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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2008년 5월 교회를 시작한 지 어느덧 18년이 지났습니다. 돌아보면 참으로 감사한 세월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설교 가운데 교회를 시작하며 했던 '헌금의 원리'가 150만 뷰 이상을 기록하며 가장 많이 시청한 설교가 되었습니다. 처음 이 설교를 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만큼 헌금 문제, 특히 십일조 문제가 많은 성도들에게 오랫동안 무거운 짐이 되어 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우리 교회는 이 원칙을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강제로 십일조를 부과하거나 헌금으로 성도들을 압박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18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원칙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과연 성도들도 이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지 함께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억지로 내지 않는 것이 자유라면, 그 자유가 인색함이나 무관심으로 흐르지는 않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금은 강요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인색함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원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한 번쯤 이 헌금의 원리를 다시 읽어 보시고, 내가 지금 바른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성경이 말하는 헌금의 원리:십일조는 신약 성도의 의무인가? 들어가며 헌금 문제는 교회 안에서 늘 민감한 사안이다. 특히 십일조를 둘러싼 논쟁은 어느 교회에서나 뜨거운 감자다. 어떤 교회는 일 년에 한 번씩 성도들을 불러 모아 집사님을 앞에 세워 놓고 서약을 받기도 한다. 앞에서 적게 적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라 사실상 갈취에 가깝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 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신약 성경이 헌금에 대해 가르치는 원리는 이 한 구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1. 구약의 십일조: 신정국가의 세금이었다o 십일조의 배경 십일조가 처음 제도로서 부과된 것은 모세 율법 이후다. 이스라엘은 민주국가나 왕정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국가였다. 그 신정국가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부과하신 세금이 바로 십일조다. 그러므로 십일조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 신정국가라는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o 첫 번째 십일조: 레위인과 제사장을 위한 십일조 (10%) 레위기 27장 30~32절에 기록된 대로, 땅의 씨와 나무 열매와 짐승의 십분의 일은 주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열두 지파 중 레위 지파 전체를 따로 떼어 하나님의 일만 전담하게 하셨다. 성막을 짓고 유지하며, 찬양하고 제사를 집행하는 일이었다. 나머지 열한 지파는 자신들의 수입에서 십분의 일을 떼어 이 레위 지파를 부양했다. 레위인은 다시 자신들이 받은 것의 십분의 일을 제사장에게 드렸다. 이것이 첫 번째 십일조로, 하나님의 일을 위한 재정이었다. o 두 번째 십일조: 본인과 가족이 먹고 기뻐하기 위한 십일조 (10%) 신명기 12장 17~18절과 14장 22~26절에는 놀라운 내용이 나온다. 두 번째 십일조는 제사장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 본인과 그 가족이 하나님 앞에서 먹고 기뻐하는 데 쓰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장소로 곡식과 포도즙과 기름,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가지고 가서 온 가족이 함께 먹으며 하나님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라고 하셨다. 심지어 그 장소가 너무 멀어 짐승을 끌고 갈 수 없다면 돈으로 바꿔서 가져가 혼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서 먹으라고 하셨다.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라도 상관없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수확의 기쁨을 온 가족이 함께 나누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이것이 두 번째 십일조의 목적이었다. 이것은 자기 마음대로 먹고 쓰라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의미였다. o 세 번째 십일조: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십일조 (약 3.3%) 신명기 14장 28~29절에 따르면, 3년이 끝날 때마다 그해 소출의 십일조를 따로 모아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가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고 하셨다. 3년마다 한 번씩 드리는 것이므로 연간으로 환산하면 약 3.3%에 해당한다. o 이스라엘의 실제 부담: 최소 23.3% 이 세 가지를 합산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매해 최소한으로 드린 금액은 23.3%였다. 흔히 십일조라고 하면 10%만 드리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성경이 기록하는 구약 이스라엘의 실제 십일조 부담은 그보다 훨씬 컸다. 더욱이 이것은 강제로 부과된 것이었다. 신정국가의 일원으로서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율법이 부과하는 형벌을 받았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헌물을 드려야 했으므로 신정 정치 체제하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실제 부담은 23.3%를 훨씬 웃돌았다. 2. 구약 역사 속의 십일조o 히스기야와 느헤미야 시대의 갱신 바벨론 포로 이전 히스기야 시대에 십일조 제도가 갱신되었고(대하 31:5~6), 포로 생활 이후 귀환한 느헤미야 시대에도 성벽 재건과 함께 십일조가 복원되었다(느 10:37~39, 12:44, 13:5). 느헤미야가 본국에 잠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백성들이 십일조를 가져오지 않으니 레위인들이 먹고 살 수 없어 모두 자기 밭으로 도망가 버린 상황을 발견했다(느 13:10~13). 하나님의 일을 위한 재정이 끊기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유지될 수 없다는 원리가 여기서 분명히 드러난다. o 말라기 시대의 책망 말라기 시대에는 백성들이 자기 집은 치장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은 내버려 두었다. 이에 하나님께서 말라기 대언자를 통해 책망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내 것을 강도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떤 점에서 주의 것을 강도질하였나이까? 하나니 너희가 십일조와 헌물 면에서 강도질하였느니라.”(말 3:8) 하나님께서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겠다고 약속하셨다(말 3:10).   이 구절의 앞뒤 문맥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을 흥하게 하라는 것이다. 원리 자체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떼어 놓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원리는 신약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다만 이것을 강제로 부과하여 이행하지 않으면 큰 죄인인 것처럼 만드는 방식이 문제인 것이다. 3. 구약에 등장하는 두 가지 개인적 십일조o 아브라함의 십일조 (창세기 14장) 아브라함이 사로잡힌 롯을 구출하고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이 나타났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 이것은 일회적인 사건이다. 그 이후 아브라함이 계속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일회적 표현이었다.   히브리서에서 이 사건을 인용하는 이유는 십일조를 내라는 명령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멜기세덱 앞에 무릎을 꿇었으니 멜기세덱의 제사장 체계가 레위 제사장 체계보다 훨씬 위대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o 야곱의 서원 (창세기 28장)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가다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주시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했다(창세기 28:22). 이 역시 율법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닌 개인적 서원이었다. 4. 신약 성경과 십일조o 마태복음 23장 23절: 이것은 구약 시대의 말씀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들인 판단의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등한시하였도다. 너희가 이것들도 행하였어야 하며 다른 것들도 행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도 십일조를 명령하셨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십자가 사건 이전의 말씀이다. 구약 시대였다. 교회는 아직 형성되지도 않았고 예수님은 아직 십자가에 가지도 않으셨다. 이스라엘 신정국가가 여전히 서 있는 상황에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율법에 따라 십일조를 드려야 했다. 이 구절을 교회 시대 성도들에게 십일조 의무를 부과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o 히브리서 7장: 십일조 명령이 아닌 멜기세덱 논증이다 신약 성경에서 십일조가 언급되는 곳은 히브리서 7장 4~10절이 유일하다. 히브리 크리스천들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 체계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체계라고 주장하며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레위 제사장 체계보다 멜기세덱의 제사장 체계가 훨씬 더 위대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멜기세덱 앞에 무릎 꿇고 십일조를 바쳤으며, 아브라함의 허리 속에 있던 레위도 그 사건 안에 포함되어 있다. 레위 사람들은 죽는 사람들이지만 멜기세덱은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멜기세덱의 제사장 체계를 따라 오신 분이다. 이 구절의 문맥은 십일조를 내라는 명령이 전혀 아니다. o 결론: 신약 성경에 십일조 의무 규정은 없다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교회 시대를 다루는 신약 성경 전체에 성도에게 십일조를 의무로 부과하는 구절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지면서 율법으로 섬기던 시대는 끝났다. 더 이상 레위 제사장도 없고 신정국가도 없다. 그 체계 안에서 신정국가의 세금으로 부과되던 십일조 헌금도 그 형태로는 끝난 것이다. 5. 신약 시대의 헌금 원리o 일꾼이 먹을 것 받는 것은 마땅하다 그렇다고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일을 위한 재정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신약 시대에도 사역자들이 있다. 구약의 성전과 회당이 신약의 교회에 해당하듯, 구약의 제사장과 레위인이 신약의 목사와 선교사와 전도사에 해당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며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다(마 10:10). 사도 바울도 자신은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 손수 일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가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먹을 것을 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했다. o 번창하게 하신 대로, 자기 마음에 정한 대로 고린도전서 16장 2절은 말한다. “주의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번창하게 해 주신 대로 자기 곁에 모아 두어 내가 갈 때에 모으는 일이 없게 하라.”   신약 시대 헌금은 자기 수입에 비례하여, 주일마다, 자기 마음에 정한 대로 드리는 것이다. 가난하여 먹고 살 수 없는 상황이라면 헌금을 못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넘치는 형통함을 받고 있으면서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한 일이다. o 즐겁게 드리는 것이 원칙이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이 신약 헌금의 핵심 원리다.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 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그 앞의 6절에는 이런 원리도 있다. “다만 내가 말하는 바는 이것이니 곧 인색하게 뿌리는 자는 또한 인색하게 거둘 것이요, 풍성하게 뿌리는 자는 또한 풍성하게 거두리라는 것이라.”   많이 거두고 싶다면 많이 뿌려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칙이다. 6. 십일조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모두 같은 마음인 것은 아니다. 크게 두 부류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십분의 일은 최소한 하나님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기쁘게 드리는 성도다. 이런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한국에 많이 있다. 신약 시대에 그게 왜 필요하냐고 이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이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둘째는 십일조를 드리면 자식이 잘된다거나 사업이 성공한다는 식의 맹신으로 드리는 경우다. 이것은 마치 부적을 사는 심리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런 태도는 바른 헌금이 아니다.   반대로 십일조를 안 드리는 사람도 두 부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신중하게 판단하여 구약의 강제 십일조가 아니라 신약의 감사 헌금으로 드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무시하고 헌금 자체를 아예 안 하면서 십일조 드리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흔드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교회에 해로운 일이다. 7. 우리 교회의 헌금 원칙 강제 규정으로 십일조를 세금 걷듯 거두는 것은 헌금의 원리와 배치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는 십일조 봉투도 없고 앞으로도 만들지 않는다. 감사헌금으로 드린다. 다만 아직 양심이 연약하여 십일조라고 쓰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찝찝한 분들이 있다면, 그렇게 드리는 것도 전혀 문제가 없다. 십일조는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일이다. 십일조로 내든 감사헌금으로 내든 그것을 가지고 서로 비난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 건물 유지비는 목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목사와 성도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헌금이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다. 내가 속한 교회가 바른 진리를 전파하며 세워져 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다. 이 바른 인식이 헌금을 바른 자세로 드리게 한다. 마치며 성경의 결론은 간결하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 거기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마 6:21) 말로만 하는 헌신이 아니라, 아픔이 있을 정도의 헌금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아픔이 없는 헌금은 아직 헌금이 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마음에 정한 대로, 즐겁게, 수입에 비례하여 드리는 것. 이것이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헌금의 원리다. 인색하게 뿌리는 자는 인색하게 거두고, 후하게 뿌리는 자는 후하게 거둔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면 교회의 재정 문제는 해결된다.
2026-05-29 06:53:01 | 관리자
오늘도 씩씩하고 바르게 살 수 있게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핍박 억울한 입장에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저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진정이 돼요~^^ 먼저 실수투성이 보잘것없는 저를 빠르게 인정하기-상대는 지금 어떤 어려움에 갇혀 있고 그 원인은 뭘까 생각하기-저들이 극복할 수 있게 내기쁨(나의 하나님)으로 환경(좋은밭)되어주기 입니다.요즘은 말씀에 순종하고자하는 결단! 하나님의 기쁨을 최우선 맨앞에 두기 작전으로 살고 있어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를 드리라.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5장16~18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https://www.youtube.com/live/_cyHvoDNL-E?si=jM6TdUi7_wb0MLGt
2026-05-28 09:21:37 | 목영주
긍휼 : 급진적인 사랑, 파격적인 사랑   긍휼에 대한 경험(적용)을 공유하고자 이 글을 올린다. 나는 솔직히 말해 중언부언하는 사람, 동문서답하는 사람, 횡설수설하는 사람, 두서없이 말하는 사람, 말이 많은 사람들을 그리 좋게 보지 않는 성격이다. 대화가 답답하게 느껴지면 속으로 선을 긋는다. 이런 나의 모습이 늘 불만이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긍휼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최근 정동수 목사님의 누가복음 설교를 다시 듣고 있다. 설교를 듣던 중 “긍휼”에 대한 말씀이 예전에 들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다가왔다. 마치 번개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동안 나는 긍휼을 그저 누군가를 불쌍하게 여기는 감정 정도로만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긍휼은 단순히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마음으로 상대의 아픔을 바라보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최근 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한 팀원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6명이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인데, 한 팀원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 회식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고, 대화를 하면 질문과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흐름과 맞지 않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회의를 해도 혼자 다르게 이해하는 일이 반복되고, 팀원들의 피로감도 점점 커져 갔다. 결국 팀 안에서는 “말이 안 통한다”, “함께 가기 어렵겠다”, “차라리 제외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사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프로젝트는 결과도 중요하고 팀워크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교를 듣고 난 후, 그 팀원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계속 저 사람의 문제만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작 저 사람의 마음과 아픔은 알려고 했을까?”   예수님께서는 늘 사람들이 밀어내던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셨다. 사람들은 세리를 죄인 취급했지만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아가셨다. 사람들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정죄했지만 예수님은 먼저 그 여인을 보호하셨다. 사람들은 나병 환자를 가까이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몸에 손을 대셨다. 또 사람들은 마귀 들린 사람을 두려워하며 동네 밖으로 내쫓았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을 찾아가 회복시켜 주셨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그분께서 무리들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으니 이는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같이 지치고 널리 흩어졌기 때문이라.”(마태복음 9:36)   또 굶주린 무리들을 보시고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마가복음 8:2)   예수님의 긍휼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분은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직접 다가가셨고, 들어주셨고, 만져주셨고, 회복시켜 주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도 이번에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전에 먼저 긍휼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기로 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다. 업무 이야기만이 아니라 무엇이 힘든지, 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려운지, 어떤 상황에서 부담을 느끼는지를 천천히 들어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판단하지 않고 계속 들어주자 조금씩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그 사람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내가 먼저 달라지기 시작하니까 주변 팀원들의 시선과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같이 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던 사람들도 점차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공동체 안에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팀원은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다.     이번 일을 통해 나는 긍휼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 배우게 되었다. 긍휼은 멀리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아픔 가까이로 걸어 들어가는 마음이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상냥한 마음을 품고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해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에베소서 4:32)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특별한 경험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 역시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선을 긋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긍휼을 실제 삶 속에서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는 것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 주변에 “불편한 사람”, “함께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여겨지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을 조금 더 깊이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것보다 먼저, 한 사람을 긍휼로 품는 법을 배우자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으로 사람을 바라볼 수는 없을지라도, 한번 더 물어보고, 한번 더 들어주는 것이 긍휼한 마음을 품는 첫 단추가 아닐까!       그리고 시간을 내어 목사님의 누가복음 강해 18편, 19편. 20편을 꼭 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끝.
2026-05-27 17:46:08 | 이규환
안녕하세요? 시흥에서 출석하시는 이남규형제님(김현숙자매님)의 모친 여영자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 빈소: 화성함백산장례식장 , 5호실(2층) * 주소: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숙곡리 산12-5(서해로2448-32)(서부권) * 발인: 2026년 5월 28일 (목) 12시 35분 * 장지: 함백산 추모공원 ※ 빈소 준비 관계로 조문은 오늘 오후 2시 이후부터 가능하오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부의금】 농협은행 59102013748 이남규 저희 교회에서는 몇몇 성도들이 오늘 저녁 7시 30분에 조문할 예정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기억해두셨다가 위로의 마음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상을 당한 가정에 우리 주 예수님의 큰 평안을 기원하며 로마서 12장 10, 15절 말씀을 드립니다. (롬12:10)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친절하게 애정을 가지고 서로 먼저 존중하며 (롬12:15)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피 우는 자들과 함께 슬피 울라.   샬롬. 애경사 위원회 기형섭 형제 (010-3712-4046)
2026-05-27 10:25:08 | 관리자
자매님들 화사한 웃음에 나라걱정을 잠시 잊었습니다~^^ 말씀(하나님)으로 마음을 충분히 적신후에야 버틸수 있는, 마지막때임을 실감하는 하루하루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기록된 바,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하였느니라,하시더라.-누가복음4장4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https://m.youtube.com/watch?v=381GiIHyl_A&pp=iggCQAE%3D
2026-05-23 21:01:55 | 목영주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한 주간도 성령님과 함께 걸으셨나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내가 존중히 여기며 나를 멸시하는 자들을 경홀히 여기리라" 이 말씀에 따라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워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나라의 국민들이, 성도들이 눈을 뜨고 올바른 의를 선택하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이번 시간에는 챕터10. 신대륙의 청교도 신정국가 - [광야에서 피어난 자유]이며, 미국에서 침례교가 말하는 정교 분리와 양심의 자유, 국가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교회라는 이상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통해 비로서 역사속에 모습을 드러냈는가? 그리고 메사추세츠 신정국가의 구조 및 한계와 로저 윌리엄스가 로드 아일랜드에서 시작한 종교의 자유가 침례교회로 이어지는 과정과 확산, 그리고 미국적 자유 개념 형성에  어떤 토대를 마련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 청교도들의 이주 - 또 다른 탈출 - 17세기 초 영국은 분리주의자들과 청교도들에게 여전히 위험한 곳이었다. 탄압을 피해 그들은 새로운 선택지를 고민하였고, 그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곳이 신대륙 아메리카였다. - 1620년 9월,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메사추세츠 주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1630년에는 약 1,000명의 청교도들이 11척의 배를 타고 메사추세츠만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빠르게 번영하는 식민지가 되었으나 진정한 종교의 자유가 있는곳은 아니었다. (자매:청교도들의 신대륙 이주와 정착이 미국의 역사와 종교의 자유를 가져온 것이 아니고, 이 책의 배움을 통해 침례교의 유산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 역사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현재의 미국과 한국의 상황을 보며 깨닫게 되네요.) ● 메사추세츠의 신정국가 - 메사추세츠 식민지의 국가 운영이 청교도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에, 영국 성공회 대신 회중교회(청교도)가 지배하는 국가 교회체제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 회심한 교회 회원들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졌기에 회원 자격을 거절당한 수많은 가정에 벌금과 차별등, 깊은 상처를 남겼다. - 1656~1661년 사이에 퀘이커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4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메리 다이어라는 여성도 자신의 신앙의 신념을 지킨다는 것으로 인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자매:영국의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왜 여전히 국가교회를 하며 다른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박해를 했을까? 먼저는 인간의 악함 때문이고, 이들이 이주한 1620년경에는 아직 킹제임스 성경이 보편화 되지 못했기에, 읽고 연구하며 사고하는 부분에서 부족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이것이 청교도들이 신대륙에서 구현한 '종교의 자유'의 실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자유롭게 실천할 자유를 원했지만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같은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자매:존 코튼 목사는 "이단자를 관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는것이다" 란 말을 하였는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그 분 자체로 거룩하신 분이기에 사람의 말이나 행위가 거룩함을 훼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을 추종하는 사람들도 그도 오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좋은 부분만 취하고 악한 일에는 눈을 감는 다면 오늘 날 좌파의 사상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 로저 윌리엄스 - 다른 목소리 - 1631년2월, 윌리엄스와 제인이 보스턴에 도착했을때 메사추세츠 청교도들은 그를 환영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교육받은 학자였고 능력있는 설교자였으며 열정적인 청교도였다. - 목사직을 제안한 보스턴 교회가 여전히 영국 국교회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자 '분리되지 않은 교회'라고 비판하였고, 곧 윌리엄스의 급진적 견해들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 윌리엄스의 위험한 생각들 - 그의 주장들은 메사추세츠 청교도 지도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첫째, 국가는 종교를 강제 할수없다. 둘째, 교회는 순수해야 한다. 셋째, 영국 왕은 원주민의 땅에 대한 권리가 없다. 이는 식민지의 법적 기초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넷째, 각 사람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 할 권리가 있다. 이 발언은 당시로서는 극도로 급진적인 주장 이었다. 그는 양심의 자유는 진리 뿐 아니라 오류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매:윌리엄스의 주장 중 교회는 순수해야 한다는 것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한번 쯤 생각해볼 문제인것 같습니다. 오늘 날에도 적용해보면, 우리 교회안에도 회심한 성도들만의 모임이 아니기에, 믿음을 고백한 후 침례를 받고 회원으로 가입하는 과정을 둔 방침은 현대 교회안에 꼭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 재판과 추방 - 1635년 10월, 총회 앞에 소환된 윌리엄스는 '새롭고 위험한 의견을 퍼뜨리고 정부와 교회의 권위를 거스른 죄' 라는 판결을 받았고 메사추세츠 식민지에서 추방 당했다. 1636년1월, 윌리엄스는 한겨울의 폭풍 속으로 도망쳐 숲으로 숨어 들어갔다. ● 광야에서의 14주 - 이후에 윌리엄스가 겪은 14주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윌리엄스는 원주민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로 존중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그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 프로비던스 - 하나님의 섭리 - 1636년 봄, 윌리엄스는 나라간셋 부족에게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새로운 정착지를 세우며 그 땅을 프로비던스(Providence, 하나님의 섭리) 라고 이름 지었다. - 공동체의 원칙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선언했다. 예배의 참석을 강요하지 않았고, 국가가 특정 교리를 강제할 수 없으며, 모든 남성에게는 투표권이 주어졌다. 교회는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지 않으며 정부는 교회를 간섭하지 않는다. 프로비던스가 완벽한 공동체는 아니었으나 종교의 자유에 관한 한 시대를 몇 세기나  앞서간 곳이다. ● 1638년 - 미국 최초의 침례 교회 - 1638년 윌리엄스는 홀리만을 포함한 약 10명에게 침례를 주며 미국 최초의 침례 교회가 프로비던스에 세워졌다. 이 교회는 오늘날까지 존재하며 프로비던스 제일 침례 교회로 불린다. 이 교회는 초창기부터 침례교의 핵심 원리를 실천했다. ● [피로 물든 박해의 교리] - 윌리엄스의 대작 - 1644년 윌리엄스는 [피로 물든 박해의 교리]라는 책을 런던에서 출판하였다. 이 책은 종교적 박해를 정당화하는 모든 논리를 공격하는 강력한 저술이었다. 영국 의회에서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지만 사람들은 이를 몰래 읽으며 그의 사상은 점차 확산되었다. ● 로드 아일랜드 - 피난처가 된 식민지 - 1644년 윌리엄스는 영국 의회로 부터 로드 아일랜드 개척지에 대한 허가서를 얻었는데 이 허가서는 로드 아일랜드의 독특한 원칙, 즉 종교의 자유, 정교 분리, 자치권을 보장했다. 로드 아일랜드는 17세기 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있는 곳이었다. (자매:청교도들은 로드 아일랜드를 이단들의 소굴이라고 비난했지만, 종교의 자유는 경제적으로도 성공하게 하며 시장 경제의 모델이 된것 같습니다. 정교 분리와 자유 시장 경제가 하나님의 원리에 가장 가깝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깨닫게 됩니다) ● 미국 침례교의 확산 - 18세기에 일어난 대각성 운동은 영적 부흥 운동이었다. 휫 필드와 에드워즈같은 설교자들이 이 운동을 이끌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했고 교회들이 성장했다. 침례교의 신자침례 강조와 회심에 대한 강조는 폭발적으로 성도들이 늘어나게 했고 18세기 말, 침례교는 미국에서 가장 큰 교파 중 하나가 되었다. (자매:진리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타인의 양심을 강제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지만, 분명한것은 스스로 교리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성경적 지식과 믿음이 있어야겠습니다. 요즘 교회안에 몰래 들어와 분란을 조장하는 다른 교리를 가진 자들에게는 더욱 단호함이 필요하고 때론 교회의 리더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것도 기억해야 겠습니다.)        
2026-05-23 12:28:59 | 최성미