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어머님 모시고 온가족이 함께했군요.
환영합니다.
진리안에서 자유함과
복된시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024-06-18 20:34:40 | 김경애
하나님계심을 많이 느끼게 해준 책으로 읽으면서 많이 감사했어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성경이 이세상에 있다고 믿는 우리에게는 성경을 읽는 문해력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상을 공감은 하되 진리는 하나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오늘도 하루 잘 살아내겠습니다~^^
2024-06-18 08:12:09 | 목영주
2024년 6월 16일 (주일 오후)
https://youtu.be/_R0BzwBHrM4
2024-06-18 01:19:23 | 관리자
용인에서 오시는
(왼쪽부터) 곽연우 자매님, 홍명수 형제님, 정소피아 자매님
사랑 양 입니다.
반갑습니다!
2024-06-17 21:58:35 | 관리자
안녕하세요? 저는 변해가는 계절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곤 합니다. 초여름의 길목에서 연한 잎들이 짙은 녹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지체들과의 교제도 늘 그러한 것 같습니다. 6월 6일 공휴일을 맞아 오랜만에 만난 자매들과 독서 모임을 하고, 맛있는 점심을 함께하며 나누는 교제 시간은 우리의 부패한 마음을 떠나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항상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게 됩니다. 이번 독서 모임에서는 새 책으로 첫 시간을 가졌습니다. 김재욱 저자의 [문해력으로 읽은 성경]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1장 성경의 이해
제2장 성경과 단어
제3장 성경과 번역
제4장 킹제임스 흠정역 변호
이번 자매 모임에서 나누었던 제1장을 간략히 공유하겠습니다(문해력을 체크 할 수 있는 구절들은 이 책을 읽으실 성도님들의 재미와 유익을 위해 많이 생략하였습니다).
성경 문해력 테스트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다양한 정보를 해독하기 위한 문해력이 많이 요구된다. 물건의 설명서를 보고 조립하며 건전지를 갈아 끼우거나 지하철의 안내판을 보면서 출구를 찾아 나가는 등의 일도 다 이에 해당한다.
성경에도 문해력은 꼭 필요하다. 문해력(literacy)은 유창성(fluency)이라는 개념과도 상통한다. 유창성은 어떤 문장이나 설명을 물 흐르듯 막힘없이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므로 문해력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기 편한 정보가 많은데 문해력이 낮아지는 것은 먹기 편한 초가공식품이 많아지면서 건강이 나빠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많은 성경 지식들은 사실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 것도 많다. 하지만 읽은 부분이 내 부족한 문해력을 통과하면서 엉뚱한 내용이 될 정도면 곤란하다. 마귀는 사람의 뇌를 망치고, 번역가를 망치며, 언어 자체를 붕괴시킨다. 그리고 계속 의미를 바꾸고 더하고 빼며 훼방한다. 우리에게 바른 문해력이 꼭 필요한 이유다. 이제 당신의 성경 문해력을 체크해보자.
[야고보서 3:1]
내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많은 자들은 선생이 되지 말라. 선생인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너희가 아느니라.
● 이 구절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을 다음에서 고르시오.
①웬만하면 선생이 되지 말라.
②선생이 되면 정죄받는다.
③많은 사람이 선생이 될 필요는 없다.
④선생이란 엄중한 자리이니 선생이 되려는 자는 신중해야 한다.
④번이 정답이긴 하지만 ③번도 어느 정도 진실이고, ①번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이 구절은 반어법에 해당한다. 어떤 내용을 강조하고 경각심을 주기 위해 부정적 메시지를 부풀려서 하는 말이다. 성경 구절에서 정답이 여러 개인 경우는 많다. 그래서 우리가 진실을 말할 때 조심할 것은, 진실이 조금만 섞여 있어도 그것이 전혀 거짓은 아니니까 괜찮다는 식의 생각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자기 거짓말을 합리화하기 쉽다. 광고에서도 이런 수법은 자주 쓰인다.
"이 약으로 당뇨가 완전히 개선된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저 약을 먹는 동안 병이 나았을 수 있지만 꼭 그 약 때문에 나은 것인지 알 수 없고, 광고를 보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을 텐데도 이 약을 먹으면 누구나 나을 것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런 광고 문구는 일부분의 진실이면서 교묘한 거짓말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경 구절에 담긴 정답 이외에 다른 보기에 담긴 일부분의 사실, 그 작은 가능성을 일반화해서 확대하고 그것을 진실이나 정설, 나아가 진리로 확정해선 안 된다.
평균적 문해력이 점점 떨어지고 양극단화하는 세상이다. 제대로 읽지 않아서 생기는 손해는 각자에게, 우리 모두에게 돌아간다. 신앙적 성숙함에 더해 말에 대한 이해력과 최소한의 주변 지식을 챙겨 스마트하고 현명한 신앙인이 되도록 이제 말씀 한 줄을 읽어도 신중하게 대하고 주의를 기울여 보자.
교훈이 아닌 '교리(doctrine)'를 가르치신 예수님
교리는 딱딱한 것?
종교란 본래 사람이 만들어 숭배하고 탐구하면 철학적으로 고고한 삶의 길을 찾아 나가는 것으로 인식하기 마련인데, 이런 것은 기독교와 거리가 멀다. 정답이 없이 각자가 찾아가는 해탈과 도달의 과정이 아니라 절대자가 빈틈없이 짜 놓은 어떤 계획을 알려 준 대로 발견하고 깨달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어떤가. 기독교를 통해 복을 받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복이란 인생의 복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육신의 문제를 초월하는 마음의 평안과 영혼의 복이고 천국의 복이거늘, 성경과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생각은 때때로 무척 종교적이며 두루뭉술하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을 파악하고 순종하는 과정이다. 이것을 오해하면 먼길을 돌아갈 수도 있고, 성화와 구원의 순서를 반대로 하느라 괜한 고생을 할 수도 있다.
'교리' 하면 대게 딱딱하고 이론적인 것을 떠올리면서 필수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 교훈과 체계적인 교리가 둘 다 중요한 것이지만 순서가 중요하다. 교리는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고, 예수님도 가르치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어떤 교리를 가르치셨다고 하면 무슨 소리인가 할 수도 있다. 개역성경에는 '교리'라는 단어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교리는 조직 신학 등 후대에 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킹제임스 흠정역은 신구약에 57회나 등장한다.
교훈은 누구나 줄 수 있는 것
마가복음에는 공생에 초기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면서 부정한 영을 쫓아내시는 장면이 있다(막1:22, 27). 제자들과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교리에 권위가 있고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 권위로 부정한 영들까지 내어 쫓으셨다. 개역성경은 '교리'가 아니라 '교훈'이라고 번역했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은 doctrine(독트린, 교리)이라고 번역했지만 영어 현대 역본은 티칭(teaching, 교훈, 가르침)으로 바꿨다. '교훈'이란 가훈, 급훈처럼 일반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은 좋은 얘기 정도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이는 현대 역본 번역자들의 생각이 잘 드러난 번역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기독교가 여러 종교들 중 하나라고 보는 그들은 '독트린'을 '티칭'으로 바꿔 예수님의 사역을 편하하고, 성경의 묘사를 무디게 만드는 것이다.
교리는 하나님의 신비
교훈과 가르침은 성인군자나 철학자도 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교리는 다르다. 기독교 교리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이다. 하지만 어렵지 않다. 성령님이 깨닫게 하시면 놀랍도록 흥미롭고 쉬운 것이 교리다. 그러나 대다수의 강단에서 그저 주제식 교훈이 선포되는 것이 현실이다. 기독교에도 많은 교훈이 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기독교 교리는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경륜이자 로드맵에 관한 필수적인 내용이다. 그것은 신비(mystery)다. 이것은 보편적 교훈에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진리 안으로 들어온 자들만이 깨달을 수 있는 교리 안에 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늘의 왕국의 신비들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마13:11)
교리적 신비의 특징은 말 그대로 비밀이라는 점이다. 믿지 않으려는 자들, 마음이 강퍅한 자들, 목이 곧은 자들,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은다. 성도가 마음을 열고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로 나아가면 유익이 있다.
우리가 올바른 교리를 알아 갈수록 기독교를 여타 종교의 틀에서 뭉뚱그려 생각하는 습성도 점차 버려질 것이다.
하나님이 조물주(造物主)인가?
창조자 vs 조물주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5절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분의 거룩한 형상을 욕되게 하는 자들에 대해 언급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자(Creator)보다 창조물을 더 경배하며 섬겼느니라. 그러나 그분은 영원히 찬송받으실 분이시니라. 아멘. (롬 1:25)
영어로 creator가 아니 Creator라고 이니셜을 대문자로 쓰는 것은 단순한 제조자가 아니라 신적 창조자를 의미하는 것인데, 개역성경은 로마서의 '창조자'를 '조물주'로 번역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롭 1:25, 개역)
물론 '조물주'가 아주 틀린 번역은 아니다. 하지만 조물주라는 말은 좀 더 중립적인 용어다. 세간에 떠도는 유행어 중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있듯이 불신자들도 조물주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물론 알 수 없는 만물의 제조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조물주는 인터넷만 검색해 봐도 제인 먼저 원불교 용어 사전의 설명이 등장한다. 원불교에서는 조물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생령이 다 각각 자기가 자기의 조물주라고도 한다니, 이런 사상이야말로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창조물을 창조자와 뒤바꾸는 개념이 아닐까.
창조(創造)와 조물(造物)은 다른 말이다. '창조'는 무언가 새롭게, 또 창의적으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개념인 반면에, '조물'은 글자 그대로 무언가 만든다는 뜻만이 들어 있다. 또한 조물주라는 말은 알 수 없는 만물의 제조자를 '주(主)'로 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타 종교의 잡신을 '주'로 인정할 수 있는 위험한 표현이다.
성경은 문학 작품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적 선포이므로 단어의 기계적 중립성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다. 정확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주관적으로 번역해야 오히려 더 나은 번역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물주'라는 단어는 오역이 아닐지 몰라도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로마서 1장 25절은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단순한 조물주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언제나 옳으신 하나님 편에 서라!
공정성과 객관성의 문제
법원이나 언론은 늘 객관성과 중립성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의 생각은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고, 자기 이득을 위해 게편을 드는 가재일 수밖에 없다. 그 핵심에는 돈이 있다. 돈이 왕이며 맘몬이 최고신이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하나님은 재판을 공정하게 하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인간의 갈대 같은 마음을 아시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객관성에도 종류가 있고 대상이 있다. '자로 잰 듯한 중립'이라는 말이 있는데, 언론이라면 감정을 빼고 양쪽의 의견을 글자 수까지 동등하게 보도할 정도록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데 양쪽 말을 똑같이 다룰 수 없는 것처럼 그런 중립은 공평일지는 몰라도 공정은 아니다. 사안의 경중이나 정의에 대한 기준이 빠진 중립을 비꼬는 '기계적 중립'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판단할 때도 이런 갈등에 부닥칠 때가 있다. 기독교는 세상에서 객관적인 종교일 수 없다. 기독교의 진리는 가장 공정하므로 아무도 변명할 수 없지만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불공정이며 횡포로 보일 것이다. 그러면 어디까지 그들의 비판을 수용해야 할까...
예수님을 예수님이라 부르지 못하는 성경
누군가 권력가나 대기업과 소송 중인데 판사가 내 편이 아니면 낭패일 것이다. 성경도 하나님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이 해석하거나 번역하거나 설교하면 제대로 된 것일 수 없다. 특히 성경은 무조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예수'라고 쓰는 성경이 거의 전부인데, 물론 그것이 문법적으로나 어법상 맞는 것이지만 과연 잘하는 일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마 27:26, 개역)
바라바도 바라바, 예수님도 예수다. 문법이란 세상의 약속이지만 하나님 위에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만은 예수라 쓰지 못하겠다 하면 그만이다.
그때에 그가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한 뒤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주니라. (마 27: 26, 흠정역)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려운 일인가? 고유 명사에 '님'을 붙이면 안 되는 어법을 그렇게 잘 따지려면 모든 면에서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한국어 어법상 회중기도 중에 타인에게 존칭을 붙여선 안 된다. 대화하는 대상인 하나님보다 더 낮은 존재를 언급할 때는 내게 아무리 높아도 존칭을 쓰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부분은 기독교용어연구회에서 오래전부터 지적하고 시정을 교육해 왔지만 지켜지지 않는다. 몰라서도 그렇지만 알아도 면전에서 담임 목사를 김 목사, 이 목사 이렇게 지칭하는 대표기도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에게 하는 기도인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가? 물론 사람도 듣기 때문이고, 어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오해할 수 있으므로 무조건 존칭을 빼기도 어렵다. 어법은 알아도 존중의 의미이며 관행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사람 눈치 보면서 어법을 파괴하면서까지 존중을 잘 하는 사람들이 성경은 왜 굳이 어법대로 예수님을 '예수'라고 표기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책은 애지중지하면서도 안에 있는 표현이 하나님을 깍아내리고 폄하하는데도 무감하다면 말씀을 아끼고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객관적일 수 없다. 어느 쪽으로든 기울게 되어 있다. 그럴 바엔 하나님 쪽으로 기우는 것이 낫다. 실패할 수 없는 공평한 길이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서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들을 경홀히 여기리라"고 하셨다. 사람도 그럴 텐데 당연한 이치 아닌가…
타 종교와 기계적 균형을 맞추는 자들, 마치 남 얘기하듯 성경과 교리와 신학을 나열해 놓고 정답은 없다고 말하는 자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존중해야 하지만 가장 먼저 하나님 자체인 말씀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아무리 편파적이어도 지나치지 않은 하나님 편에 서라!
2024-06-17 18:58:42 | 박수현
1. 샬롬!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과 은혜가 온 교회와 성도님들에게 임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2. 저는 대구에 살고 있으며 6/29일 외부인 초청 세미나 행사 신청자 입니다.
3. 동 행사와 관련하여 몇가지 제안(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의 생각 : 외부인들 참석에 도움 되리라 봅니다)
1) 대중 교통편
- 네이버 등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나
혹시 좀더 쉽게 사랑침례교회(이하 "교회"라 함)에 당일 도착 할 수 있는 방법 알려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 저는(외부인) 경부선 수원역이나? KTX 광명역? 에서 교회에 도착 할 수 있는 대중 교통편을 알고 싶습니다.???????
- 따라서, 교회 성도님들 중 주일날에 수원이나 광역쪽에서 교회로 예배 참석하시는 분 정보 좀 알려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2) 행사 당일 그동안 목사님께서 광고 시간에 소개한 책들 전시 및 구입(판매) 가능 할 수 있도록 가판대 등을 마련 하실 수
있는지요?
- 특히 마제스티 성경책과 찬송가는 여러분들이 구입을 희망 할 것으로 판단 됩니다.
3) 당일참석하시는 분들 지역별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장소 마련등이 가능 한지요?
- 저는 코로나 이후 계속해서 유튜브로 교회 예배을 통하여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 매 주일 예배시간때 유튜브로 예배 참석 하시는분들을 조회 해 보면 1,000명 - 1,300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 따라서, 대구에서도 유튜브로 예배 드리시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어 당일 행사 참석하시는 분들과 교제를 통하여
현장 예배(지역 예배) 참석 등에 대하여 협의(논의) 등을 하고자 장소 마련 등을 부탁 드립니다.
(예 : 당일 예배당에 지역(대구)별로 별도 표시 팻말 등을 해 두시면 합니다.)
4) 교회 자유게시판에 당일 행사 내용이 올라와 있으나 구체적인 시간 계획이 없어 상세한 시간 계획 알고 싶습니다.
- 당일 오후 2시 부터 시작 한다고 되어 있으나
(1) 점심은 본인들이 해결하고 참석해야 되는지?
(2) 당일 행사 종료 시간은 대략 몇시인지 알고 싶습니다. ( 사유: 대중 교통 예약 관련해서 필요 합니다.)
4. 당일 행사에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넘치기를 기도 드리며
- 위 내용들은 저의 짧은 생각이오니 긍휼히 여기시고 연락 주시면 당일 행사 참석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 됩니다.
감사 합니다. - 샬롬!!!! (대구에서 참석자 이창훈 형제)
2024-06-17 13:30:21 | 이창훈
2024년 6월 16일 (주일 오전)
https://youtu.be/jVpgXvMzwWE
2024-06-16 15:37:10 | 관리자
2024년 6월 16일 (주일 오전)
https://youtu.be/jVpgXvMzwWE
2024-06-16 15:37:10 | 관리자
2024년 6월 9일 (주일 오후)
https://youtu.be/zf9Hlz2hOGw
2024-06-16 15:31:52 | 관리자
안녕하세요?
6월 2주차 성경읽기 퀴즈 정답을 올립니다.
샬롬~
1. 솔로몬이 번제 헌물을 드린 놋 제단은 어디에 있나? (1장)
기브온(3절)
2. 주의 집을 건축하기 위해 이스라엘 땅으로 온 타국인의 숫자는? (2장)
십오만 삼천육백 명(17절)
3. 제단에 놓인 바다 하나에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은? (4장)
삼천 바스(5절)
4. 솔로몬은 온 이스라엘과 함께 며칠 동안 제단 봉헌 예식과 명절을 지켰나? (7장)
이레+이레 총 14일(9절)
5. 솔로몬이 에돔 땅에 갔을 때 그의 종들이 후람의 종들과 함께 금을 취해 온 곳은? (8절)
오빌(18절)
6. 솔로몬의 왕좌 앞에 이르는 여섯 계단 위에 몇 마리의 사자 형상이 있나? (9장)
열두 마리(19절)
7. 여로보암은 솔로몬 왕을 떠나 어디로 도망가서 지냈나? (10장)
이집트(2절)
8. 이스라엘에서 온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얼마동안 유다와 르호보암을 강건하게 했나? (11장)
삼 년(17절)
9. 이집트 왕 시삭이 유다를 침공한 시기에 활동한 대언자는? (12장)
스마야(5절)
10. 유다 왕 아비야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의 싸움에서 누가 승리했나? (13장)
유다(18절)
11. 에티오피아 사람 세라와 유다 왕 아사가 전투한 골짜기는? (14장)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10절)
12. 대언자 오뎃의 말을 듣고 우상들을 제거하고 주의 제단을 재건한 유다의 왕은? (15장)
아사(8절)
13. 바아사가 건축할 때 쓰던 라마의 돌과 재목을 가져와 아사 왕이 건축한 곳은? (16장)
게바와 미스바(6절)
14. 여호사밧이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유다의 도시로 보낸 제사장들은? (17장)
엘리사마와 여호람(8절)
15. 이스라엘 왕이 라못길르앗으로 싸우러 가기 전에 부른 대언자들의 수는? (18장)
사백 명(5절)
16. 여호사밧이 라못길르앗 전투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맞으러 나간 선견자는? (19장)
예후(2절)
17. 아합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이스라엘 왕들처럼 악한 길을 따른 왕은? (21절)
여호람(6절)
18. 아하시야 왕에게 조언자의 역할을 한 사람은? (22장)
그의 어머니 아달랴(3절)
19. 요아스를 유다 왕으로 세우기 위해 아달랴를 몰아낸 제사장은? (23장)
여호야다(14절)
20.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죽은 뒤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였나? (24장)
유다의 통치자들(17절)
2024-06-16 13:44:14 | 관리자
참 좋은 말씀입니다. 미운 생각 덜하게 바쁜 일상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유일하게 제가 뿌듯해 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매일 말씀 한줄을 암송하게끔 환경을 만들어준 거예요~^^ 오늘도 주인이신 예수님께 남은 오후를 드립니다..
2024-06-14 16:24:18 | 목영주
산골에 관한 추억 있으신게 부러워요! 자연만큼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없는것 같아요. 시멘트 바닥틈 사이로 나온 민들레 두 송이 보면서도 하나님이 느껴져 울컥할 때가 있어요~^^
2024-06-14 16:20:59 | 목영주
Redeeming the time & Fasting
'Redeeming the time'이라는 구절은 에베소서 5:16과 골로새서 4:5에 나온다. 여기서 구속(redeem)은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재조정하고, 세속적인 요소들로부터 시간을 구출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어디에서 어디로 구속해야 하는가?
마귀에게 빼앗긴 시간을 찾아야 한다. 에베소서 5:16에서는 "Redeeming the time, because the days are evil."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악한 날'은 우리가 세상에서 마주하는 유혹과 세속적인 방해 요소들을 의미한다. 우리가 시간을 마귀의 영향에서 구속한다는 것은 이러한 세속적인 요소들로부터 시간을 되찾아,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어떻게 구속해야 하는가?
시간을 구속하는 방법은 금식(Fasting)이다. 에스라 성경사전을 보면 '금식은 모든 시대 모든 나라에서 사람들은 슬픔을 당하거나 고통을 당할 때 금식했다. 이때에는 몸이 영양분 섭취를 거부하면서 굶주림으로 인한 식욕을 유보시킨다.' 고 나온다. 금식은 음식을 거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좋아 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인생을 자랑하는데 사용하는 영양분을 차단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시간을 사용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것이 SNS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에 얼마나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절제해야 한다. 금식을 통해 우리는 세속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깊이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구속한 다음에는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구속된 시간은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개인의 신앙 성장 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활동들로 채워져야 한다. 골로새서 4:5에서는 "Walk in wisdom toward them that are without, redeeming the time."이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의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올바른 본보기가 되라는 의미다.
구속된 시간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반영해야 하며,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활동으로 채워져야 한다. 구속된 시간은 우리의 영적 성장과 연단을 위한 시간으로 활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 연구와 기도, 묵상 등을 통해 우리는 더 깊은 영적 성숙을 추구할 수 있다.
영적 성장에 집중한다. 금식을 통해, 우리는 그 시간을 성경 읽기와 묵상, 기도에 사용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음식을 건너뛰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통해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또 금식으로 절약된 시간과 자원을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금식하면서 절약한 비용을 기부하거나, 그 시간 동안 자원 봉사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Redeeming the time"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도록 권고하고 명령한다. 이는 단순히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모든 순간을 영적으로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2024-06-14 08:30:45 | 이규환
자유게시판에 너무 오랫동안 새로운 글 없는 것 같아서... ^^
2024-06-13 18:51:21 | 최영오
초여름 단상(斷想)
어디선가 들려오는 뻐꾸기 울음소리
전율처럼 가슴 파고들매
홀연히 시공 속으로 떠나는 생각
멀리도 가 버린 반백년 넘는 세월
정녕 한 줄기 바람이었어라
되돌릴 수 없음 어찌 모르랴만
온몸으로 느껴지는
차라리 처절한 서글픔이여
아카시아 달콤한 꽃 바람에 날리던
그때 그 산골 그리는 마음
아!
이토록 사무칠 줄이야
2024-06-13 18:47:28 | 최영오
돌아가 쉴 본향 있기에 언제나 감사드릴 뿐입니다
2024-06-13 18:38:05 | 최영오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2024-06-13 18:35:13 | 최영오
항상 감사하라, 아멘! ^^
2024-06-13 18:32:40 | 최영오
아멘!
열심히 읽겠습니다 ^^
2024-06-13 18:29:53 | 최영오
구원의 착각에 대하여 생각하곤 합니다. 날이 갈수록 그런 때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말씀을 알면 알수록 그런 경우가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많이 안다는 뜻 절~~~~~대로 아님 ^^)
어떤 경우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느냐 하면, 인터넷 또는 유튜브 등에 나와 그럴듯한 외모와 언변으로 미혹의 가르침 열심히 설파하는 사람들, 영적 무장해제 상태로 아멘 소리 높여 화답하는 더 많은 사람들 접할 때랍니다. 그때마다 떠올리곤 하는 몇몇 말씀 구절들과 관련 생각들을 정리해 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는 롬10:9-10 말씀이 우선 떠오르더군요. 저 사람들 역시 그렇게 믿고 시인했겠지...?...그랬으니까 구원의 확신에 차서 저러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이어서...하지만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다른 어떤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갈1:8 말씀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와 함께 멸망하는 자들에게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이런 까닭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 이것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한 그들이 다 정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살후2:10-12 말씀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사도 바울이 저주한 바로 그 다른 복음임에 틀림없으니...저 사람들은 애당초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고...하나님께서 보내신 미혹으로 인해 거짓말, 즉 거짓 교리를 더욱 확신하게 되고...결국은 모두 함께 정죄에 이르겠거니...라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서...그러면 믿고 시인하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롬10:9-10 말씀은 뭐냐, 저 사람들의 경우 믿고 시인했음에도 구원커녕 정죄로 통하는 미혹의 저주를 받았다는 거잖아...라는 생각, 그러니까, 롬10:9-10 말씀에 관한 딜레마(?)에 빠지게 되더군요.
믿고 시인하는 그 일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란 말인가...?...어쩌고 하며 한참 동안 딜레마 속을 헤맨 끝에, 롬10:9-10의 마음으로 믿고 시인한다는 그 말씀에는 단순히 몇 마디 말을 통한 신앙 고백 이상의 어떤 정신적 또는 영적 상태까지 내포되어 있으리라...라는 나름대로(어디까지나 나름대로 ^^)의 어렴풋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답니다. 안 그러면 롬10:9-10 말씀이 거짓으로 되니까 말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정신적 또는 영적 상태의 의미 관련하여 약간 덧붙이자면, 정녕 마음으로(in heart) 믿은 사람이라면, 바른 성경 찾아 읽고 또 읽으리라 다짐했을 것이고, 진작 바른 성경 알아봤을 것이고, 성경 말씀이 꿀같이 느껴졌을 것이고, 가르치는 사람의 말이 그러한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 기록 탐구하고 싶은 영적 욕구 느꼈을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는 지식 워낙 일천하여 더 이상의 논리 전개는 그렇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구원받지 못했음에도 구원받은 줄로 크게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안타까운 사람들 참 많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끝 )
2024-06-13 18:27:53 | 최영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