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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학기에는 매주 아내와 함께 공자와 맹자 등을 가르치는 교양 수업을 2시간씩 저희 학교에서 들었습니다. 오랫만에 접하는 고전 공부는 김영 교수님의 매끈하고 성실한 강의로 인해 매우 신선했습니다. 물론 인생 공부도 많이 했고 사람을 보는 눈을 길렀으며 또 중국의 현인들의 사상도 많이 알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다음은 누구나 잘 아는 공자의 말입니다.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유붕자원래, 불역락호?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이것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배우고 그것을 계속해서 실천해나갈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뜻을 함께하는 좋은 친구들이 멀리서부터 찾아와 준다면 그 얼마나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옳은 길을 변함없이 갈 수 있다면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군자가 아니겠는가?   디모데 스쿨을 시작한 뒤 과연 사람들이 성경을 배우러 올까 하는 의구심도 생겼고 특히 어제는 밤에 비가 오고 추워서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을 가진 채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제가 맡은 바를 성실하게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녁 6시쯤에 전화가 왔습니다. 전주에 사는 K1 목사였습니다. 스쿨을 방문하려고 K2 목사님과 함께 전주에서 올라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비가 오고 사람이 많이 올 것 같지 않으니 주님께서 멀리 전주에서 응원군을 보내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가 넘쳤습니다. 또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12명이 와서 같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때에 공자의 말의 첫 부분이 생각났습니다. 배우고 그것을 계속해서 실천해나갈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날이 궂어도 성경을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모인 성도들이 있어서 정말로 기뻤습니다. 성경을 배우고 마음을 나누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스쿨이 끝나고 두 분과 함께 집에 가서 1시까지 이야기를 하면서 제 아내와 함께 너무나 즐거운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분이 한 목소리로 "아내를 기쁘게 하지 않는 목회를 하는 목사는 목회를 그만 두어야 한다"는 준엄한 메시지를 주어서 제 아내가 크게 기뻐했고 저도 죽을 때까지 귀에 담아 두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참고로 아내는 크게 은혜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와서 이 말을 꼭 상기시켜 줄 것을 그분들에게 부탁하더군요.) 오늘 아침에 이들을 보내면서 공자의 말의 두 번째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뜻을 함께하는 좋은 친구들이 멀리서부터 찾아와 준다면 그 얼마나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성경은 웃는 자들과 함께 웃어 주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 주라고 했습니다. 나도 이런 자세로 성도들과 교제하고 나누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이게 성도들의 모임이고 교회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두 분께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에는 어제 성경 공부로 은혜 받은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아내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내는 사람 걱정은 말고 내가 해야 할 일 즉 말씀을 먹고 온 몸으로 소화해서 성도들에게 전하는 일에만 신경을 쓰라고 충고를 했습니다. 이에 공자의 말의 세 번째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옳은 길을 변함없이 갈 수 있다면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군자가 아니겠는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도 이와 같이 고백했을진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사람이 사람의 의견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것을 느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현인들 이상의 꿈과 소망과 인품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또 오늘 저녁에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을 다 읽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책이 꿀같이 다네요. 저는 이 사람의 사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학문을 - 배움을 - 추구하기 위해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인생을 몰고가는 저력은 본받을 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학자 이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잠자리에 들기 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글을 씁니다. God bless you! 
2009-05-01 16:28:27 | 관리자
예수님은 우리보고 세상의 - 교회가 아니라 세상의 -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무슨 큰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작은 일부터 예의를 갖추어 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기자의 글을 보고 저도 전적으로 동감하기에 올립니다. 혹시 예수 믿는 당신도 이렇게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닙니까? 우리부터 고칩시다. 산뜻한 맛을 주는 그리스도인, 그것이 주님이 원하는 것 아닐까요?   다음은 한 기자가 적은 글입니다.   어제 밤 9시30분에 부산역을 출발한 KTX 특실에 올랐다. 출발하자 말자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 '실내에선 전화를 걸지 맙시다' 따위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동대구역에서 20세 전후의 여자 두 사람이 올라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한 여자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대전역까지 오는 동안 쉬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옆 자리에 앉은 친구한테 "좀 조용히 하라"고 말했더니 말소리는 다소 약해졌지만 전화는 끊지 않았다. 바깥에 나가서 건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했다. 20세 전후의 나이에 특실을 탈 정도이면 수입이 많은 직장에 다니든지 부모가 부자일 것이다.  다행히 대전역에서 두 여자는 내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뚱뚱한 아줌마 두 사람이 탔다. 두 사람은 목소리가 문제였다.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실내가 쩡쩡 울렸다. 그 큰 목소리로 휴대전화를 걸고 서로 이야기를 하는데, 이건 완전히 교정 불능의 수준이었다. 성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목소리를 작게 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크다고 한번도 경고를 받아 본 적이 없는 듯했다. 기고만장 그 자체였다. 야간열차여서 승객들은 거의가 잠을 자고 있었다. 두 아줌마의 목소리는 끝에서 끝까지 들렸다. 충고도 희망이 있을 때 하는 것이지, 저 수준이면 포기하는 것이 낫다. 다행히 두 아줌마는 천안역에서 내렸다. 20분 달리는 데 특실을 탈 정도라면 생활 수준이 상층에 속할 것이다.  오늘 내가 만난 문제적 인물 네 사람은 남한테 폐를 끼치고도 폐를 끼친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한국 교육의 실패를 보는 듯했다. 그런 아줌마 아래서 그런 20대 딸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교양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수준의 예절이고 언동이다. 민주주의를 잘못 해석하면 깽판 치는 자유를 뜻하는 것으로 여긴다. 한국 보수층의 자정 항목 중에서 예절도 들어가야 할 것이다. 예의 없는 보수층은 보수의 자격이 없다. 보수는 역사와 전통, 미풍양속과 예절감각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다.  서울역에서 내려 집까지 모범택시를 탔다. 요금이 5100원이었다. 1만원짜리를 내면서 "4000원만 주세요"라고 했다. 택시 기사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없이 1000원짜리 네 장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옆으로 건네주었다(조갑제 기자).
2009-05-01 16:27:42 | 관리자
부끄럽지만 저는 독립침례교회의 목사입니다. 또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성경도 여러 차례 읽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공자의 글을 인용하고 불교의 인생관을 지지하는 듯한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책 - 학문의 즐거움 - 을 읽고 또 믿지도 않는 김우중이라는 사람의 글을 좋다고 하고 더더욱 장로교 선조들이 기록한 책들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고 추천하자 의아해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근본주의 침례교 목사라는 사람이 이렇게 타락할 수 있는가 하고 말하면서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 사이트에 접근하는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저의 생각과 글에 공감하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이 사람이 어느 정도 타락했는지 살펴보고 자기 담임 목사나 근본주의자들에게 비난거리로 알리려는 부류입니다. 즉 후자는 당신 일이 잘되는지 두고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지요.   오늘은 후자의 부류에게 권고의 글을 드립니다. 우물안의 개구리가 되지 마십시오.    자기들이 정해 놓은 틀 안에 사람들을 가두고 그것의 밖은 보지 못하게 만드는 시스템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이단들이 이런 시스템을 운영합니다. 멤버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자기들과 다르면 비난하기에 바쁩니다. 저 역시 한 때 이런 시스템을 운영한 적이 있었기에 이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획일화 된 그런 틀에 묶여서 넓은 세상과 성경을 보지 못합니까? 예수님은 독립침례교인들만의 예수님입니까? 놀랍게도 이렇게 믿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장로교인들과 감리교인들의 예수님도 됩니다. 바른 교회관을 갖지 못한 채 우리만 바른 교회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는데 도대체 어디서 그처럼 두둑한 배짱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진리를 허락하셨습니다. 지난 학기에 들은 중국 고전을 살펴보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얻는 보편적 지혜는 거기에도 넘쳐납니다. 그리스, 로마 문학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주 공간의 해와 달과 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반 계시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 믿으니까 이런 것은 전혀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 그러면 왜 학교에 갑니까? 대학 교육은 왜 받습니까? 이런 극단적인 생각에 매이게 되면 자기만 옳고 남은 다 틀린 것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무식하다, 교만하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치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자기 착각은 아닐까요? 훌륭한 목사치고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지 않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 만으로 족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믿지 마십시오. 게으른 것을 커버하기 위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책을 많이 보아야 합니다. 내 안에 참된 진리가 있는데 공자, 맹자, 김우중,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어떻게 그런 진리를 빼앗을 수 있습니까? 하지만 그들의 삶을 통해 얻은 보편적 진리는 예수님을 믿는 내게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유익하게 작용합니다. 왜 그런 저자들을 무서워합니까? 내 안에 유일한 진리가 있는데 무엇이 그리 무섭습니까?   최근에 어떤 신실한 형제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형제는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일은 반드시 지역 교회가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즉 신학교, 성경 학교, 크리스천 스쿨, 성경 번역/배포, 창조과학사역 등 이 모든 것은 반드시 지역 교회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형제의 순수한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과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러면 지금 장로교에서 운영되는 신학교는 몽땅 다 틀린 것일까요? 그 가운데서 배출된 목사들은 다 틀린 것입니까? 그것들은 다 교단 신학교가 아닙니까? 저는 결코 그들이 모두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영어 킹제임스성경을 어떤 지역 교회가 번역했습니까? 아니면 국가의 왕이 명령하여 번역하게 했습니까? 종교개혁을 지역교회가 했습니까? 웨슬리, 무디의 부흥 사역이 지역 교회에서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지역 교회도 쓰고 개인도 쓰고 교단도 쓰고 심지어 고레스같이 믿지 않는 이교도 왕도 쓰십니다.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을 제한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칼빈주의자도 쓰시고 세대주의자도 쓰십니다. 그러므로 획일화 된 틀로 사람을 가두는 것은 대개 이단들이 하는 일이므로 성숙한 크리스천들은 여기서 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바른 크리스천으로 살려면 넓게 사고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다 수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고를 넓게 해야 바른 사람, 큰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고 크게 소망을 품기 바랍니다. 이 세상 지혜자들의 글을 읽고 인생을 배우기 바랍니다. 저는 요즘 사마천의 사기를 읽습니다. 이것은 생생한 인간 역사이기에 이것을 통해 동양의 인간들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특히 목사는 폭넓은 독서를 통해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목사가 속이 좁으면 성도가 그렇게 되고 목사가 획일화 된 사고의 틀 속에 살면 성도도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은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넓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코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성경을 그대로 믿는 비블리시스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세상의 학문과 지혜와 문학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을 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을 통해 사람과 인생을 배우면서 더 넓은 교제을 하게 되고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좋은 문학 작품과 - 한국의 대표적 수필집들 - 기독교 고전을 읽기 바랍니다.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이 풍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제는 획일화 된 로보트 구조에서 벗어나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과 저의 삶이 풍성해지기를 원합니다. 같이 노력합시다.
2009-05-01 16:26:12 | 관리자
사람들은 이것을 운(luck)이라고 불렀다.    낮에 열심히 일하고 밤에도 부지런히 일했다.노는 것과 많은 즐거움을 포기했다.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재미없는 책을 읽었다.승리를 얻기 위해 조금씩 선두로 나섰다.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꾸준히 노력했다.그러나 그가 승리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존 맥스웰의 성공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임).   “가치가 있는 성공에는 모두 가격표가 붙어 있다. 문제는 항상 그에 대한 대가, 즉 힘든 노동, 희생, 믿음, 그리고 인내 등을 기꺼이 지불하는가 하는 것이다.”라는 맥스웰의 지적처럼 성공을 위한 대가를 미리 지불하겠다는 각오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각오하고 말을 잘해서 능력 있게 복음을 전달해야겠다고 작정하면 주님께서 도와줄 것입니다.
2009-05-01 16:25:09 | 관리자
요즘 저는 우리말과 글을 바르게 읽고 바르게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이 복음 선포에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도, 바울도 모두 말을 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 감화 감동을 받으려면 말에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므로 당연히 한국 말을 잘해야 합니다. 요즘 영어를 배우러 미국 사람이 있는 교회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영어 중요하지요. 그런데 영어에 앞서 우리말을 잘 알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말로 시원스럽게 전달되는 설교에는 관심이 없고 아이들 영어를 위해 교회를 선택하는 사람들을 보면 심성이 어찌 그리 얄팍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혹시 교회를 마케팅 수단으로 혹은 자기 성장 장소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교회는 영적 성장을 위한 장소입니다.   설교자는 특히 말에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2000년 교회 역사를 통해 가장 훌흉한 설교자로 꼽히는 스펄전은 자기 말에 능통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고 말을 잘하는 것이 목사의 가장 큰 덕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설교 시간에 성도들이 졸면 그 책임은 성도들에게 있지 않고 목사에게 있습니다. 얼마나 냉담하게 설교를 하면 그 중요한 시간에 딴 생각하고 졸겠습니까? 우리 모두 말 연습에 힘을 씁시다.   다음은 저와 절친한 한 목사님이 보내 준 글입니다(일단 익명으로 올림). 이분도 한때 교리 교리 외치고 다녔지만 이제 목회의 본질을 깨달으면서 좋은 설교자가 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와 글이 변해야 교회가 삽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노력하는 형제들에게 하늘의 능력을 부어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언어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언어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는 자의 언어가 아니라, 듣는 자의 언어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보라, 말하는 이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우리 각 사람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우리 언어로 듣게 됨이 어찌된 일이냐?” [사도행전 2:7-8] “…그들이 우리 언어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 [사도행전 2:11].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날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꾼들이 반드시 실행해야 할 좋은 본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1장을 읽으면,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 군대 대장의 개입으로 목숨을 건진 후에, 바울 사도가 성난 군중 앞에서 히브리말로 설교하자, 그들은 한 동안 바울의 설교에 경청했습니다. “그가 히브리말로 자기들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들이 더욱 잠잠 하거늘…” [행 22:2]. 이것이 바로 듣는 자의 언어로 진리를 전파할 때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한국에 온지 8개월째를 접어드는 앳된 몰몬교 선교사와 짧은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혼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위한 그의 ‘열정’과 ‘헌신’ 앞에 내 자신이 오히려 분노와 함께 비장함을 느꼈습니다. 그의 열정은 서투른 한국말로 이야기하기를 힘들어하지 않는 모습에 흠뻑 묻어났습니다. 지옥의 자식들도 자신의 확신을 전파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사실에 도전을 받았습니다. 지옥의 자식들만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순수한 교회의 역사를 추적하다 보면, 주께서 맡기신 말씀을 주께서 보여주신 방법대로 전파하고자 전 생애를 걸었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생애를 읽어보면 주님을 위한 삶이야말로 최고의 인생임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일꾼들이 갖추어야 할 열정과 헌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 :그는 버마에서 사역한 선교사로서 영어-버마어 사전 편찬에 힘썼고, 버마어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버마에서 죽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그는 중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중국말을 하며, 중국옷을 입고서 중국식으로 살았습니다. 심지어 머리를 밀고 ‘변발’까지 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죽었습니다. 호레이스 언더우드 :그는 북장로교 선교사로 1885년 조선에 왔습니다. 그는 영한사전, 한영사전과 영어 문법책을 출판했으며,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했습니다. 우리를 이 땅에 왔던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을 향해서 병원 짓고, 학교만 세웠다고 비방하지만 그들을 능가하는 열정과 헌신은 보지 못했습니다. 윌리암 케리 :그는 인도에서 사역한 인도선교의 아버지로서 수많은 인도 방언과 중국어, 버마어, 말레이어 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지역 언어 문법책과 사전 편찬 작업에 수고 했습니다. 윌리암 카메룬 타운젠 :“가장 훌륭한 선교사는 선교지 현지인의 언어로 쓰인 성경이다. 성경은 선교사들처럼 안식년도 필요 없고 외국인이라고 배척 받는 일도 없다.” 이와 같은 명언을 남긴 그는 위클리프 성경 번역 선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중미 과테말라 지역의 한 인디언의 한 마디가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신네 신이 그렇게 똑똑하다면서 우리말도 모릅니까?” 많은 신자들이 존경하는 충성스러운 선교사들은 한결같이 선교 현장의 말과 글에 관심을 가졌고, 선교 현장의 말과 글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외국인이 현지 언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과 함께 현지 언어 사전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말과 글에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혼이 담겨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주님의 일꾼들은 선교 현장에 있는 영혼들을 향한 자신들의 사랑을 그들이 사용하는 말과 글에 대한 관심으로 표현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한 언어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자기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헌신한 사람들을 잘 새겨두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며” [고린도전서 9:20]
2009-05-01 16:24:04 | 관리자
오늘 아침에는 저와 제 아내가 어려서부터 대학교까지 다니던 감리교회에 다녀왔습니다. 그 교회를 개척하고 수고하신 박점덕 목사님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즘은 장례식에 가는 일이 늘어나고 갈 때마다 인생을 많이 배웁니다. 그 목사님은 93세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제 아버님 표현에 따르면 '목사 중의 진실한 목사'였습니다. 요즘 목사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정말 이 목사님의 삶은 희생과 사랑 그리고 기쁨이었습니다.   아침에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라고 하는 타이틀은 가진 제 모습이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목사는 양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람인데 과연 내가 그러한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온 가족과 성도들 - 이분들은 정말로 30-40년 동안 제가 잊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 이 하늘가는 밝은 길이 찬양을 부르는데 정말 천국 같았습니다. 살면서 이런 예배를 통해 영혼을 정화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습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 하여도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내가 걱정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 중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내가 천성 바라보고 가까이 왔으니아버지의 영광 집에 가 쉴 맘 있도다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영광 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라. 어려운 일 당할 때 이 찬송의 가사를 음미해 보기 바랍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신 박점덕 목사님! 눈물 흘리며 기도해 주신 것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 역시 최선을 다해 그 길을 가렵니다. 사랑합니다.    다음은 이 찬송에 대한 유래입니다. 참조하기 바랍니다.   이 찬송은 외국 사람이 한국 성도들을 위하여 한국에서 작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곡을 작사한 분은 한국에 와서 사역하시던 윌리엄 스왈른이라는 미국 선교사입니다. 한국 이름은 소안련 선교사입니다. 48년간 한국에서 사역하신 분이십니다. 많이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아주 신실한 한국인의 친구였습니다. 한국을 사랑했으며 이 땅을 사랑했던 선교사입니다. 그 분은 일제치하에서 버림받고 고통받고 괴로워했던 한국 성도들의 모습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국 성도들의 모습에 너무도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붓을 들어 작사한 찬송이 바로 이 찬송입니다. 작사는 했는데 작곡할 실력이 없으니 스코틀랜드 민요에다가 붙인 찬송입니다. 결국 이 선교사는 일본사람들에게 추방을 당해 한국 땅을 떠나 갑니다. 그러나 이 분이 남긴 이 아름다운 찬양은 우리 성도들이 고통의 세월을 살 때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2009-05-01 16:20:11 | 관리자
부부가 무엇인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결혼한 지 만 24년이 지난 지금, 아이들을 생각하며 다음의 글을 또 읽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미물에 지나지 않는 황새만도 못한 사랑을 하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런데 실제로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 가정들이 거의 전쟁 상태로 지내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믿음이 효력을 나타내었으면 좋겠습니다. 결혼할 나이의 아이들과 함께 읽어 보기 바랍니다.   거룩한 본능 - 김규련   동해안 백암 온천에서 눈이 쌓인 구슬령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서면, 산수가 빼어난 고원 지대가 펼쳐진다. 여기가 겨우내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 첫 고을인 수비면으로, 대구에서 오자면 차편으로 근 다섯 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이다. 이 고을 어귀에는 높고 가파른 재가 있다. 이 재를 한팃재라 한다. 이 한팃재를 분수령으로 하여 마을 쪽에 내리는 눈은 왕피천으로 녹아 흘러 성류굴 앞을 지나 동해에 이르고, 재 밖으로 빗나간 눈은 낙동강으로 녹아 내려 남해로 흐른다. 어쩌다 나그네가 이곳을 찾게 되면, 그 우람한 태백산맥의 산세며 깊은 계곡, 한없이 펼쳐진 눈 덮인 울창한 숲, 맵고 맑은 공기, 얼음 바위 틈으로 흐르는 깨끗한 물,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연에 우선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발길을 돌려 그냥 되돌아간다면, 그는 무긍한 산정을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없으리라. 왕피천으로 흐르는 석간수를 따라 휘몰아치는 눈바람을 가르며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를 한 나절쯤 걸어가면, 화전민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여기저기 산비탈에 농가가 몇 채씩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난한 자연 촌락이다. 이 근방에는 천혜의 절경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 고장 사람들 자신이, 그 절경을 이루는 웅장한 산이며 기암 절벽이며 눈 덮인 수림이며 산새며 바람 소리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이들의 주된 생업은 채소 농사와 담배 농사지만, 철 다라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송이버섯을 따들이기도 한다. 어쩌면, 바보가 아니면 달관한 사람만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첩첩 산중의 마을이다. 어느 해 봄, 이 마을에 뜻밖의 황새 한 쌍이 날아 들어왔다. 꿩이나 산비둘기가 아니면 부엉이나 매 같은 산새들만 보아 온 이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그 황새가 신기했다. 희고 큰 날개를 여유 있게 훨훨 흔들며 노송 위를 짝을 지어 유유히 날아다니는 품이 정말 대견스러웠다. 붉은 주둥이와 긴 목, 새하얀 털로 날개 밑으로 쭉 뻗어 내린 검붉은 두 다리, 황새의 자태는 과연 군자의 모습이었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빗물처럼 쏟아지는 늦은 봄의 오후, 마을 사람들은 잠시 일손을 멈추고 황새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이들은 이 황새가 길조라고 믿고, 무엇인가 막연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금년엔 찻길이 뚫리겠지, 올해는 꼭 전기가 들어오겠지 하고......, 그런데, 변이 생겼다. 낙엽이 질 무렵의 어느날 아침, 이 마을을 지나가던 밀렵군이 그 황새를 보고 총을 쏜 것이다. 총 소리에 놀란 마을 사람들은 아침을 먹다 말고 황새 둥지가 있는 노송 숲으로 뛰어 모였다. 밀렵군은 도망을 가고, 황새 한 마리가 선지피를 흘리며 마른 억새풀 위에 쓰러져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황새는 한쪽 날개가 못 쓰게 될 만큼 다쳤으나, 죽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 황새를 안고 돌아와 온갖 정성을 다해 치료를 했다. 그리고, 날개의 상처가 아물고 힘을 되찾을 때까지 그 황새를 물레방앗간 옆 뜰에 있는 소나무 밑에 두고 보호하기로 했다. 이들은 곧 바로 둥우리도 만들고 모이 그릇도 마련했다. 그러나, 황새는 쓰러져 움직이질 못했다. 그 날 밤, 동장 집 사랑방에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밤이 이슥하도록 황새를 살려 볼 궁리를 했다. 그리고, 밀렵군을 저주하다가 드디어 인간의 잔인한 일면을 저마다 나름대로 매도 하기도 했다. 그 며칠 뒤였다. 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지창에 갈잎이 날려와 부딪쳤다. 그런데, 조금은 귀에 익은 황새의 울음소리. 탁탁탁 타르르 탁탁. 사랑방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은 가슴을 도리는 듯한 이 처절한 울음소리를 듣고 모두 말없이 마당으로 나왔다. 가을 밤, 밤 하늘에 찬란한 별들, 그 별빛에 흰 깃을 번쩍이며 황새 한 마리가 물레방앗간 주위를 이리저리 애타게 날고 있지 않은가. 총소리에 놀라 도망갔던 황새가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황새는 인제 인간이 두려워서, 쓰러져 누워 있는 자기의 짝한테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가슴이 뭉클해진 마을 사람들은 자리를 피해주려고 저마다 묵묵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황새는 연신 부리가 멍들어 부서지도록 울어 댔다. 탁탁탁 타르르 탁탁......, 그 날 밤엔 늦도록 화전민 후예들의 지붕 밑에 호롱불이 꺼지질 않았다. 날이 밝자, 이들은 그 부상당한 황새를 그들의 둥지가 있던 노송 아래에 가져다 놓았다. 가련한 황새가 사람이 없는 곳에서 서로 어울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며칠 뒤, 무서리가 몹시 내린 어느날 아침, 기이하고 처참한 변이 또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도 알뜰히 보살펴 온 그 한 쌍의 황새가 서로 목을 감고 싸늘하게 죽어 있지 않은가. 마을 사람들은 이 슬픈 광경을 보자 숙연해졌다. 그리고, 저마다 무엇을 느꼈음인지 착잡한 심정으로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황새도 영물일까? 날씨는 무섭게 추워지는 데, 짝을 버리고 혼자 떠날 수 없었던 애절한 황새의 정, 조류에 따라서는 암수의 애정이 별스러운 놈도 있지만, 그것이 모두 그들의 생태요 본능이라 했다. 그러나, 하찮은 그 본능이 오늘 따라 인간의 종교보다 더 거룩하고 예술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2009-05-01 16:18:54 | 관리자
성경에 따라 바른 것을 믿고 있습니까? 믿음대로 행하고 있습니까?    오늘은 미국 유타 주의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다. 토저의 글을 읽으면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잘 믿고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는 무엇이 잘 믿는 것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다. 이곳은 몰몬교도들의 본부가 있는 곳이다. 그들의 역사 박물관과 템플을 방문하곤 너무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런 시스템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좀처럼 믿기질 않는다. 그런데 수십만의 추종자가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다시 한 번 믿음의 힘이 놀라움을 느낀다. 성경대로 믿어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도시 자체가 영적으로 죽어 있음을 느끼고 있다. 많은 아이들이 입술에도 구멍을 뚫어 링을 매달고 다닌다. 인도에서 나온 힌두교 관습이 기독교 국가라는 곳에서 흥왕하고 있음을 보면서 이제 미국의 끝이 점점 더 가깝게 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런 현상은 예전에 덴버를 갔을 때도 느낀 적이 있다. 그곳도 뉴에이지가 판을 치는 도시가 아니던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의 차이를 확연히 느껴 볼 수 있는 여행이다. 
2009-05-01 16:16:59 | 관리자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는 대단히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또 다시 미국 출장을 갔습니다. 6월과 7월에 출장을 가면서 두 번이나 교회를 비우게 되어 대단히 죄송했습니다. 이제 돌아왔으니 나와 내 가정과 성도들에게 좋은 영의 양식을 주도록 노력해야지요.  이번 여행을 하면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설교와 설교자를 가지고 갔습니다. 500여 페이지의 책을 들고 행복에 젖어서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기계공학 박사가 되면서 또 교수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전공 책을 봤지만 책을 요약해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설교와 설교자는 요약/정리해서 마음 속에 넣어야 할 책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나는 대로 요약해서 머리 속에 넣어야겠습니다. 설교가 교회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는 그분의 말씀에 100% 동감하면서 좋은 설교자가 되고 싶다는 야심찬 꿈도 가져 보았고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성경과 설교에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바른 성경과 바른 설교를 통해서 오는 부흥이야말로 하나님의 부흥입니다. 확신이 없이 달콤한 예화나 이야기만으로 사람의 혼을 홀리는 설교는 죽은(사탕발림) 설교이지요. 열정이 없는 설교 역시 죽은 것이지요. 듣는 사람이 다 압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설교했을까요? 바울의 심정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해야겠다는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운동이 필요합니다. 이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며 하나님의 설교의 권능을 추구하는 목회자들이 이 땅에 넘쳐나면 좋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아이들의 앞날을 위해 좋은 설교자들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함당한 자들을 주시도록 같이 기도합시다. 확신에 찬 설교, 권능에 찬 설교가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입니다.    
2009-05-01 16:15:21 | 관리자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우연히 잡지 코너에 있던 머니투데이라는 신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평생에 주식 투자 같은 것을 해 본 적이 없으므로 특별히 경제 신문을 보지 않는데 마침 비행기를 타서 이 신문이 있기에 읽게 되었습니다. 7월 21일자 신문의 첫 면에는 '다시 한 번 꿈을 보여주세요'라는 제목으로 이 대통령께 드리는 글이 있었습니다. 별 생각 없이 쭉 읽어 봤는데 내용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맨끝에 가서 제 눈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마감하는 글이 로마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내용도 좋았지만 끝이 너무 좋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글은 이명박 대통령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 모두가 특히 목사들이 관심을 두고 음미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련이 좀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오길 소망하며 이 글을 올립니다. 사회 생활을 하는 크리스천 기자가 이렇게 로마서를 인용한 용기에 감사를 드렸고 우리의 아이들이 앞으로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글을 올립니다.   다시 한 번 꿈을 보여주세요.    저는 요즘 이명박 대통령이 530여만표라는 사상 최대 표차로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경제'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꿈'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몇 년간 우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 오히려 빈곤을 느껴왔습니다. 청년 백수들이 백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조기 퇴직으로 거리로 몰리는 장년층이 늘었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는 없고 밥 먹고 사는 일은 팍팍해졌습니다.   10대, 20대는 열심히 공부해도 좋은 직장에 들어가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잃어갔습니다. 중장년층은 열심히 일해도 실업자가 돼 긴긴 노후를 비참하게 보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쌓여 갔습니다.   지난해 대선 때 우리는 대통령에게서 꿈을 봤습니다. 이 대통령은 살아있는 신화입니다. 하루 한끼 먹기도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대기업 사장을 지내고 서울시장을 거쳐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대통령은 지금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워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산증인입니다.   가난해도 좋은 대학 갈 수 있다는 꿈, 노력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다는 꿈, 아이디어를 현실화시켜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는 꿈,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꿈, 노력하면 안락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는 꿈을 대통령에게서 봤습니다. 정당한 노력으로 성공하고 돈 번 사람들이 대우받는 분위기가 정착되리라는 꿈을 봤습니다. 때문에 대운하라는 논란 많은 공약을 내세웠어도, BBK 사건으로 도덕성에 흠집이 갔어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함께 일할 사람으로 타고난 부자, 부의 형성 과정이 의심스러운 부자, 대통령과 연고가 있는 대학이나 지역의 사람들만을 택했습니다. 우리는 "역시 출세하려면 돈이 있든지, 연고가 있어야 해"라는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지금은 못나고 어려워도 역전할 수 있는 기반, 정직한 성공이 대우받는 여건,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는 공정한 자본주의를 실현시켜주리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영어와 '비즈니스 프렌들리'만 강조할 뿐 가난한 학생들, 공부에 흥미가 없는 학생들, 취업이 불안한 젊은이들에게 어떠한 기회와 미래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대통령은 "경제가 어렵다, 위기다" 말씀하시지만 어려운 건 벌어 먹고 사는 우리들이 더 잘 압니다.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은 지금은 어렵지만 앞으로 이런 정책을 통해 최소한 정직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은 보상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비전입니다.   생활필수품의 가격을 관리하거나 대기업이 인력을 10% 더 채용하게 만들겠다는 약속은, 이런 단기적이고 선언적인 정책들은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이 어려움이 지나간 뒤 과연 어디에 가 있을지 불안할 뿐입니다.   부디 지난 실패에서 깨달음을 얻어 대통령을 선택한 국민들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시길 바랍니다. 1년에 20만원 남짓 되는 세금을 환급 받으려 대통령을 찍었는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그 초심으로 돌아가 젊은이든 늙은이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십시오. 모험정신을 갖고 창업이든, 공부든 도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십시오. 한 번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환경을 닦아 주십시오.   그래서 누구든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꿈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개천에서 용 났다'는 성공모델이 많이 탄생하는 토대를 구축해 주십시오.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이 오히려 눈치보고 주눅들지 않게 부와 성공이 정당하게 평가받는 사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저는 대통령이 성공하기를 누구보다 열렬히 희망합니다. 대한민국은 저와 저의 가족이 살고 있는 조국이기에 그렇습니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 급락한 지지율,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독도 문제 등 잇따라 터지는 악재에 자신감을 잃어가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앞으로 4년 반, 역전할 수 있다는 꿈과 자신감으로 '해피 엔딩'을 만드시길 기원합니다.   '인내는 연단(단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성경 로마서 5장4절) 그리하여 대통령과 우리 국민 모두가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성경 욥기 8장7절)해질 것을 희망하고 또 믿습니다.  
2009-05-01 16:14:34 | 관리자
이 글 역시 우연히 읽게 된 '머니투데이'(7월 21일)의 기사로 인해 쓰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외수라는 작가를 알지 못합니다. 그의 글을 하나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 기사를 읽으면서 믿지 않는 사람도 각고의 노력을 해서 뛰어난 작품(세상 사람들에게)을 남기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영부영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내는크리스천들이 한둘이 아님을 보면서 좀 이런 글에 도전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글을 적습니다. 거의 무가치한 일에 이처럼 인생을 거는 사람들이 허다한데 어찌하여 우리 크리스천들은 가치가 있다고 믿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을까요? 무언가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저 역시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열심히 주님을 위해 내 삶을 불태우겠노라고.   "저처럼 '한 놈만 패겠다'는 생각으로 올인하십시오. 그것이 장점이 돼 열등감을 가려버릴 겁니다." 전국적으로 장대비가 내렸던 19일. 안개가 자욱이 낀 강원도 화천 감성마을 내 모월당에서 만난 소설가 이외수(62ㆍ사진)는 거침이 없었다. 예스24와 해냄 출판사가 주최한 '이외수 지금 만나러갑니다' 행사에 참석한 30여 명의 독자들은 글쓰기와 세상살이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눴다.   그는 20대에 노숙생활을 했을 만큼 힘들었던 시기를 겪은 후 '꿈꾸는 식물(1978)' '들개(1981)' '칼(1982)' 등 작품을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황금비늘' '장외인간' 등 최근작은 출간만 되면 40만~50만부가 팔린다. 그에게 성공이란 어떤 가치일까. 그는 "가치관 철학, 인생관의 흔들림이 성공을 방해한다"고 말했다.   "감자농사를 짓는 사람은 농사만 제대로 지으면 감자가 돈을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돈에 관심을 가지고 농사를 하면 돈이 안됩니다.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이 돈 안되면 어떡하지?'하고 고민만 하는데, 사실 돈이 안 되는 분야는 없습니다. 어느 분야에서건 제대로 해서 상위 10%안에 들어가면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한 때는 방문을 뜯어내고 감옥 철문을 달 정도로 작가에 대한 굳건한 신념으로 글 쓰는 일을 고집했던 그는 집중과 끈기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30대 때부터는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일어나서 10년을 바쳐야합니다. 아무리 감각이 둔하고 머리가 둔하더라도 3년을 집중하면 기초가 다져집니다. 그 다음에 7년을 깎아 바치면 그 분야에서 존경을 받게 됩니다. 병뚜껑을 줍더라도 몇 십 년 동안 그것만 하면 사람들이 다 알아주는데 하물며 다른 일은 어떻겠습니까?"   이런 마음가짐은 그가 집필하는 모습에도 잘 드러나 있다. "글을 쓸 때는 누구보다 치열합니다. 가뜩이나 괴팍한 성격인데 글이 잘 안되면 어떻게 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될 때까지 한다고 합니다. 중간에 관두면 리듬이 끊어지기 때문에 물고 늘어져서 될 때까지 계속 합니다."   선택과 집중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하는 그는 진정한 성공이란 주변에서 함께 기뻐하고 행복해할 때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요새는 그 사람의 성공으로 인해 주변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는 처음에 하늘이 도와주다가 안 도와주는 경우가 많아요. 벼슬이 아무리 높아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성공하기 전에는 다 소망을 밑천으로 성공합니다. 가급적이면 소망을 키워나가세요. 그게 성공의 지름길이 됩니다. 훨씬 아름답고 더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게 돼있습니다."  
2009-05-01 16:12:56 | 관리자
엊그제 박효종(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의 글을 읽었다. 거기서 '인지부조화'라는 단어가 하루 종일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분은 그것을 "알고 생각하는 것들 사이에 괴리가 생길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정의했다. 글 속의 사례들을 읽으면서 비로소 인지부조화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사회 속에서만 이런 인지부조화가 있는 것일까? 성경을 안다고 하는데 실제의 삶이 그렇게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이 인지부조화가 아닌가? 우리 예수님은 그것을 가리켜 위선이라고 하셨다. 즉 그것은 겉과 속이 따로 노는 것을 말한다. 바른 성경을 알지 못하는 교회들에서는 아예 인지부조화가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옳고 그른 것을 알지 못하므로 그런 현상 자체가 생기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들어 근본주의 킹제임스 성경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인지부조화가 만연해 있음을 보고 놀란다. 나를 포함한 우리는 대개 성경 지식이 충만한데 행동은 전혀 다르다. 예배에 참여하려는 열성, 바르게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열정, 섬김과 봉사를 위해 희생하려는 마음, 세상에서도 떳떳하게 빛과 소금이 되고자 애를 쓰는 모습이 결여된 것을 보게 된다. 일반 교회보다 훨씬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교회가 부흥하지 않아도 원래 좁은 길로 가는 무리는 수가 작은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 없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목사나 성도 모두 인지부조화에 빠지지 않았는지 깊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면 유익할 것이다.   다음의 글은 인지부조화를 설명하는 사례를 담았기에 참조하도록 올린다. 나는 결코 박 교수의 글이 100% 맞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 사람들도 바르게 보려고 노력하는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더더욱 성경에 비추어 바르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글을 올린다.   인지부조화의 자기 모순    대선과 총선에서 참패하고 폐족(廢族)으로까지 몰렸던 좌파가 '촛불'을 계기로 기사회생하고 있다. 광장에서의 동원능력과 '다음' 아고라에서의 인터넷 동원능력도 막강해졌고 공권력도 우습게 여길 정도가 되었다. 여기에는 그들 편에 서서 힘을 북돋았던 좌파 언론들의 덕이 컸다. 하지만 세상 일은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5년 내내 켜고 싶은 촛불이었겠지만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작용했는지 그 촛불이 예전 같지 않다. 하기야 전략과 전술이 무궁무진한 좌파가 이 정도의 시련에서 의기소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좌파의 문제는 지독한 '인지 부조화' 현상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알고 생각하는 것들 사이에 괴리가 생길 때 나타나는 것이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부자가 된 사람에 대해서는 강한 혐오를 드러낸다. 자신의 자녀는 미국으로 유학 보내면서도 미국산 쇠고기, 미국과의 FTA 등 미국과 관련된 모든 것이 증오의 대상이다. 자신의 자녀가 전교조 교사 밑에서 지도받는 것을 꺼리면서도 전교조에 대한 지지는 강렬하다. 북한에 가서 살기는 싫어하면서도 친북주의자나 종북주의자로 처신하고 있다. 투쟁과 경쟁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인데, 노사문제건 교육문제건 '투쟁'은 결사적으로 하면서도 '경쟁'만은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친다.   일련의 인지부조화 현상 가운데에서도 가장 현저한 것은 대한민국의 좌파로 살면서 그것을 가능케 한 대한민국의 성취는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와 인권, 시장과 민주주의가 꽃피는 나라이기에 좌파로서 권력도 10년 동안 잡는 등 왕족처럼 살아온 것이 아닌가. 북한에선 김일성주의자나 김정일주의자가 아니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런데도 건국 60주년을 기념하는 일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못해 냉소적이다. 건국을 기념하면 상해 임시정부는 어떻게 되며, 또 광복절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정말 그것이 고민이라면 걱정도 팔자다. 건국을 기념한다고 해서 상해 임시정부의 의미가 훼손되는 것도, 광복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진가가 더욱 더 빛날 뿐인데 웬 걱정인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된 것이 건국일진대 좌파든 우파든 경축하면 경축했지 질색할 이유는 없을 터이다.   흔히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이 헬멧을 쓰지 않아 큰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헬멧을 쓰지 않는 것은 단순한 안전 불감증 때문이 아니라 오토바이가 위험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이다. 위험한 것과 즐기고 싶은 것 사이에 인지부조화가 발생했을 때 오토바이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헬멧을 쓰지 않음으로써 자신에게 확신시키려는 것이다. 이처럼 좌파도 진실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이를 인정하면 행여 자신들의 존재감이 없어질까 봐 반미, 반건국 등 각종 '안티'를 고집하고 나서는 것이 아닐까.   한국의 좌파는 변해야 한다. '진보연대'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진보하지 않은 좌파들끼리 연대하여 법치를 무시하고 대중 동원으로 힘을 과시하면서 참여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기 전에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출범한 지 수개월도 안 된 정권 초기에 나라가 아수라장이 된 데는 이명박 정부의 잘못이 크다.   하지만 대선에서 참패하고도 권력 금단현상을 극복하지 못해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불복종으로 일관하면서 제대로 된 '실패학'을 쓰지 못한 좌파의 잘못도 결코 적지 않다. 돈을 세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세상에서 과거를 세탁하고 정체성을 세탁한들 무슨 큰일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래서는 미래가 없다. 자신들의 주장과 행동에서 인지부조화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문제를 정상적으로 풀어가고자 하는 진솔한 의지를 가질 때 비로소 건강성이 담보되는 좌파의 길이 열릴 것이다.
2009-05-01 16:11:48 | 관리자
나는 믿는 바에서 경쟁력이 있는가? 우리의 교회는 어떤가? 지금 나는 결코 세상의 경쟁력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바른 열심으로 매진하고 있는지 묻고 있다. 다음은 사도 바울의 열정을 보여 준다.   경주할 때에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한 사람이 상을 받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관을 얻고자 그 일을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관을 얻고자 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달리되 정해진 것이 없는 것처럼 하지 아니하고 또 이와 같이 싸우되 허공을 치는 자같이 하지 아니하며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9:24-27).   교회에는 바른 열심과 진정성이 넘쳐야 한다. 믿음의 성도들은 모두 위와 같은 바음 자세로 살았다. 목사든 성도든 바르게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믿음과 교회 생활에 정진하지 않으면 나중에 주님 앞에서 꾸증을 들을 것이다. 다음의 글은 일반 신문의 사설이다. 일반 사람들도 바르게 생각하고 살진대 믿는 사람들이 더 바르게 열심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시사하는 바가 큰 글이라 소개한다.   금메달과 평준화   이번 베이징올림픽을 통해 새삼 확인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금메달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금메달을 좋아하지 않는 나라나 국민이 없겠지만 유독 우리는 금메달에 올인하며 금메달만이 메달인 양 대접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 스포츠 관계자는 텔레비전에 나와 '은메달을 딴 선수가 마치 죄인인 양 고개 숙이며 눈물을 글썽이는 나라는 아마도 우리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올림픽의 정신은 참여에 있다고들 하고 패자(敗者)도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없다. 금메달은 일등을 말한다. 올림픽의 금메달은 세계 최고를 의미한다. '세계 최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금메달의 뒤에는 그 선수의 땀과 눈물, 역경을 이겨내는 인내, 그리고 관계자들의 헌신과 노력이 있다. 무엇보다 같은 종목에 참가하는 수십, 수백명과의 경쟁에서 이겨낸다는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상당부분을 투자한 긴 여정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갈 청소년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들은 어떤 교육을 받고 있으며 어떤 인생훈련을 치르고 있으며 어떤 사회적 제도적 틀에 묶여 있는가? 우리의 어린 세대, 젊은 세대는 평준화에 길들여지고 있다. 그들의 교육을 가로지르는 중심축은 평준화이고 그들을 지배하는 교육적 덕목은 평등이다. 경쟁은 못하는 사람을 밟고 넘어서는 '나쁜 것'이고, 돈 있는 계층에게만 유리할 수 있는, 반(反)인간적 장치라는 것이 평준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다. 인생이, 인간의 삶이 언제까지나 평등하게 가고 너 나의 차별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좋다. 경쟁은 힘들고 평준화는 편하다. 경쟁은 때로 각박하고 남을 밟고 넘어서는 작업이다. 비인간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경쟁 없이 살 수 있는 평등한 세상은 그야말로 낙원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다. 평준화에 익숙해진 우리의 청소년들은 곧 경쟁이 판치는 엄혹한 세상에 내동댕이쳐지게 된다. 경쟁이 아닌 배정(配定)에 길들여진 학생들은 학교를 나오자마자 금메달만을 숭상하는 세상의 인심에 직면하게 된다. 경쟁을 나쁜 것으로 여기는 전교조 선생에게서 교육을 받은 우리의 차세대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평준화가 통하지 않는 살벌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때로는 '너 죽고 나 사는' 투쟁에 아무런 훈련이나 준비 없이 나서야 하는 것이다. 경쟁도 훈련해야 한다. 경쟁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우리의 젊은이들을 비무장인 채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죄악이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식을 가르쳐야 한다. 경쟁 없는 세상을 끝까지 보장할 수 없다면 아이들을 덮어놓고 무장 해제해서는 안 된다. 끝까지 평준화를 신봉할 것이면 금메달에 목숨 걸듯이 매달리는 세상을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 왜냐하면 메달은 바로 경쟁이고 금메달은 최고의 경쟁이기 때문이다. 평준화로는 금메달을 딸 수 없다. 전쟁의 폐허 위에 오늘의 경제를 만들어낸 전후(戰後)세대들은 오로지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만 배웠다. 형제끼리도 경쟁했고 친한 친구끼리도 경쟁했다. 때로는 치열하고 때로는 비열하기까지 했던 경쟁 속의 삶이었다. 오늘의 세계는 여전히 경쟁체제로 가고 있다. 경쟁을 부도덕한 것으로 치부하고 평준·평등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전교조식(式) 교육으로는 세계에서 살아 남을 수 없다. 문제는 우리의 의식구조에 있다. 지금 우리는 모순되는 의식의 단면들을 여기저기서 목도한다. 교육제도는 평준화에 머물면서 경쟁의 최고치인 금메달에 환호하는 이중구조가 대표적이다. 입으로는 반미(反美)를 부르짖으면서 자녀들은 미국에 못 보내 안달인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본다. 자유와 인권을 얘기하면서 북한 주민의 인권에는 눈을 돌리는 이율배반의 현상이 버젓이 존재한다. 명색이 법치국가라면서 준법정신은 땅에 떨어진 세태가 판을 친다. 너무나 위선적이다. 경쟁이 사람을 잘못 인도하는 경우가 없을 수 없다. 경쟁에는 여러 부작용이 있다. 그러나 부작용은 그것대로 극복해야지 교각살우(矯角殺牛)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올림픽에도 3·4위전이 있고 패자부활전도 있다. 금메달이 안 되면 3·4위전으로 가야 하고 패자부활전에도 나설 수 있다. 거기에도 경쟁은 있다. 앞서 가는 사람, 뒤처지는 사람이 각각 분수에 맞게 윈-윈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옳지, 앞선 사람을 끌어내려 뒤처진 사람에 맞추는 것은 양쪽 다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2008년 8월 25일, 조선일보 사설)
2009-05-01 16:08:16 | 관리자
제가 힘들어 할 때에 저를 사랑하는 분이 보낸 토저의 글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 주는 글입니다.     영적인 사람의 표식   1.첫째는 행복해지기보다는 거룩해지려는 소원을 가지고 있다.   2.일시적으로 수치를 당하거나 손해를 보더라도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진작되는 것을 원한다.   3.자기십자가를 지려 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환난이나 역경을 당하면 한숨을 쉬며 그것을 자기 십자가라고 부른다. 그들은 그러한 환난과 역경이 성도에게나 죄인에게나 동일하게 임하는 것을 망각한다. 십자가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순종한 데 따른 결과로서 우리에게 임하는 특별한 역경이다.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짐으로서 나타날 결과들을 충분히 알고서 자원하여 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을 선택하며 순종함으로서 십자가 지기를 선택한다.)   4.모든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 (모든것을 하나님의 저울로 재며 모든 것의 가치판단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하는 능력이 성령충만한 생활의 표식이다. 하나님은 바라보시면서 동시에 꿰뚫어보신다. 하나님의 시선은 사물의 표면에만 머물지 않고 그 속으로 꿰뚫고 들어가 참된 의미를 바라보신다. 세속적인 기독교인은 하나의 대상이나 상황을 바라보지만 그것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한다....영적인 사람은 모든 사물을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바라보겠다고 고집한다.
2009-05-01 16:06:58 | 관리자
아침에 아주 인상 깊은 기고문을 읽었습니다. 물론 이 세상 사람의 글이지만 그 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새겨 들어야 할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서 혹시 게으른 생활, 끼리끼리 몰려다니는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내 것과 내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괜히 자만심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요즘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목사들로 인한 성도들의 비명소리에 마음이 아픕니다. 성도와 목사 모두 열심을 내야 하지만 특히 목사들이 성경에 입각해서 바른 것을 바르게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른 것을 지키고 가꾸고 남겨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다음은 황주홍 전남 강진군수의 글입니다.    '저녁 6시 이후'가 선진화돼야 한다  일본 열도가 떠들썩하다. 이틀 연속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으니 그럴 만하다. 물리학상은 3명 모두 일본인이었고, 화학상은 일본과 미국의 학자들이 휩쓸었다. 그 바람에 우리 한반도도 떠들썩했다. 내용은 좀 달라서, 왜 우리는 일본처럼 될 수 없느냐는 주제로 요란했다. 일본은 되는데 한국은 왜 안 될까? 결론은 하나다.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쏟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성과는 노동시간에 비례한다. 일본인이 특별히 우수해서가 아니라면 연구한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노벨상을 휩쓰는 거다. 그뿐이다. 한국인은 선진국 사람보다 훨씬 덜 연구하고 공부한다. 한국 성인 1인당 독서량이 192개국 중 166위라는 UN 통계가 이를 입증한다. 한국인들은 이 부족분을 인맥과 로비와 '배째라'라는 저돌성으로 충당하며 사는 것 같다. 대한민국은 '소모임의 박람회장'이다. 한국인의 모임 성격은 딱 두 가지다. 친목모임 아니면 접대모임이다. 친목모임은 과거지향적이다. 같은 곳에서 태어난 이들의 향우회, 같은 해 태어난 이들끼리의 (동)갑계, 교문을 같이 드나든 사람들의 동문회, 미국 같이 다녀온 직장인들의 찬미회, 시청 총무과를 거친 공무원들의 총우회, 배낭여행에서 만난 젊은이들의 배사랑회…등등 우리들의 소모임은 과거 어느 한때의 인연을 매개로 한다. 당연히 주된 활동과 이야기도 미래보다는 과거를 향한다. 접대모임은 안면 터서 청탁하는 것이다. 고위험 사회에서의 '보험'들기다. 공식적으론 안 되는 일을 사사롭게 해결하는 모임이다. 거의 매일 저녁 접대하고 접대받는 분들도 부지기수다. 밥 먹고 술 먹고, 1차 가고 2차 가고, 노래방 가고 찜질방 가고, 폭탄주 마시고 건배하고… 공무원이건, 직장인이건, 사업가건, 교수건, 법조인이건, 예술인이건 예외가 없다. 찾아다녀야 할 모임이 너무 많고 만나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 '진짜 일'을 할 시간이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문제는, 다른 선진국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퇴근해서 집으로 직행하는 한국인 드물고, 퇴근해서 1차 2차로 직행하는 선진국 사람 드물다. 발렌타인 한번 안 마셔본 교수가 드문 게 한국인 반면, 발렌타인 한번 마셔본 교수가 드문 게 일본이고 미국이다. 그 차이에서 승부가 크게 갈린다. 낮 시간에 일하는 것은 한국이나 선진국이나 별 차이 없다. 결정적 승부처는 오후 6시 이후의 '자유시간'에서다. 긴긴 자유시간을 우리는 과거를 위해, 편법을 위해 소비한다. 선진국 사람들은 마치 낮 시간의 연장처럼 저녁과 밤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생활은 밋밋하고 심심하고 외롭다. 재외동포들은 한국을 '즐거운 지옥'이라 한다. 야간생활이 어쩌면 이리도 위태위태 박진감 있고 육감적인지 힘들지만 재밌어 죽겠다는 거다. 노벨상은 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장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내 단언이 틀리기를 바라지만, 한국에선 노벨상이 나올 수 없다. 공부하지 않고 공부할 수 없는 나라에서 무슨 용빼는 재주로 노벨상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의 6시 이후가 '선진화'되지 않는 한 노벨상은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일이 될 것이다. 노벨상뿐이랴. 한국과 한국인이 6시 이후의 긴 시간을 이렇듯 철저히 과거 찾기, 인연 만들기에 사용하는 한 조국에 더 큰 희망은 솔직히 어렵다. 한국의 선진국 반열 진입은 6시 이후의 과거몰입적, 인맥제일주의적 행태의 변경 없인 불가능하다.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이 인식이 일본의 노벨상 독식에 따른 우리들의 요란한 반성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2009-05-01 15:53:30 | 관리자
저는 요즘 큰 목표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면서 야망과 목표가 점점 없어지게 됨을 느낍니다. 교회를 하면서도 같은 마음입니다. 성도가 늘어도, 안 늘어도 감사합니다. 내 한계 내에서 주님께서 하실 일을 하시리라 믿고 감사할 뿐입니다. 요즘은 오히려 성도들이 느는 것으로 인해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양식과 보살핌을 제대로 주지 못한다면 느는 것이 오히려 화가 될 것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인도에 따라 인생 여정을 반듯하게 마치고 주님께 간다는 것 외에는 다른 목표가 없습니다. 다만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점점 더 많이 생각하고 고민합니다. 점점 더 마음에 다가오는 것은 변화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내 자신과 내 주변의 사람들이 볼 때에 변화가 생겨야 합니다. 하늘에서 오는 변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변화 말입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내 영으로 되느니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슥4:6)."   오늘 아침에 읽게 된 송길원 교수(목사)의 글입니다. 무언가를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라 올립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변화를 추구합시다. 주님께서 독자들에게 은혜와 진리를 충만히 채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송길원 교수의 아름다운 기도    나와 아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오른손잡인데 아내는 왼손잡이다. 그래서 습관을 따라 국그릇을 왼쪽에다 잘 갖다 놓는다. 별거 아닐 것 같은 그 차이가 신경을 건드린다. 거기다 나는 종달새형이다. 새벽시간에 일어나 설친다. 늦잠을 자면 무조건 게으르다고 여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올빼미형이다.밤새 부엉부엉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든다. 도대체 맞는 구석이 없다. 나는 물 한 컵을 마셔도 마신 컵은 즉시 씻어 둔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언제 해도 할 일이며 제가 다시 손을 댈지 모를 일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그게 안 된다. 찬장에서 꺼내 쓸 그릇이 없을 때까지 꺼내 쓰다가 한꺼번에 씻고 몸살이 난다. 나는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나와 달리 아내는 떠나야 할 시간에 화장한다고 정신이 없다. 다가가서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화장품 뚜껑이라는 뚜껑은 다 열어 놓고 있다. 나는 그게 안 참아진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낸다. “아니, 이렇게 두고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향 다 날아가고.뭐 땜에 비싼 돈주고 화장품을 사. 차라리 맹물을 찍어 바르지. 확 부어버려. 맹물 부어줄까 그래.” 거기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거의 없다.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성경책까지 들이밀었다. “여보, 예수님이 부활만 하시면 됐지, 뭐 때문에 그 바쁜 와중에 세마포와 수건을 개켜 놓고 나오셨겠어? 당신같이 정리정돈 못하는 사람에게 정리정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싶으셨던 거야. 그게 부활의 첫 메시지야. 당신 부활 믿어. 부활 믿냐고?” 그렇게 아내를 다그치고 몰아세울 때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야, 이 자식아, 잘하는 네가 해라. 이놈아, 안 되니까 붙여 놓은 것 아니냐.” 너무 큰 충격이었다. 생각의 전환, 그렇게 나 자신을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게 있다. 나의 은사는 무얼까? 하지만 뜻밖에도 너무 간단하게 은사(gift)를 알 수 있다. 내 속에서 생겨나는 불평과 불만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은사인 것이다. 일테면 내 아내는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종이 나부랭이가 나뒹구는데도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편한게 없다. 오히려 밟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나는 금방 불편해진다. 화가 치민다. 이 말은 내가 아내보다 정리정돈에 탁월한 은사가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은 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 상대방의 마음을 박박 긁어 놓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 사용하라는데 있지 않다. 은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라고 주신 선물이다. 바로 그 때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 아내한테는 뚜껑 여는 은사가 있고 나에게는 뚜껑 닫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그때부터 아내를 대하는 제 태도가 바뀌었다. 아내가 화장한다고 앉아 있으면 내가 다가가 물었다. "여보, 이거 다 썼어? 그러면 뚜껑 닫아도 되지. 이거는? 그래, 그럼 이것도 닫는다." 이제는 내가 뚜껑을 다 닫아 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렇게 야단을 칠 때는 전혀 꿈쩍도 않던 아내가 서서히 변해 가는 것이다. 잘 닫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세게 잠갔던지 이제는 날 더러 뚜껑 좀 열어달라고 한다. 아내의 변화가 아닌 나의 변화, 그렇게 철들어진 내가 좋아하는 기도가 있다. “제가 젊었을 때는 하나님에게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중년이 되었을 때 인생이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평안히 살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늙어 여생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저는 저의 우둔함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기도는 저를 변화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드렸더라면 제 인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2009-05-01 15:31:31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