 할 그리스도인이 불안과 절망에 떨며 유신론적 실존주의라는 철학에 의탁해야 하는 비극이 말이 됩니까?존경하는 고(故) 구영재 선교사님의 책 [에큐메니즘의 이상과 우상]52-3p에 가서 보면 에스텝(Estep) 교수는"교회의 타락에 대한 재침례교도들의 해석은 개혁자들과는 매우 다르다. 개혁자들은 분명히 콘스탄틴 시대를 교회의 승리의 시기로 보는 로만카톨릭 교회의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고...(중략)그들에게 있어 개혁이란 교황권에 대한 반동이었지 로만카톨릭교의 제도로서의 교회의 개념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중략)그들은 정화될 필요가 있다고는 믿었지만 교회라는 전체적 일치감에서 제외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로만카톨릭교회와 완전히 분리된 이후에도 그들은 계속 개혁 이전 로마교회와의 연속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 당시 개혁자들은 개혁 이전의 교회조직을 교회가 아니었다고는 보지 않았다.이것이 바로 재침례교도들이 개혁자들을 완전한 개혁자로 보지 않은 이유였다".군더더기 없는 비평입니다.간단하게 요즘 개혁신학자들의 성경 무오성에 대한 입장만 봐도 답이 나오는 부분입니다.개혁신학이 과학과 철학, 현대주의의 맹공에 이렇다 할 반격을 하지 못하고 잠식되가고 있는 이유를 멀리서 찾을 필요 없습니다.국내에서 주류 교파,주류 교단이라는 선민의식에 도취되서 성경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가르치기 보다는 칼빈주의만이 진리라고 믿으며허구한날 "칼빈이 나의 목자시요, 칼빈께서 이르시되..."를 남발하는 개혁주의 진영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갈라디아서 1장 6절 말씀은 칼빈주의를 경고한게 아닐까 개인적으로 사료됩니다.좀 두서가 없었는데요...포스트 모더니즘과 실존주의에 대해선 다음 글에서 나눠보도록 하며다음 말씀과 함께 글을 맺을까 합니다.골로새서 2:8 어떤 사람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하지 못하도록 조심하라. 그것들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을 따르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라.
※ 전통적인 의미에서 철학의 정의에 대한 것은 부산대 철학과 정진우 교수의 영상을 참조하여 인용했습니다.
2023-07-10 22:09:50 | 박세원
안녕하세요.직장때문에 중국에서 19년을 지내다가 2022년3월에 전가족이 한국으로 완전 귀국을 하였습니다.
정동수목사님 설교말씀을 중국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들었습니다.고1아들과 중2딸을 위해 요번 설교하시기 전에 <수학싸부> 인강을 안내해 주셨는데, 신청 방법 등을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잘 부탁드리겠습니다.
2023-07-10 17:21:04 | 김성재
절대적 진리가 있다는 걸 안다면 옳고,맞는 것만 따르면 되기 때문에 갈등이 없어 편안하다는 득이 있습니다 아니 그것보다 먼저 우리 몸 면역체계 하나만 곰-곰-히 생각해 보아도 창조주가 계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세상살이도 생각분별 잘 해야 덜 힘들텐데 점점더 생각의 부재가 심해지는 세상시스템에서 요즘 우리 아이들이 많이 불쌍해요..
2023-07-10 16:02:26 | 목영주
-빠져 나올수 없는 심연속으로-
먼저 형제 자매님들 가정이 늘 주 안에서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혹시 여러분들은 '철학'하면 어떤게 떠오르시나요?더 없이 화창하고 푸근한 봄날 백주 대낮에 공원에서 다른 이들이 각자 거닐때 잘 차려입고 안경낀 신사가 곰방대를 물고 세상 가장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고 턱을 괴고 벤치에 앉아 고뇌하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나요?아니면 후줄근하게 보이는 청년이 야심한 밤 골방에 촛점없는 눈으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천장을 응시하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 떠오르시나요?이처럼 '철학'하면 우리가 그 정의를 명확히 몰라도 무언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그림이 그려집니다.그러면 '철학'이란 대체 뭘까?20세기 위대한 지성으로 손꼽히는 버트런드 러셀이 '철학'의 정의에 대해 말한걸 한번 들어볼만 합니다.
Q:철학의 정의란?A:아직은 엄밀한 지식으로 정립되기 불가능한 문제들에 대한 추측들.Q:철학과 과학의 차이점 이란?A:철학은 우리가 모르는 것/ 과학은 우리가 아는 것.지식이 발달함에 따라, 철학적 문제 들은 철학에서 과학으로 지속적으로 이행해 가고 있음.Q:철학의 유용한 점은?A:첫째는 과학적 지식이 아직 다룰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활발한 추측을 지속하는 것이다.과학적 지식은 인류가 관심을 갖고 주목해야만 할 문제들 중 일부분만을 다룸.오늘날 과학이 답변을 하지 못하는 상당히 주목할 만한 아주 많은 문제들이 있음.세계에 대한 상상의 영역을 가설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이 철학의 용도 중 하나인것.둘 째,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다고 여겼던 문제들과 우리가 여전히 알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음을 보여준다.우리가 앎에 이를 수도 있는 문제들에 대한 사유를 지속하게 해주며 앎처럼 보이는 것이 어떤 점에서 앎이 아닌 지를 겸허히 받아들이도록 해주는 것이다.Q.철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과학의 시녀 같은 것이 되는 건가?A:철학은 과학의 일부이나 시녀는 아니다.과학이 다룰 수 없는 수 많은 문제들이 있기 때문임.가치와 관련된 모든 물음들을 예로 들면, 과학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알려주지는 못할 것 같음.Q:철학의 미래는?A:과학의 발전은 철학의 중요성을 불가피하게 약화시킬거라 생각 됨.Q:철학의 가치를 요약한다면?A:첫째, 현재 과학이 다룰 수 없는 아주 광범위하고 아주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는 점을 자각하도록 함.둘째, 사람들을 좀 더 지적으로 겸허하게 해준다는 것....저는 버트런드 러셀 만큼 철학에 대해 간단 명료하게 정의한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또 그는 "언어가 시인의 손에 들어가면 꽃이 되지만, 철학자의 손에 들어가면 잘 훈련되고 조직된 군대가 되더라""사람들은 세상 무엇보다 생각을 두려워한다. 파멸보다, 심지어 죽음보다 생각을 두려워한다. 생각은 전복적이고 혁명적이며 파괴적이고 잔인하다. 생각은 특권과 안정된제도, 익숙한 관습을 봐주지 않는다. 생각은 아무 두려움 없이 지옥을 깊숙이 살핀다. 생각은 위대하고 신속하고 자유로운 세상의 빛이자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영광이다""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현대사회에서 똑똑한 사람들은 매사를 의심하는데 바보들은 지나치게 자신만만하다는 것이다.""우리들은 모두 세상을 자신의 선입관에 맞춰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와 상반된 관점은 필연적으로 생각하는 수고로움을 동반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죠. "와 같은 생각하기를 기피하고 거부하는 불신자들과 sunday 크리스천들에게 해주고 싶은 주옥 같은말을 하기도 했습니다.물론 러셀은 대표적인 반기독교적인 인물입니다.그러면 우리는 버트런드 러셀의 인터뷰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추론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철학 속에 어떤 '의도'가 내재 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혹은 어떤 '의도'로 철학을 전개하느냐에 따라 과학의 목적지와 활용 방법이 결정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저는 철학이 올바른 방향으로 작동되었다면 예외없이 그 누구라도 성경을 읽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철학자의 본분은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맑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그것을 넘어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왔습니다.과학 낙관주의가 붕괴된 세계 양차대전 후 불안과 절망에 휩싸인 수많은 사람들이 러셀에게 편지로 문의 하였다고 합니다.이제까지의 전통적인 지침들(추측컨대 성경에서 말하는)을 올바른 행위로 받아들이길 그만두고 어떻게 스스로 행동해야 할지 이제는 완전히 모르겠다고 하는 내용들로 말이죠.그래서 러셀은 전적인 확신을 적대시하며 그가 추구하는 철학의 용도와 유용성은 확신이라는 것이 자리하는 것을 엄금하며완전환 확실성 없이 활력을 갖고 행위하도록 사람들을 북돋우는 것(도약)이라고 말이죠.이것은 바로 인본주의의 출발점인 '이성에서의 도피'와 '비(非)이성으로의 도약'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러셀을 비롯한 지성인들,사상가들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한 시대(modern times)가 저물고 또다시 이들의 헛된 철학(과학 낙관주의)이 처참히 실패했을때 우리는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 운동으로다시 그들을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다고 기대에 부풀었으나 하나님께선 자신의 전체 계획을 위한 직선적인 세계 경영통치를 그닥 늦추고 싶진 않으신것 같습니다.사탄과 그의 추종세력들이 자신들이 승리했으며 지금같이 그들의 시대가 영원할거라고 착각할 동안우리는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이 끝나가고 있고 곧 심판이 닥치리란걸 알고 있습니다.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고 인간 이성,도덕을 상실한 지금의 시대를 우리는 포스트 모던(post modern) 또는 포스트 포스트 모던(post post modern)시대라고들 합니다.그리고 현 시대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주류 철학은 실존주의(existentialism)입니다.대중문화와 사회 현상등을 통해 누구라도 인지 하고 있는 사실이지요.다음번엔 현재 만연한 포스트 모더니즘과 실존주의에 대해 많이 부족하지만 간략히 적어 보고자 합니다.
-벧후3:8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 사실에 대하여 무지한 자가 되지 말라. 벧후3:9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2023-07-09 21:09:05 | 박세원
진화론 인본주의로 가득차서는 허무주의,출세지향,물질만능주의,비교의식..단어들을 모두다 피하며 살아간다는건 거의 불가능해 보이네요. 참기쁨,진심인 감사는 복음안에 그리고 진리안에 있다는 걸 모르는 우리아가들(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제일 마음 아프네요..
2023-07-01 13:00:04 | 목영주
형제님, 올려주신 글에 감사합니다.
구원은 단번에 이루어지지만
성화는 일생을 거쳐 이루어가는 것이고
성화의 교과서는 올바른 성경이죠.
속히 영화롭게 되기를 ~
2023-06-30 19:33:08 | 이수영
-진화론적 인본주의 세계관이 끼치고 있는 영향-
프랑스어<D'où Venons Nous? / Que Sommes Nous? / Où Allons Nous?>영어<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이 긴 제목의 작품은 폴 고갱(Paul Gauguin, 1848년 6월 7일~1903년 5월 8일)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그는 이 작품을 1897년 타히티에서 사랑하는 딸 알린느의 죽음에 대한 충격, 극도의 궁핍과 건강의 악화로 인한 절망속에서 자살을 기도하면서 마치 유서를 작성하듯 일년을 걸려 이 대작을 완성한 뒤 그는 산 꼭대기에 올라 음독 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쳤습니다.이 작품은 지난 50년간 단 세 번의 외유만 가능했던 보스턴 미술관 소장작품입니다. 2013년, 마침내 3년간의 섭외 작업 끝에 극적으로 국내 전시에 처음으로 소개된 고갱 예술의 백미이며 당시 평가가치 3천억원 이라는 단일작품으로는 천문학적인 가치가 매겨졌습니다.미술작품 사상 이보다 더 철학적인 메시지를 던진 작품이 있을까요?안타깝게도 고갱은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온 곳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며, 갈곳도 없다..."라고 말이죠.고갱은 1901년 매독과 영양실조,모르핀 중독등으로 회복이 불가한상태에 이르렀고 1903년 매독 말기에 찾아온 정신착란 증세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긴 제목의 고갱의 작품을 철학의 언어로 다듬으면 이렇게 바꿀수 있지 않을까요?-(인간이라는)존재의 기원, 존재의 인식, 존재의 최후- 이렇게 말이죠.절정기 르네상스의 인본주의가 계몽주의를 거쳐 완숙기로 가고있었는데, 르네상스 인본주의에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자율적인 존재로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흐름이 지속되면서, 현대적 근대과학에 이르러선 사람은 존재의 기원과 그 이유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지질학자였던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1797-1875)이 지질학에서 자연 원인의 제일성과 동일과정설을 특히 강조해 물꼬를 틔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 뒤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 라이엘의 생각을 생물학적 생명의 기원으로 확장 시켰습니다.이것은 바로 존재의 기원에서부터 비이성(非理性)의 영역으로 치닫기 시작하니까 인간이라는 존재의 존엄성과 근본적인 삶의 목적을 상실하기 시작합니다(사람이 창조된 목적은 하나님의 전체 계획안에서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창조 되었으며,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롬 8:29/ 엡 4:13 에 잘 나타나 있음).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우리의 운명, 즉 7-80년 이라는 짧은 생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심각하고 절박한 고뇌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아예 괘념치 않게 됩니다.결과적으로 이것은 도덕과 가치 판단이 붕괴됨에 따라 인간성(人間性)을 상실한 야만인이 되어 되려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으며전지전능하고 절대적인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이젠 짐승들에게 배워야 하는 지경(욥 12:7)에까지 이르게 된것입니다.우리는 이 세상 모든것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것은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Chirist's an imminent of second comming)의 징조 이기도 합니다.그러나 진화론적 인본주의자들은 시작도 끝도 없이 현재의 과정이 영원히 동일하다고 사람들을 속입니다.성경은 이미 이런 진화론에 타협적인 기독교인(유신진화론자,무천년주의자,후천년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예견했습니다.벧후 3:3-4 먼저 이것을 알라. 마지막 날들에 비웃는 자들이 와서 자기 정욕을 따라 걸으며 이르되,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부터 있던 것 같이 그대로 계속되느니라, 하리니...서론이 너무 길었는데 이제부터 진화론적 인본주의 세계관이 어떤 영향을 끼쳤고 끼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보신대로 진화론적 인본주의 세계관은 전세계에 만연된 도덕적 붕괴의 근본적 원인이 되었으며 그 해악은 통계기간을 길게 잡으면 잡을수록 처참하기 이를데 없습니다.그러면 이 모든게 진화론이라는 사이비 과학 가설이 불러온 문제냐 하면 그렇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작은 누룩 하나가 온 덩어리를 뜨게 할진대 이미 진화론 이전에 신학과 철학의 분야에서 진화론이 뿌리 내릴수 있는 악의 토양을 조성했기 때문입니다.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우리 존재의 기원은 어디입니까?또 우리는 무엇입니까?그 답은 오직 성경만이 말해줍니다.창 1:26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어...(중략)창 1:27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시고 남성과 여성으로 그들을 창조하시니라.창 1:31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보라, 매우 좋았더라.그 저녁과 아침이 여섯째 날이니라.하나님 께서는 단 두 구절에 네 번이나 강조하시며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되어있습니다.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5일에 걸친 창조 기간동안 온 우주를 창조하시며 좋았다고 하시지만(it was good)여섯째 날 비로소 자신의 형상(image)대로 지으신 사람을 창조하시고서야 매우 좋았더라(it was very good)라고 말씀하십니다.창세기 1장에 벌써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존재의 기원), 우리는 무엇이라는 것(존재의 인식)에 대한 답을 벌써 얻었습니다.따라서 우리는 온 우주보다 귀한 존재라는 것이 입증 되었습니다.왜?바로 우리는 그 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또 한번 확증해 주십니다.창세기 3장에 기록된 대로 우리는 우리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사망의 운명에 처한 우리를,우리를 지으신 그분 곧 창조주 하나님,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시기 위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모든 피와 물을 쏟고 죽기까지 하시며 사람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이제 고갱의 마지막 질문인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가 남았습니다.성경은 말합니다. 값없이 주신 그 분의 은혜를 믿고 받아들인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종착지가 영원히 다르다는 것을요...그러면 구원받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됩니까?그리스도인이 왜 죽을때까지 공부해야 되는지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고후 10:5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또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
힘든 시기 , 힘든 계절입니다. 늘 주 안에서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 이 글을 쓰며 이재만 선교사의 세미나와 책, 헨리 모리스 박사의 저서, 프란시스 쉐퍼의 저서를 인용하거나 참조 했습니다.
2023-06-30 18:43:27 | 박세원
부족한 글에 격려 감사드립니다. 늘 주 안에서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2023-06-30 18:25:11 | 박세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